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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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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1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대학시절 좋아했던 시입니다.
이  시를 지은 브레히트는 히틀러 정권에서 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이 사라지는 것을 그는 직접 봤다.
마가렛 슈테핀, 발터 벤야민, 영화감독 칼 콕 등.
이 들을 바라보면서 브레히트는 이 시를 지었다고 하네요..

역시 인터넷이 발달된 대한민국이라 브레히트에 대해서 치니 그에 대한 멋진 사진이 주르륵 뜹니다..
그중 나름 멋진 사진을 올려봅니다..
근데 너무 젊습니다. 그려..

며칠전 승진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희비가 엇갈릴 수 밖에 없지요.  저도 승진대상이었고 운 좋게도 저도 승진이 되었습니다.
그러며 명이 있으면 암이 있다고.
승진에 누락된 분들도 있습니다.

저와 관련된 업무를 하는 분들도 많은 분들이 승진했고 일부는 누락되었습니다.
며칠의 휴가를 쓰면서 쓰린  서운한 마음을 달래는 그 분들을 보면서 문뜩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품이란 시를 떠 올렸습니다.
브레히트가 들으면 그 고상한 고민을 하찮은 승진에 비유했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도 일종은 전쟁이라 이야기되므로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그렇지 못한 분을 위한 위로의 마음 정도는 용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그분들 모두 기운을 차리고 심기 일전해 다시한번 멋지게 도전하시는 모습을 기원합니다.

** 추신
예스24를 통해 베르톨트브레히트의 시집과 같은 제목의 박일문의 소설을 주문했습니다.
아침에 깨어보니 조금은 부질없다는 생각도 해 보았는데…그래도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과거로만 가고 있습니다.. 미래로 미래로 가야하는데..

 


 

[환락지에서 문화 관광지로 남이섬 사례]상상은 남이섬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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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중앙일보에 나온 남이섬이야기를 읽었다.
예전에 그 성공 사례에 대해 잠깐 들은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남이섬 사례를 정리해 보고 싶었다.

1. 유원지 문화의 쇠락과 함께 몰락의 위기가 오다

1960~90년대에는 <겨울나그네>, <맨발의청춘>, <바보들의행진> 등의 영화촬영과 강변가요제가 열렸던 남이섬은 행락객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로 인식되어 알려져 있었다.
야구 연습장, 사격장, 어린이 놀이기구, 동물원, 캬바레 등이 있어 행락객들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던 전형적인 유원지였다.

시설은 낡고 바가지 요금이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유원지 문화가 쇠락하고 IMF를 격으며 점차 경영 위기를 맞는다.

뚜렸한 회생 방법도 없었고 새로운 시도를 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대출도 어렵고 팔고 싶으나 사가는 사람이 없는
회생불가/대출불가/매각불가 상태였다.
또한 직원들은 회사의 회생에는 관심없고 퇴직금 걱정뿐 복지 부동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남이섬_-6700.jpg

2.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한 회생의 길을 찾다.

그러다가 2001년 새로운 CEO로 취임한 강우현대표는 예술인 특유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타개책을 찾았다.
'갖고 있는 게 불가능뿐이라면, 그거라도 팔아보자'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불가능을 파는데, 다 팔지는 않고 '불(不)'자만 팔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시작한 게 '불(不)장난'입니다. 불만, 불행, 불안, 불쾌, 불평, 부족, 부정…. '아니 불'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단어들에서 불자를 지우는 일을 시작했죠. 불자를 지우고 본래 뜻을 되살리는 일, 그게 바로 불장난입니다."

2.1. 3가지 생존 목표를 세우다.

2001년 9월 1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서 아래와 같이 3가지 생존 목표를 세웠다.

2.1.1. 유원지에서 관광지로

남이섬은 먹고 마시고 고성방가하고 싸우는 대표적인 유원지였다. 이런한 유원지 문화는 사람들의 눈쌀을 찌프리게하고 사람들이 다시는 찾지않게되므로 볼거리가 있는 관광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2.1.2. 소음에서 리듬으로

전형적인 유원지의 특성인 고성방가에서 벗어나 문화 contents를 채운다

2.1.3. 경치에서 운치로

아름다운 경치에서 더 나아가 스토리가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유원지 문화를 관광 문화로 바꾸자고 하였으나 전문인력과 자금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있는 대로 써 먹고 가진 것으로 승부하자" " 폐자원의 창조적 재활용" 등과 같은 역발상 아이디어들이 접목되기 시작했다.

강우현대표가 생각하는 관광이란 "볼관 빛광" 그대로 볼거리가 많고 사진찍을 꺼리가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사진이 잘 나오도록 전봇데를 없애고(전봇대가 있으면 사진이 망친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유흥지 시절에 생긴 알록달록한 간판들을 없앤다.

2.2. 역발상의 볼거리를 만들자

사진 찍을 거리가 많아야하므로 색다른 접근을 시도하였다. 즉 계절을 거슬러 가능 것이다.

여름에는 군불을 피우고

남이섬_군불.jpg

겨울에는 여름을 주제로 "한겨울 여름축제"를 열었다.
또한 새해는 10월부터 시작해 미리미리 분위기를 띄우고 이름 봄까지 색스폰을 불었댔다. — 나름 분위기를 잡으려고 ㅎㅎ

남이섬 한겨울 여름축제.gif

그리고 모든 공간을 무대로 삼아 여러가지 이벤트를 사시사철 계속해 남이섬에는 항상 볼거리 찍을거리가 가즉하도록 했다.
한복쇼, 김치담그기 등등….

쓰레기는 쓸 애기로 쓰레기를 재활용해

남이섬 이슬정원2.jpg

돈이 없으므로 주변의 쓰레기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쓰레기'라는 말을 '쓸 애기'라는 말로 바꿔 부르고…
남이섬의 명물인 '이슬 정원'도 그런 과정에서 생겼다.
유원지다보니 엄청난양의 소주병이 쓰레기로 나온다. 그래서 3000여 개 빈 소주병을 이용해 정원을 만들고는 "참이슬"이란 소주 상표를 따 이슬정원이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이러한 소주병을 모아 팔면 공병으로 개당 40원을 받지만 소주병을 이용한 공예픔으로 만들어 팔면 훨씬 많은 이윤을 남길 수도 있고 남이섬에 가면 먼가가 있다는 이미지도 심을 수 있다.

아래는 이슬접시라 명명된 공예품..
남이섬 이슬접시.jpg

또 쓰레기를 태운 재를 이용해 도자기를 만들었고, 가지치기한 나무들은 토막으로 잘라 건물 벽을 장식하는 데 썼다. 화장실 변기는 화분으로, 자투리 합판은 안내판으로 탈바꿈시켰다.

알루미늄캔을 압착해 만든 조형물..

남이섬에서는 이런식으로 쓰레게를 재활용해 조형물을 만들어 볼거리를 풍부하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 식상해지면 팔고 다시 새로운 조형물로 대체한다고 한다.

▽ 남이섬 쓸애기_알류미늄캔 조형물

남이섬 쓸애기_알류미늄캔 조형물.jpg

▽ 남이섬 화장실 내부

남이섬 화장실 내부.jpg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기에도 바쁜데 뭐하러 안 되는 걸 구태여 생각하나요. 가진 게 폐품뿐이고 쓰레기뿐이라면 그걸 써먹을 궁리를 해야지. 돈이 없어서, 직원들이 일을 못해서 사업을 못하겠다고요? 돈이 없으면 벌어서 쓰고 직원들이 마음에 안 들면 가르치면 됩니다. 중요한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상상력, 발상의 전환입니다. 불가능은 희망의 블루오션이에요."

2.3. 스토리를 만들자

초기 남이섬의 유일한 숙박시설은 낡아서 제대로된 난방도 되지 않았고 물이 새는 등 아주 문제가 많았다. 문제는 수리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 별밤은 더 좋다. 하지만 새벽을 걷어 올리는 물안개를 마주하면 할 말을 잃게 된다"고 적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문의를 해왔다. 아침안개는 몇시에 피느냐? 남이섬에 들어가는 배의 첫시간은 언제냐?
결국 새벽을 걷어 올리는 물안개를 보고 싶은 사람을 대상으로 좀 불편함을 무릎쓰고 낡은 숙박시설의 고객이 되도록 했다.

▽ 남이섬 안내판

남이섬-안내판.jpg

▽ 남이섬 아침 안개

남이섬 아침안개.jpg

그리고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 별밤은 더 좋다고 이야기하며 그래서 밤 10시가 되면 전깃불을 꺼버렸다.
달과 별을 실감나게 만끽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경치가 아닌 운치를 팜으로써 가치를 한단계 upgrade한것이다.
이러한 효과와 더불어 전기세도 아낄 수 있는 이중의 효과까지 있었다.

타조와 토끼 등 동물을 방목하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살아있는 볼거리가 생겼다. 그들을 위해 농약을 치지 않고 화초보다 잡초를 더 소중히 여겼다. 그러자 벌레가 많이 생겨났고, 곧이어 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새들의 똥에는 야생화 씨앗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임은 물론인데, 백지 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온갖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웰빙(Well-being)보다 윌빙(Will-being)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남이섬 입구에 있는 인어공주상도 원래는 숲속을 지키는 여신상이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숲속에 발가벗은 여인상이 있을 이유가 없어서 강물에 던져버린다는 심정으로 강가로 옮겨왓다.

그런데 이 동상이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양에 따라서 모습이 달라지면서 바다를 그리워하는 인어공주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는 아곳을 방문하는 사람에등레 묘한 신비감을 안겨주게 되었다.

▽ 남이섬 인어공주

남이섬 인어공주.jpg

2.4. 문화 contents를 만들자

예술가의 흔적을 소중히
남이섬을 방문한 예술가들의 낙서나 흔적들을 소중히 꾸며 또다른 contents로 발굴하였다.

남들이하면 그냥 낙서이나 예술가가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

남이섬 낙서

겨울연가를 연출한 윤석오 PD의 낙서도 잘 보존해 놓았다.

남이섬 겨울연가 연출한 윤석오PD 낙서

드라마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Contents화하다
겨울연가의 촬영지로서 남이섬은 일대 전환기르 맞이합니다.
외국인 특히 일본 관광객의 증가합니다.

▽ 남이섬 겨울연가 첫키스 장소

남이섬-겨울연가-첫키스장소.jpg

▽ 남이섬 겨울연가 연인상

남이섬-겨울연가 연인상

2.5. 외국인의 날을 만들어 외국인을 끌어 모으다..

일정한 날을 특정국가의 날로 정해 섬 전체를 그 나라의 깃발과 음악과 문화로 채웠다.

그랬더니 대사가 찾아오고 그 나라 교민이 찾아오고 그리고나니 대사관이 후원하는 그 나라 공연이 열리고 점점 볼거리가 풍부해지더라…

이제 남이섬 관광객의 10%는 외국인라고 한다.

▽ 남이섬 외국인페스티벌 공지

남이섬 외국인페스티벌 공지.jpg

2.6. 책나라 축제 – 책속에 빠져보자.

책나라축제를 열어 섬 전체가 책의 향기로 가득차도록 했다.
매년 70여국에서 이 책 축제에 참가한다,…

▽ 남이섬 책나라 축제

남이섬 책나라축제.jpg

▽ 남이섬에 쌓여있는 책들

남이섬-책.jpg

2.7. NGO와의연결 공익과 체험의 기회를 넓히다.

환경연합과 함께 남이섬 환경학교를 만들어 환경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 남이섬 환경학교2006 가을 체험 프로그램.

남이섬 환경학교2006 가을 체험 프로그램.jpg

▽ 남이섬 환경학교

남이섬-환경 학교 정면.jpg

유니세프를 후원하다

▽ 남이섬 유니세프홀

남이섬-유니세프홀.jpg

2.8 그림 그리듯 청소를 하고 낙엽을 태워 운치를 더하다

남이섬의 청소도 운치를 생각합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남이섬의 청소하시는 분은 그 분 나름대로 예술을 만듭니다.

하트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듯이 청소를 합니다.

이 또한 남이섬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지요

남이섬-하트낙엽.jpg

남이섬 6867.jpg

남이섬 6866.jpg

가을이면 낙엽이 지는 남이섬은 아름답다..
그러나 절정의 경치는 얼마가지 못한다. 그리고 남이섬은 가을은 일찍 끝난다.
기대 만땅에 남이섬을 찾은 관광객은 이미 져버리고 황량한 모습을 보기 일쑤다.
그래서 서울과 비슷한 시기에 가을 분위기를 느끼라고 송파구에 요청해 송파구의 은행잎은 남이섬으로 가져와 활용했다.
송파구청은이 은행잎을 처리하는데 2000만원이 드는데 남이섬이 처리해주니 좋고 더우기 송파은행길이아 명명해주니 서로 이익이다.

▽ 남이섬 송파은행길

남이섬-송파은행길.jpg

남이섬 은행잎.jpg

겨울이면 남이섬에 낙엽을 태웁니다..
넉엽을 태우면서 퍼저나가는 연기는 황량하고 보잘것없는 한겨울의 남이섬을 환상과 멋진 운치의 섬으로 변모시킴니다.

남이섬 낙엽을 태우는 강우현사장.jpg

3. 나미나라 방문객은 꾸준히 증가하다

01년 2십7만명에 불과하던 남이섬은 3년이 지난 2004년에는 140만에 이르럿고 2008년에는 180만명에 이를정도로
빠르게 관광객이 증가하였다.

남이섬 방문객추이.jpg

나미나라는 자연·자유를 팝니다.

아래글은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오늘 독립공화국 선포 3주년 축제 여는 강우현 남이섬 사장

향락시설 자리에 나무·꽃 심어…지난해 외국인 관광객만 20만

강우현 남이섬 사장이 낙엽을 태우고 있다. 그는 웃을 때 아이가 된다. 해맑고 천진한 웃음 때문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남이섬 대표인 강우현(56) 사장은 독립 공화국인 ‘나미나라’의 수반도 겸한다. MT 명소였던 유원지 남이섬을 휴양 관광지로 탈바꿈시킨 뒤 3년 전 나미나라 공화국 독립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다음달 1일은 이 나라의 독립기념일이다. 남이섬은 국가(國歌)도 있고 자체 문자도 있다. 여권과 비자·화폐도 공화국 내에서 유통된다. 28일 여는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 준비에 정신 없는 그를, 반나절이나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나눴다.

독립을 선포한 후 무엇이 달라졌나.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 상상 속의 세상을 만들었다. 하나의 금기를 깼다고 생각한다.”

『피터 팬』의 ‘네버랜드’가 연상된다.

“우리에겐 ‘무법천지법’이란 헌법이 있다. 법이 없어도 되는 세상, 자유로운 세상을 구현하겠다는 뜻이다. 아무 것에서도 간섭받지 않는 경지, 이게 자연이다. 우리가 파는 게 바로 이 자연이다.”

자연? 누구나 자연을 판다.

“솔직히 말하자. 한국의 자연환경이 세계적인 관광명소와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생각’을 팔아야 한다. 한국은 무언가 각별하다는 생각, 남이섬에선 무언가 소중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생각, 이런 걸 나는 ‘안심’이라고 부른다. 어디를 갈까 궁리할 때 자연스레 남이섬이 떠오르는 것, 이게 안심관광이다.”

굳이 공화국을 선포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좋은 예가 있다. 한국에서 대만 국기를 게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하고만 수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선 아니다. 독립국이니 전 세계 국기가 휘날리는 건 당연하다. 자기네 국기를 보고 대만 관광객이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아는가.”

남이섬은 국내 여행레저 업계에서 새로운 신화를 썼다.

“대표이사로 취임했던 2001년엔 카바레 같은 향락시설이 즐비했다. 이들을 몰아내고 나무와 꽃을 심었다. 이 과정에서 업자들과 송사도 많이 벌였다. 그 송사는 지난해 모두 끝났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재배치했다. 죽은 나무를 섬 복판에 옮겨다 거꾸로 세웠다. 뿌리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나무 앞에서 사람들은 신기하다며 사진을 찍는다. 가을이면 온갖 종류의 낙엽이 카펫처럼 섬에 깔린다. 이른 봄엔 그 낙엽을 태워 연기를 만든다. 요즘 남이섬은 낙엽이 타는 그윽한 풍경과 냄새를 판다.”(자연상태로 되돌려 놓은 후 남이섬 입장객은 2001년 27만 명이었던 것이 지난해 180만 명을 넘겼다. 이 중에서 20만 명이 외국인이다.)

실패는 없었나.

“한 번에 된 건 하나도 없었다. 잘 안 되면 이렇게 해보고 또 안 되면 저렇게 해봤다. 그렇게 하다 나온 결과를 사람들은 성공이라고 말했다. ‘내 맘대로 다 했더니 네 맘에도 드는구나’ 이런 식이었다.”

남이섬의 성공은 ‘겨울연가’의 덕이 큰 것 아닌가.

“드라마가 방영된 게 2002년이다. 7년이 지난 요즘 일본인은 하루 100명씩 찾아온다. 중요한 건, 그들의 마음에 남이섬이 들어있다는 거다. 올해만 18만 명이 방문했는데 그중 4만 명이 외국인이다. 드라마 촬영지는 한국에 무수하다. 하나 남이섬만 그들의 마음에 들어있다는 게 다르다. 남이섬에 8번이나 들른 일본인도 있다.”

이젠 상상했던 남이섬의 모습을 갖춘 셈인가.

“아직 멀었다. 병 들어 누워있던 남이섬을 이제 막 일으켜 세웠다. 본격적인 사업은 지금부터다.”

또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건가.

“너무 많다. 나무에서 씨를 받아 섬에 심고 있다. 50년 뒤를 내다본 사업이다. 논도 만들 작정이다. 섬에서 생기는 폐수로 벼를 기를 것이다. 나라를 세웠으니 식량을 비축해야 할 것 아닌가? 내 업무는 외교 분야에 집중될 것이다. 4월 일본의 온천도시 도야마(富山)에 제1호 나미나라 대사관을 세운다.”

당신은 CEO인가 예술가인가.

“내 아들의 아버지다. 내가 하는 일은 디자인이고. 나는 지금 남이섬을 디자인하고, 사람들의 상상을 디자인한다.”

강 사장은 작별 인사 대신 “남이섬이 어떤 모습이 되면 좋겠다고 기사를 쓰면 그렇게 만들어 놓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줄 적는다. 앞으로도 세상이 그어놓은 금을 넘어서는 남이섬이면 좋겠다.

손민호 기자

◆강우현=1953년 충북 단양 출생.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디자이너다. 칸 영화제 포스터를 만들었고, 디자인 쪽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그 시절 좌우를 바꿔 글씨를 쓰는 기행으로 유명했다. 2001년 남이섬에 입사한 첫 해 월급이 100원이란 사실이 알려져 또 유명해졌고, 남이섬이 한류 관광의 진원지가 되면서 다시 유명해졌다. 지난해엔 종신직원제를 발표해 화제가 됐다. 종신직원이 되면 80세 퇴임 뒤에도 매달 80만원씩 받는다. 현재 직원 180여 명 중 종신직원은 넷.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kwooz.net)엔 다음의 글귀가 있다. ‘나는 하찮은 것이 좋다. 시시한 것은 더욱 좋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 흘러가는 바람에 뒹구는 낙엽 조각 같은 것. … 시시함과 하찮음. 생각나라 입장권이다.’

오후에 잠시 출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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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잠시 출근해서(3층으로 이사, 최차장과 같은공간이네요) 못본 싱글 메일보고 답장보내고…했어요.
가족과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작년 하반기에 최차장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번 좋은 일이 있으려고,(그 기쁨을 두배로 느끼라고)  그 때 
그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후야 어찌되었든간에 현명한 결정이었지요?
저도 그 결정에 일조했지요? ^^

다시한번 승진을 축하합니다.
한동안 술자리로 고생하겠네요… 몸관리 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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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고향의 소리 – 워낭소리를 보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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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토) 벼르고 별러서 워낭소리를 보고 왔습니다.
우리 동네인 동백 롯데시네마에서는 하지 않아서 조금 멀리있는 죽전 CGV까지 다녀왔습니다.
죽전 CGV는 죽전신세계백화점 8층에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미로를 찾듯 찾아가야하더군요.

은우나 은결이는 너무 어려서 이해하기 힘들것 같아 다른 영화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9시 50분 표가 있어서 그걸 끊고 들어갓습니다. 
아쉽게도 벌써 시작하고 있어서 비어있는 앞줄에 앉았습니다.  우리 자리에는 누군가 앉아있더군요..
좌석은 아침 무렵인데도 90%는 차 있더군요.. 놀라웠습니다.
염려하던대로 우리 은결군은 어두운곳으로 오니 싫다고합니다.  그래서 애엄마가 데리고 나갔습니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복도에서 숨박꼭질했다고 합니다..
너무 앞이어서 화면이 올려다 보여서  보기에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은결이와 애엄마가 나가서 걱정도 되고 은우에게 나름 의무감을 갖고 이것 저것 설명해 주다보니 영화에 깊이 집중하지믄 못햇습니다.. 아무튼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보았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저에게 영화는 제 어릴적 상황을 재연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느낀것들 중심으로 풀어 보렵니다.

시골집에서는 일소 한마리를 키웠습니다.  날마다 이 소에게  먹이기 위해서 꼴을 베고 겨울이면 쇠죽을 끊이고….
그 당시에는 날마다해야하는 쇠죽 끊이는게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
소죽을 끊이는게 한시간정도 걸리는데 가마솥에 물을 길어다 붓고, 불을 지펴서 물이 끊으면 짚을 잘게 썰어서 넣고 이를 쌀겨와 섞은 다음
솥뚜껑을 닫고 4~50분정도 불을 때면 끊지요.. 그러면 적당량을 퍼서 소에게 주면 끝나는데.. 날마다 반복되는 이 일이 좋을 리는 없지요.
아쉽게도 인터넷에 돌아다는 사진에는 소죽을 끊이는 장면 컷이 없습니다.
대신 꼴을 베어오시는 할아버지와 소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영화에서는 할아버지께서 소를 위해서 꼴을 베고 챙겨주는 장면이 참 많이 나오죠..
어낭소리 꼬릉 베어어는 할아버지.jpg

소가 먹는 것이기에 농약을 칠 수없다는 할아버지..
문득 우리가 먹는 쌀에는 농약 치기를 주져하셨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물론 분명 누군가는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삶의 선택에서 당신의 자식들을 위해서 일부만이라도 수확량을 포기하고 농약을 치지 않으셨던 당신에게  어떻게 뭐라하겠습니가?

영화를 즐겁게 볼수 있게 해준 할머니의 넋두리는 우리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생각케 합니다.
“내 평생…영감 잘못 만나서…아이고 내 팔자야…” 하는 할머니 넋두리와 잔소리는 자주 반복되는데 그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어느 영화평을 보니 매우 불편하다고 썼던데 별 무리없이 영화를 보았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16살엔가  80리길을 꽃가마타고 시집와서 여지것 고생한다는 할머니의 넋두리는 제 마을을 후비기에 충분합니다.
지금도 강촌에서 고생하는 우리 어머니…. 그리고 거동도 불편하신 외할머니..


워낭소리 할머니.jpg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사람만이 가족의 자격이 될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할아보지와 소는 가족 그 이상입니다.
워낭소리 소를 살펴주는 할아버지.jpg 
워낭소리 그윽하게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jpg

제가어렸을적에 키웠던 소도 생각이 납니다. .. 그 소도 무척이나 오래 키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잘생긴 소였는데 
정말 정말 집이 어려워 팔았는데 팔려가는날 외할머니가 동구밖까지 배웅을 나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소의 눈망울이 생각날듯도 합니다.
외할머니가 죄받을거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 …

영화에서 할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더 이상 농사를 지울 수 없고 소를 먹일 수 없어서 우시장에 소를 팔러갑니다.
잡으면 60만원벆에 안나온다.  120만원에 팔아라는 상인들의 말에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500만원이하에는 안판다고 하시죠..
당신은 소를 팔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당신에게 친구같이 이 소가 그렇게 싸구려, 토물 취급받는 것을 원하지않았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소를 팔러 봉화읍에 갑니다.. 차가 씽씽달리는 차도에 유유히 걷는 소달구지는 얼마나 멋있게 보였던지..
소달구지는 내 고향에서는 구르마라고 불렀습니다.. ㅎㅎㅎ
 
워낭소리 도심을 거니는.jpg




할아버지도 힘들지만 소도 힘이 듭니다.
할아버지는 소와 짐을 나누었습니다.  짐을 나누고 그리고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펄벅여사가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국을 방문해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자신도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워낭소리 소와할아버지는 짐을 나누었다.jpg


농사짓는 농부의 숙명일까요?
할아버지는 다리를 절면서도 소에 의지해 밭을 갑니다.
스틸컷이 없어서 그렇지 기어다니다시피하면서 밭에서 일을 하는 장면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님에게 이땅의 농부들에게 넘  감사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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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죽고 밭 한가운데 소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소의 무덤이 보이는 곳에서 앉아계신 할아버진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요?
소는 아마도 천국으로 갔을 것입니다..


워낭소리 소의 무덤이 보이는.jpg 
워낭소리 워낭만 남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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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아이팟(ipod) 첫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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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아이팟(iPod)을 study하면서 아이팟(iPod)광고를 살펴봅니다.

애플 아이팟(iPod)관련 케이스 스터디는 새로운 신화를 쓰다, Apple 아이팟(iPod) 사례를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1. 아이팟(iPod) 첫 광고

아래는 아이팟(iPod) 첫광고라고 인터넷에서 이야기되는 광고입니다.

최초의 아이팟 1세대가 출시되고나서 아이팟을 알리는 광고로 아이팟에서 중시했던 컴퓨터와 휴대용 음악재생기인 아이팟간의 연동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아이튠즈라는 애플의 온라인 음악 스토어 활용을 설명하고 잇습니다.
아이튠즈는 애플이 디지털 허브 전략하에 2001년 출시한 온라인 음악스토어로 초기에는 CD를 립핑하고 음악을 관리하고 원하는 음악을 CD로 굽는 전형적인 음악 플레이어 소프트웨어였습니만 iPod와 연동되면서 점차 온라인 컨텐츠가 증가하고 애플을의 중요한 성장 동력이 되었습니다.

▽ 아이팟 첫 광고 동영상

MP3 player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아이팟이라는 이미지보다는 MP3플레이어의 특성을 잘 알리려는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아이팟(iPod)은 곧 MP3플레이어다는 iPod = MP3 Player 공식을 내세운 듯해 보이구요.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는 광고에 등장하는 아저씨(?)가 애플 노트북을 놓고, 마음에 드는 음악을 고르는 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 때 주인공은 “아이팟”을 노트북에 연결하고 맘에 드는 음악을 한 곡 골라 아이팟에 전송합니다. 그 후에 아이팟을 노트북에서 분리해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전송했던 음악을 재생시킵니다.

음악의 흥에 신이 난 아저씨는 집안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면서 막춤(ㅋㅋ) 댄스를 춥니다. 정말 재밌는 광고입니다.
“아이팟”, “MP3 플레이어”의 장점을 모두 잘 드러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MP3의 장점으로 당시 CD플레이어나 테이프 워크맨보다 크기가 작은데다가 무엇보다 Disc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죠. 즉, 음악콘텐츠가 담긴 테이프나 CD를 일일히 전부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이때 부터 아이팟 마케팅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말 중에 “1000곡이나 담을 수 있다는 점”. 투박한 오디오를 사용하거나 번거롭게 한 장소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컴퓨터 (노트북)에서 탈피해 언제 어디서나 휴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팟의 매력적인 요소를 잘 반영한 광고인 듯 싶군요.

2. 아이팟(iPod)의 다른 광고들

아이팟(iPod)의 다른 흥겨운 광고들을 모아봅니다. 음악과 관련된 광고이다보니 흥에 겨운 광고가 많네요.

▽ 2007년, Mary J. Blige – iPod + iTunes Ad

▽ iPod Commercial – Shake It! Metro Station

▽ iPod AD: Move It

▽ Feist – 1234 (New Apple iPod Nano Commercial)

▽ iPod Touch Ad – Nick Haley

Apple을 부활시킨 iMac(아이맥) 성공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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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을 부활시켰다고까지 평가 받는 iMac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를 해보자.

이를 위해서는 iMac이 등장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는게 필수적이다.

1. 스티브 잡스가 다시 구원투수로 등장하다.

Apple이 IBM에게 개인용 PC시장을 빼앗기고 대신 GUI등의 특성을 살려 디자인, 인쇄 출판등의 전문가 영역에서 이익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MS가 Windows95를 내놓고 Apple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GUI까지 따라오자 Apple의 설자리는 절대적으로 줄어들고 회사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Apple 이사회는 구원투수로 스티브 잡스를 임시 CEO로 임명한다.

즉 잘 나가던 Apple이 위기에 빠지는 이유는 과거의 성공에 도취되어 나머지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경영진을 교체한다. 쫒겨나듯이 물러났던 스티브잡스가 다시 복귀한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2. 복귀한 스티브 잡스가 실패의 원인을 분석헤보니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 잡스가 그동안 매킨토시 실패의 원인을 아래와 같이 몇가지로 분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솔류션을 제안한다.

2.1 쓸데없는 곳에 너무도 많은 지출을 하고 있다.

매킨토시 성공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던 엔지니어들은 상업성있는 제품 개발보다는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그 자체에 빠져 있었다.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성과없이 끝나버리는 Project가 허다했다. CPU개발, 5000천만달러를 들인 차세대 컴퓨터 아쿠아리우스 개발도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동안 경연진은 이런 좀비 project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극렬한 저항에 부딕쳐 분열만 심해지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부임하자마자 150개에 달하는 Project를 단 10개로 줄였다. 스티브잡스만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2.2.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Apple은 마진율 55%율을 끝까지 고집해 컴퓨터 평균가격을 2500$선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미 시장은 평균 1000$이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장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저가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제품을 준비하게 된다

3. Apple을 위기에서 구한 iMac의 탄생

스티브 잡스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저가 컴퓨터 시장을 대응하기 위해 신제품을 만들되 Apple만의 차별화를 찾고자 하였다

3.1. 쉽게 컴퓨터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당시 시대 상황은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있어서 인터넷을 배우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 컴퓨터를 무시했던 사람들도 컴퓨터를 구매하고 배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컴퓨터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 쉽게 컴퓨터를 배우고 사용하고 싶은 Needs

1) 이런 사람을 위해 사용자 편의성을 강화했다. 즉 본체와 모니터를 일체형으로 만든 아이맥을 출시한다.
이 컴퓨터는 구입해서 바로 전선만 꽂으면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2)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서 인터넷등의 network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iMac의 i는 internet을 뜻할 정도로 인터넷 세대에 비교적 affordable price에 Mac을 가질 수 있도록 price positioning 했다고 한다.

3) Apple이 자랑하는 사용자 중심의 GUI가 보다 쉽게 컴퓨터에 접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MS가 Windows series로 GUI개념을 차용해 쫒아오고 있었지만 Apple 수준의 GUI는 Windows XP에 이르러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으니 Apple의 UI는 엄청나게 진보된 개념이라 할수 있다.

3.2. 디자인에 가치를 부여하다.

Apple은 친숙하게 여겨지는 디자인을 매우 중요시 했다.
그래서 iMac은 기존의 컴퓨터처럼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거실과 부엌 인테리어에도 어울리는 유려한 디자인을 강조하는 Apple 최고의 장점을 잘 살린 제품으로 태어났다.
내부가 보이는 과감한 nude(누드)스타일에 빨강, 주황, 보라 등의 화려한 색상을 입혀 독찬적이고 신선한 디자인을 완성했다. 화려한 아이맥에 어울리는 거실가구나 침실 가국등도 덩달아 판매될 정도이다.

iMac color.jpg

 아이맥 전면부

아이맥 디자인의 전체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정면보다는 오히려 옆모습이나 위에서 보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정면의 모습을 보면 눈에 띄는 디자인이라기 보다는 보통의 평범한 디자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브라운관 주변의 세로 줄무늬는 갈끔한 느낌을 가져다 주고 투명하면서도 밝은 폴라아카보네 케이스는 산뜻한 느낌을 준다.


 아이맥 Top view

아이맥 디자인의 전체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정면보다는 오히려 옆모습이나 위에서 보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정면의 모습을 보면 눈에 띄는 디자인이라기 보다는 보통의 평범한 디자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브라운관 주변의 세로 줄무늬는 갈끔한 느낌을 가져다 주고 투명하면서도 밝은 폴라아카보네 케이스는 산뜻한 느낌을 준다.


 아이맥 Top view

위에서 아이맥을 보면 본디블루 컬러와 흰색이 절묘하게 조화됨을 알 수 있다..

선명하게 보이는 단색의 애플 로고는 파워북 G3 이후로 대부분의 애플 제품에서 사용되는 로고인데 과거 사용하던 6색 컬러로고 보다 애플 마크의 상징성이 더 부각되는 듯 느낌.

맨 위에 보이는 것은 아이맥을 이동시키는 손잡이다.

이는 기능성과 디자인이 결합된 요소인데 주의해야 할점은 아이맥을 이동할 때는 손잡이 부분 외에 본체 밑 부분을 함께 받쳐 주어야 안전한 이동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이맥 Rear view

아이맥의 뒷부분을 보면 상당히 육감적으로 느껴진다.

손잡이 윗 부분 조밀한 홈들의 줄들은 본체의 환기 부분을 처리함과 동시에 디자인상의 부드러움을 함께 고려하였다.

아이맥의 윗부분과 마찬가지로 뒷 부분도 역시 본드블루와 흰색 투톤 컬러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아이맥에 청색이 사용된 것은 청색이 남녀노소를 통털어 가장 선호하는 색이며 모던하고 심플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이맥 B타입 이후 C타입 부터는 오랜지색, 라임색, 블루베리색, 딸기색, 보라색 등 다섯색이 출시되었는데 다른 어떤 색보다 블루베리색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iMac side.jpg

마지막으로 아이맥의 옆부분을 살펴보자.
옆부분을 살펴보면 아이맥이 투명 컨셉을 채용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본디블루의 깊은 맛과 투명소재가 잘 어울리는데 이러한 nude style등은 다른 업체에서 많이 따라하게되는데 일부 PC케이스의 경우에는 미묘한 색깔 선택이 잘못으로 기존 베이지색 케이스보다 오히려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3.3. 인터넷을 적극활용한 마케팅 접근

시대 흐름에 뒤떨어졌다고 평가 받았던 Apple은 아이맥을 발매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사전 예약주문을 받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1998년 8월 애플은 15만 대의 아이맥 예매를 발표한다. 이는 컴퓨터 역사상 가장 빨리 팔려나간콤퓨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이맥은 1년간 200만대가 팔려서 apple은 10억$ 적자에서 4억$ 흑자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아이맥의 성공은 Apple의 몰락을 예측했던 세상에 Apple의 건재함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Apple의 행보에 관심을 갖게했으며

특히 내부적으로 만성적으로 apple을 괴롭혀왔던 패배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성공에 따라 애플의 주가는 셰어당 40$를 넘어섰으며, 지난 3년 이래 제일 고가였다고 한다.

새로운 신화를 쓰다, Apple 아이팟(iPod)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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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유명한 Apple iPod 사례를 알아보려 합니다.
며칠전부터 검토하고 있는데 마음대로 진도가 안나갑니다

iMac을 토대로 회생의 발판을 마련한 애플은 장기적은 관점에서 성장의 전략을 고민합니다. 시장에는 이미 자본력이 강하고 Red ocean분야에서 절대적 강점이 있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건재하고 있으므로 MS와의 정면대결은 승산이 없었습니다. MS는 기존 시장에 진출해 무엇가를 더해서(기능이든 결합디든) 기존 시장을 장악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애플의 전략방향은 MS가 없는 시장이거나 MS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틈새 시장이어야 했습니다.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하기보다는 협력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죠. 주적을 마이크로소프트대신 델로 설정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는 대신 1.5억달러를 투자받는 것이 그 첫걸음이었죠. 물론 이 정책은 처음에는 야유를 받았습니다. 애플 매니아에게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애플은 새로운 전략을 기존 컴퓨터 메이커가 아닌 가전메이커로 전환을 시도하는 데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가전메이커의 성공모델로 아이러니하게 소니를 그들의 성공 모델로 보았습니다.

소니처럼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애플의 목표였는데 마침 애플이 관심을 가진분야도 소니의 성공을 이끌었던 휴대용 음악기기 워크맨과 같은 Mp3 player였다고 합니다..

소니를 일약 세계적인 가전회사로 올려놓은 제품이 워크맨이었고 이 워그맨은 아날로그였습니다. 애플이 지향하는 바는 디지탈이어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탈로 넘어가는 시기에 MP3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 초기 소니 워크맨 일본 광고

Sony Walkman Japan Advert 소니 워크맨 일본 광고

▽ 최초 P3 Player인 mpman F10 새한 엠피맨 F10,
개발은 디지털캐스트에서 판매는 새한이 담당했다.
메모리는 16, 32, 64MB 3종, 가격은 24만6천원, 33만7천원, 51만9천원

그 당시 이미 시장에는 MP3메이커가 있었지만 두각을 나타내는 메이커는 없었죠. 이 당시 한국 메이커도 나름 전도 유망했었는데 애플이 나오자 한방에 맛이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초 MP3 mpman

아무튼 애플은 자신만의 knowhow를 적용해 새로운 MP3 player 신제품을 만드는데 몰두하였습니다.

1. 단순한 음악재생기가 아니라 더 작아진 컴퓨터 연장선에서 사고

애플은 이미 아이튠즈라는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Mp3 player를 개발했기 때문에 컴퓨터의 아이튠즈와 연동되는 아이팟을 개발한 것이다.
따라고 아이팟의 최대 장점은 컴퓨터와 연동되는 Mp3 player라는 점이 었다.
즉 “Plug, Unplug and play.” 구호에서 드러나듯 쉽게 컴퓨터와 연동되고 여기에 음악을 다운받아 즐긴 수있다.

이러한 연동은 전(前)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장 네이썬 머볼드 (Nathan Myhrvold) 가 애플 아이튠스 서비스에 대해 다은 업체에게는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오는 concept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음악, 비디오 등 멀티미디어 컨텐츠의 이용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를 모두 합친 형태로 발전하게 되면, 전통적 의미의 전자제품 회사들은 거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온 것만큼이나 큰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Once audio and visual experiences become a combined hardware-software-network thing, the consumer electronics guys are fish our of water.”)

 아이튠스 홈페이지

2. 휴대성과 사용성을 고려한 Product concept

스티브잡스가 ipod launching presentation에서 밝힌 3가지 concept은 아래와 같다.

스티브잡스

1) Ultra portable

2) Apple’s legendary esay of use

3) Auto-sync

아이팟 설명

휴대용 MP3 player를 지향했으므로 그 어느 제품보다도 휴대에 용이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이는 경량화/소형화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화하였다. 이러한 Ultra portable은 나이키와 공동마케팅을 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편리한 사용성은 애플이 오랜동안 중시한 특성이다. 매킨토시, iMac 등 애플의 제품은 누구나 쉽게 사용가능토록 UI를 구성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고 아이팟에는 이러한 전통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또한 컴퓨터와 연동이 중요한 요소이므로 아이팟과 컴퓨터간 자동 싱크는 당연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iPod 1세대 특징

  • 하드 드라이브형 뮤직플레이어
  • 초소형, 초박형
  • 5GB의 내장형 하드드라이브 용량
    -> 1,000개의 노래 저장 가능

3. Design

아이팟 출시 presentation에서 스티브 잡스는 “Apple design – more than music”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이팟

아이팟의 디자인 핵심은 복잡함을 제거하고 제대한 단순화시킨 minimalism이라고 정리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아이팟 5주년을 맞이해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도 스티브 잡스는 단순화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스티브레비가 “아이팟을 진행하면서 얻은 디자인에 대한 교훈이 있다면? 이란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죠

“Look at the design of a lot of consumer products—they are really complicated surfaces.
We tried make something much more holistic and simple.
When you first start off trying to solve a problem, the first solutions you come up with are very complex, and most people stop there. But if you keep going, and live with the problem and peel more layers of the onion off, you can oftentimes arrive at some very elegant and simple solutions. Most people just do not put in the time or energy to get there.
But if you keep going, and live with the problem and peel more layers of the onion off, you can oftentimes arrive at some very elegant and simple solutions. Most people just don’t put in the time or energy to get there. We believe that customers are smart, and want objects which are well thought through.

“주변의 가전제품들을 한번 살펴보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표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반면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이 녹아 들어간 단순한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첫 번째 해결안은 매우 복잡하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고 만다. 하지만 계속 파고들면서 문제와 부대끼고, 문제를 둘러 싸고 있는 껍데기들을 차츰 걷어내면, 마침내 매우 우아하면서 단순한 해결책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소하고, 관리해 나가고 또 문제의 양파 껍질을 더 벗겨내려고 한다면 종종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해결책에 이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한 제품을 이해하고 조작하기 위해 시간이나 에너지를 들이지 않습니다. 소비자들은 현명하지요. 그들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제품만을 삽니다.”

스트브잡스의 디자인 철학은 Design is not just what it looks like and feels like. Design is how it works.이라는 말에 잘 드러나있습니다.

4. 유통 구조의 차별화

비즈니스위크가 애플을 2007년에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할 때 높이 평가한 항목은 애플의 강점인 운용체계나 아이폰 같은 신제품이 아니라 ‘애플스토어’라는 새로운 형태의 판매점이었다. 애플스토어는 소니나 삼성의 플래그십 매장이 단지 브랜드 이미지 제고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과 달리 실제로 좋은 수익을 올리고 있고 계속 확장되는 추세다.

일반적인 전자제품 매장을 보면 제품들이 종류에 따라 배열돼 있다. 컴퓨터는 컴퓨터끼리, 디지털 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끼리, MP3플레이어는 MP3플레이어끼리 전시돼 있다. 어떤 제품이 다른 제품들과 함께 쓰일 때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반면 애플스토어에는 제품들이 고객의 용도에 따라 모여 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코너, 그래픽 디자인 사용자를 위한 코너, 음악을 듣는 사람을 위한 코너 등이다. 사진을 위한 코너에는 사진기·PC·사진 편집 및 관리 SW를 모아 놓았다. 고객은 각자의 흥미에 따라 여러 제품을 함께 사용해 봄으로써 제품 포장에 써 있는 사양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제품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재 바(genius bar)’라는 명칭의 전문가가 상담하는 코너도 마련해 경험의 질을 높이고 있다. 이런 혁신적 점포 구조는 애플이 바라는 대로 그 제품의 가치를 고객과 소통하는 데 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다. 유통 채널이 고유의 마케팅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과 수익을 창출하는 기능을 모두 담당함으로써 마케팅과 판매가 분리되지 않고 판매점이 광고마케팅 기능을 하는 시너지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런 판매점을 고안하기 위해 애플은 모의 점포를 짓고 실험을 수없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 부문의 혁신도 고유한 벡터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5. Communication

애플의 가장 큰 장점은 자사 제품의 차별성을 고객들이 잘 이해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애플은 어떤 신제품이 나오든 그 광고가 어떻든 ‘아! 과연 애플답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것은 경영학에서 흔히 말하는 총체적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기업의 비전 제시, 제품 기획, 기술 개발, 판매, 고객과의 가치 커뮤니케이션 등 사업의 전 과정에서 한 방향으로 잘 정렬된 통합적 전략이 내재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회사 규모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브랜드 가치로 드러나고 있다.

아이팟 광고 iPod ad

애플 아이팟 광고 Apple iPod ad ipod france

6. iPod Sales trend

년도는 애플의 회계년도를 기준으로 했습니다. 오해가 많을듯해서요 (애플 회계년도는 9월 30일에 끝납니다)

즉 ‘08년 자료는 ‘07년 10월 1일부터 ‘08년 9월 30일까지의 자료입니다.
자료는 애플 Annual report를 근거로 했습니다.

아이팟 판매량 추이

7. iPod History

위키디피아 내용을 토대로 재정리했습니다.

애플 아이팟 역사 Apple IPOD History

미국 역사상 최고의 광고라는 1984 Apple’s Macintosh Commer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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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광주 출장을 다녀오면서 버스에서 “What’s NEXT 애플 & 닌텐도”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이르기를 애플의 맥킨토시를 출시할 때 Launching 광고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광고로 선정되었다고 해서 집에 오자마자 찾아 보았다.. 이 광고는 슈퍼볼의 하프타임 때 단 한번 방영되었다고 한다.

애플2의 성공이후
IBM은 더 이상이 늦으면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여 IBM은 시장 진입을 결심하는데
IBM내부에서는 반대가 심해 신제품을 개발항 시간을 1년밖에 주지않았다.  그리하여 Apple처럼 폐쇄적 platform을 구성할 여유가 없었던 IBM은  호환성을 가진 표준 규격의 컴퓨터라는 개념으로 들고 시장에 이미있는 부품과 S/W등으로 사용하는 컴푸터를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제품을 만들 수 있고 단가도 떨어뜨릴 수 있어서
빠른 속도로 시장을  평정할 수 있었다.

 welcome-ibm-seriously.jpg

Apple은 처음에는 IBM 개인용 컴퓨터에 대해서 새로운 기술이 하나도 없다고 비난했고 광고를 통해 IBM을 환영한다고 하기도 했다.
IBM의 출시에도 불구하고 애플2의 판매는 줄지 않았다.  그러나 IBM은 인내를 가지고 마케팅에 거금을 투여하자 반응이 조금식 나타나기 시작했고 IBM의 표준을 지킨 여러 회사들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달려들자 Apple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Apple은 새로운 신상품을 출시하기 위해 서둘렀고 IBM보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IBM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고성능 제품으로 positioning하기위해 완성되지도 않은 제품을 출시하는 실수를 하고 만다.
즉 긴급히 출시한 애플3는 엄청난 버그와 S/W적, H/W적 문제를 야기해 실패하고 말았다.

절치부심한 Apple이 텔레비젼이나 세탁기처럼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출발해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를 발전시키고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디자인의 맥킨토시를 출시한다.
맥킨토시의 출시 광고는 조지 오웬의 “1984”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도끼를 든 여인이 경비병의 추격을 뒤로하고 ㄱ도끼를 던져 스크린을 부셔버리고 소설속의 1984년과 지금의 1984년이 왜 다른지를 이야기하는 스토리의 광고로
IBM이라는 공룡 또는 빅브라더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IBM의 독점을 깨뜨리겠다는 Apple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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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추기경님 당신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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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TV를 보다가 자막에 선종했다는 것을 얼핏 보았다.
아무런 정보가 없었음에도 김수환추기경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 후에 뉴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카토릭신자도아니고 그 분과 연을 맺은 적도 없지만  뉴스로, 신문으로 접하는 그분의 인상이 너무 좋았고 
나름 열혈 전사였고 나름 한족에 경도되기 싶상이었던 대학시절조차  균형잡힌  그분의 말씀은 공감을 자아내었었다.
뜻한 바를 한평생 걸어오신 그 분에게 이름없는 한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애도를 표한다…
“김수환추기경님 진심으로 당신을 추모합니다.”

인터넷에 나온 사진 중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진과 시를 통해 추모의 정을 남기고자 한다..


김수환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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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 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 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 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 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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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 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으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