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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농장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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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주말 농장을 분양한다고해서 낼름 신청했습니다.
원래는 4월 세째주에 모여 첫 씨앗을 뿌리기로 했는데 비가 와서 연기를 했습니다.
아마도 5월 첫째 휴일에는 다시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은우에게도 이야기했더니 무척 좋아합니다.
아무튼 기대가 됩니다.
집사람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면서 반기면서도 반기지 않습니다..

고마마를 좋아하는데 고구마를 심자고 합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장마철에 고구마 순을 심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 비가 그치면 마르기전에 심어야한다고 엄청 서둘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나 그 시저로는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즐거운 추억이기보다는 힘든 추억입니다.


주말 농장을 기다리며 1

 

주말 농장을 기다리며 2 

전설적인 야구선수 요기베라 명언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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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ain't over till it's over

It ain't over till it's over
멋진 말입니다.

이 글은 회사 인트라넷에 올라온 글입니다.

전설적인 야구선수 요기베라 명언 It aint over till its over.jpg

집에 와서 요기 베라에 대해 찾아보니 관련 기사가 많이 있더라구요.
대단한 선수였다고하네요.

[레전드 스토리] '10개의 우승반지' 요기 베라

요기베라1.jpg

요기 베라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배리 본즈(762) 새미 소사(609) 켄 그리피 주니어(593) 라파엘 팔메이로(569) 테드 윌리엄스(521) 알렉스 로드리게스(518) 어니 뱅크스(512). 4084개의 홈런을 날린 이들 7명에게는 단 한 개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도 없다. 하지만 여기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끼울 수 있는 선수가 있다. 통산 358홈런의 요기 베라다.

베라가 풀타임으로 뛴 17년간(1947~1963) 뉴욕 양키스는 14번 월드시리즈에 올라 10번 우승했다(베이브 루스 15년간 4번, 루 게릭 14년간 6번, 조 디마지오 13년간 9번, 미키 맨틀 18년간 7번).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는 베라가 안방을 지킨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지금 남아있는 베라의 이미지는 '요기즘(Yogiism)'으로 불리는 그의 화려한 언변이다. '피자를 어떻게 잘라드릴까요'라는 점원의 물음에 '8개는 배부르니 4개로 해주시오'라는 종류의 유머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 It's Over)'와 같은 잠언은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말들이었다.

실제로 베라는 엄청난 수다쟁이었다. 마스크를 쓰고는 상대 타자와, 1루에 나가서는 상대팀 1루수와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양키스는 베라가 1루에 있을 때 건 히트앤드런은 신기할 정도로 무조건 실패했다. 사인을 받은 베라의 입이 얼어붙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베라'는 작전이 걸렸다는 신호였다. 이를 알게 된 후 케이시 스텐겔 감독은 베라가 있을 때는 작전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베라는 화려한 언변에 앞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였다. 그가 포수로서 기록한 306홈런은 마이크 피아자(396) 칼튼 피스크(351) 자니 벤치(326) 다음이다. 벤치와 피스크, 이반 로드리게스(디트로이트)의 공격력 역시 일품이지만 통산 출루율과 장타율에서 모두 베라에 뒤진다.

[주요 명포수들의 통산 성적]
베라 : .285 .348 .482 / 2150안타 358홈런 1430타점(반지 10개)
벤치 : .267 .342 .476 / 2048안타 389홈런 1376타점(반지 2개, GG 10개)
피스크 : .269 .341 .457 / 2356안타 376홈런 1386타점(GG 1개)
피아자 : .308 .377 .545 / 2127안타 427홈런 1335타점
퍼지 : .303 .340 .479 / 2495안타 288홈런 1182타점(반지 1개, GG 13개)

1949년부터 1958년까지 10년간, 베라는 한 번도 20홈런 80타점 장타율 .470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포수 중에서는 베라를 제외하면 오직 피아자만 해낸 일이다. 11년 연속 80타점 역시 포수 역대 최고기록이다(2위 피아자 10년). 베라는 1949년부터 1955년까지 7년 연속 팀내 타점 1위를 지켰는데, 이는 디마지오의 마지막 3시즌, 맨틀의 첫 4시즌과 겹친다.

베라는 MVP 7회 수상의 본즈를 제외한 8명의 3회 수상자 중 한 명이다(로이 캄파넬라, 디마지오, 지미 팍스, 맨틀, 스탠 뮤지얼, 알렉스 로드리게스, 마이크 슈미트). 하지만 1950년부터 1956년까지 7년 연속으로 4위 이내에 든 것은 베라가 유일하다(푸홀스는 지난해 9위에 그침으로써 타이기록에 실패했다). MVP 투표에서 15년 연속 표를 받은 것도 본즈와 함께 역대 공동 2위 기록이다(1위 행크 애런 19년 연속).

"그 어떤 공도 때릴 수 있다"

좌타자였던 베라는 선구안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배트컨트롤 능력이 있었다. 조 매드윅,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배드볼히터로 꼽히는 베라는, 발목 높이의 공을 골프스윙으로 넘겼으며, 바깥쪽으로 크게 빠지는 공은 툭 건드려 안타를 만들어냈다. 얼굴 높이의 공을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로 만든 적도 있었다. 베라에 비하면 지금의 블라디미르 게레로(LA 에인절스)는 양호한 편이라고.

베라의 배트컨트롤을 증명해주는 또 한 가지는 삼진 숫자다. 베라가 메이저리그에서 19년을 뛰며 기록한 통산 414개의 삼진은 애덤 던(신시내티)의 2년치에 해당된다. 삼진보다 홈런이 많았던 시즌이 5번이었으며, 13년 연속으로 볼넷보다 적은 삼진을 기록했다. 베라 이후 7번 이상의 '400타수 이상 25삼진 이하'의 시즌을 만들어낸 선수는 토니 그윈이 유일하다. 1950년에는 믿을 수 없는 597타수 12삼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베라는 필요한 순간 어김없이 한 방을 날려주는 당대 최고의 클러치 히터였다. "마지막 3회 동안 가장 무서운 타자는 베라"라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폴 리차드 감독의 주장은 기록이 증명해주고 있다. Retrosheet가 추적이 가능한 1950년부터 1956년까지 타석의 79%를 분석한 결과, 베라는 주자가 없을 때 .258, 주자가 있을 때 .318, 득점권에서 .314, Close & Late에서 .327의 타율을 기록했다.

베라는 포수로서도 최고였다. 또 다른 전설적인 양키스 포수 빌 디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은 덕분에 기본기가 탄탄했다. 수비율 1.000 시즌을 만들어낸 역대 4명의 포수 중 한 명이며, 당시 최고기록이었던 148경기 연속 무실책을 기록하기도 했다(현 기록은 마이크 매시니 252경기). 리그에서 가장 많은 더블플레이를 만들어낸 것도 6번이나 됐다. 체력도 뛰어나 리그 최다 출장을 8차례 기록했으며, 1962년에는 37세의 나이로 22이닝 연장전을 완주하기도 했다. 유일한 약점은 그리 강하지 않은 어깨였다.

하지만 '포수 베라'가 진정으로 빛난 부분은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부분이었다. 베라는 특히 투수 리드와 투수를 다루는 능력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투수들의 심리상태를 모두 꿰뚫고 있었다. 투수들은 마운드에 올라온 베라의 한 마디에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1956년 돈 라슨의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도 베라의 노련한 리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력 후반 베라는 좌익수로 자주 기용됐는데, 좌익수 수비 역시 뛰어났다. 펜스 뒤 관중들과 수다를 떠는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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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티 포드와 함께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브랜치 리키가 준 좌절

베라의 본명은 로렌스 피터 베라다. '요기(Yogi)'라는 이름은 어린 시절 한 친구가 요가수행자 같다고 해서 붙여준 것이다. 베라는 1925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이탈리아 이주민 아들로 태어났다. 벽돌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베라도 14살 때 학교를 관두고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베라는 눈에 띄는 실력을 드러냈다.

1942년 베라는 동네 친구 조 가라지올라(전 애리조나 단장 조 가라지올라 주니어의 아버지)와 함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세인트루이스 입단은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가라지올라에게 500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한 브랜치 리키 단장은 가라지올라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베라에게는 250달러를 제시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베라는 이를 거부했다. 리키의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가라지올라는 통산 .257 42홈런 255타점으로 은퇴).

리키가 베라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한 것은 키 172cm의 작은 체구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리키 역시 선수 시절에는 키 175cm의 작은 포수였다는 것. 리키의 포수 실력은 마이너리그에서 한 경기 13개의 도루를 허용했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베라의 모습이 자신의 선수 시절과 겹쳐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 당시는 리키가 이미 브루클린 다저스로 옮기기로 마음을 굳혔을 때로, 베라를 세인트루이스가 아닌 다저스에 입단시키기 위해 일부러 낮은 계약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저스로 옮기기 전에 양키스가 나타나 500달러를 제시함으로써 리키는 남 좋은 일만 시켜줬다. 그리고 베라는 덕분에 이를 더 악물었다.

루키리그 팀인 노포크로 보내진 베라는 프로 첫 타석에서 만루홈런을 터뜨리는 등 첫 2경기에서 12안타 23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944년에는 해군에 입대, 2차대전에 참전해야 했다. 대공포 사수였던 그는 이탈리아-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D-데이'에 참전한 메이저리거는 베라가 유일하다.

베라를 처음 눈여겨 본 사람은 뉴욕 자이언츠 감독인 멜 오트였다. 스프링캠프에서 베라의 범상치 않은 모습을 확인한 오트는 양키스 래리 맥파일 단장에게 찾아가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조그만 포수가 하나 있던데 우리에게 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맥파일은 베라가 누군지 몰랐지만 일단 거절하고 봤다. 이렇게 베라는 카디널스도, 다저스도, 자이언츠도 아닌 양키스의 선수가 됐다.

역시 베라의 가능성을 직감한 조 매카시 감독은 당시 막 유니폼을 벗은 디키에게 베라의 개인교습을 맡겼다. 디키로부터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은 베라는 1949년 마침내 양키스의 주전포수가 됐다. 1972년 베라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자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였던 8번을 영구결번했다. 문제는 8번은 디키의 번호이기도 했다는 것. 이에 양키스는 계획에 없었던 디키의 8번까지 영구결번으로 해줬다. 베라는 디키에게 진 신세를 톡톡히 갚았던 것이다.

14번의 월드시리즈를 치른 베라는 경기수, 타수, 안타, 2루타, 단타에서 지금도 월드시리즈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47년 첫 월드시리즈에서는 월드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대타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라슨이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1956년, 2차전에서 베라는 만루홈런을 날려 다저스 에이스 돈 뉴컴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7차전에서는 다시 뉴컴을 상대로 2개의 투런홈런을 뽑아냈다.

양키스의 위대한 전설

1963년 38살의 베라는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이듬해 양키스의 감독이 됐다. 베라는 감독 첫 해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다. 하지만 밥 깁슨이 버틴 세인트루이스에게 3승4패로 물러났다. 월드시리즈 패배 바로 다음날, 양키스는 베라를 경질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의 감독이었던 자니 케인을 데려왔다. 베라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듬해 케인의 양키스는 리그 6위에 그쳤다. 그 이듬해에는 꼴찌였다. 양키스는 그 후 11년간 월드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1972년 뉴욕 메츠의 감독이 된 베라는 이듬해 메츠를 월드시리즈에 올렸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는 '베라의 시즌은 끝났다'라고 쓴 기자에게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메츠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3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1976년 베라는 코치로 양키스에 돌아왔다. 그 해 양키스는 베라를 감독에서 해임한 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올랐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는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 베라는 다시 양키스의 감독이 됐다. 하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이듬해 시즌을 6승10패로 시작하자 성질 급한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겨우 16경기 만에 베라를 경질했다. 베라에게는 첫 번째보다 더 큰 상처였다. 그 후 14년간, 베라는 양키스와 연을 끊고 살았다.

1944년부터 1995년까지 52년간, 양키스는 12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6회 우승 경력의 거의 절반이다. 이 12번의 우승에는 모두 베라가 선수(10번) 또는 코치(2번)로 있었다. 양키스는 무려 반 세기 동안 베라 없이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내지 못했던 것이다.

1999년 7월19일, 스타인브레너는 베라와 화해하기 위해 '요기 베라의 날'를 만들고 베라와 라슨을 양키스타디움에 초청했다. 70세 라슨이 시구를 맡았으며 74세 베라가 그 공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데이빗 콘은 마치 베라의 양키스 복귀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믿을 수 없는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1999년 디마지오의 사망으로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양키' 자리를 물려받은 베라는 지금도 양키스의 막후 실력자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양키스 입단을 고민하는 선수들에게는 '베라의 전화 한 통'이 특효약이다. 양키스의 역사인 양키스타디움은 올시즌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인 여든두살의 베라는 아직도 팬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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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양키스타디움 시구자는 이미 정해져있다?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기사입력 2008-02-22 11:14 |최종수정 2008-02-25 21:13

2015년 9월 23일, 영면하다

요기베라는 2015년 9월 23일 영면합니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간략히 세계일보 기사를 인용합니다.

야구계 불멸의 명언을 남긴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가 향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3일(이하 한국시각) MLB닷컴은 "요기 베라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25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베라는 1946년 9월 23일 양키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고, 1965년까지 현역 생활을 하며 2120경기에 나서 타율 2할8푼5리(7555타수 2150안타), 358홈런을 기록했다
.
베라는 1948년부터 1962년까지 15시즌 연속 올스타에 뽑혔고, 세 차례(1951년, 1954년, 1955년)나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에 올랐다.

양키스는 베라가 주전 선수로 뛰는 동안 10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챔피언 반지 10개를 수집한 선수는 베라뿐이다. 양키스는 베라의 등번호 8번을 영구결번했다.

베라는 1964년 양키스 감독에 올랐지만 1년만에 해고됐고 1965년에는 지역 라이벌팀인 뉴욕 메츠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기도 했다.

베라가 명언을 남긴 것은 1971년 메츠 감독이 되고난 2년 후이다.

1973년 베라는 메츠가 시카고 컵스에 9.5경기차로 뒤진 조 최하위를 달리고 있을 때 한 기자의 질문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결국 시카고 컵스를 제치고 내셔널리그 동부조 우승까지 차지했다.

베라는 1972년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 투표에서 396표 중 339표를 얻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도 했다. – 세계일보 기사 인용

안면도 GWP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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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냉기마케팅그룹 전체가 안면도로 GWP행사를 가서 찍어 본 사진들입니다.
부서에 배포하고 나서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는데 용량문제로 지우다 보니 있어서 여기에 일부 사진이나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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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첫날 방을 구하러 감포까지 다녀왔지만 너무 멀다는 생각에
보문단지 옆 근처의 모텔에 7만원에 방을 구했다.
그리고 피곤하니 멀리가지말고 근처에서 놀자고해서 근처의 엑스포공원엘 갔다. 모토쇼등등을해서 입장료가 9000원에 달한다.
아무튼 표를 끊어 들어갔다.
애들이 있어서 모토쇼는 패쓰…
경주타워, 에니메이션관 등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늦은 시간에 입장해서 몇개 보고나니 금방 8시가 되었다.
모두 퇴장하라고한다. 그리고 경주타원에서 레이져쇼한다고한다.
그래서 피곤하지만 기다렸다가 레이져 쇼까지 보고 왔다…
조금 일찍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3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4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5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6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7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8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9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10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11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12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13





경주 여행 - 경주타워에서(엑스포공원) 14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경주에 도착해 방을 얻으려 돌아다니다 감포까지 가게 되었다.
불국사 근처에 갔다가 은결이 자는 바람에 고개를 넘어 감포에  가다가 내친김에 문무대왕릉까지 가게되었다.
넓은 바다와 샐수 없이 많은 갈매기가 반겨주었던 곳..
운이 좋았나보다…

이 문무대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안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문무대왕릉이 잇는 바다에 도착하니 마침 갈매기때가 날아 오른다..
사진으로 보아서 그렇지 정말 장관이 어닐 수 없다..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15

아래 사진은 떠나면서 아쉬운 마음에 찍어본 풍경..
연인과 갈매기를 부르는 아가씨의 모습이 한가롭다..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16 


새우깡으로 갈매기를 유혹해보고…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17

갈매기가 날아오르는 바다를 배경으로 ..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18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19 

갈매기를 쫒아가 본다…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20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21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22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23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24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25 경주 여행 - 문무대왕릉을 가다 26 

문무대왕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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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에 도착해 방을 얻으려 돌아다니다 감포까지 가게 되었다.
불국사 근처에 갔다가 은결이 자는 바람에 고개를 넘어 감포에  가다가 내친김에 문무대왕릉까지 가게되었다.
넓은 바다와 샐수 없이 많은 갈매기가 반겨주었던 곳..
운이 좋았나보다…

이 문무대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안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문무대왕릉이 잇는 바다에 도착하니 마침 갈매기때가 날아 오른다..
사진으로 보아서 그렇지 정말 장관이 어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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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떠나면서 아쉬운 마음에 찍어본 풍경..
연인과 갈매기를 부르는 아가씨의 모습이 한가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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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깡으로 갈매기를 유혹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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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가 날아오르는 바다를 배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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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를 쫒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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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9342.jpg 문무대왕릉-9336.jpg 문무대왕릉-9334.jpg 문무대왕릉-9322.jpg 문무대왕릉-9313.jpg 문무대왕릉-9311.jpg 

경주 여행 – 안압지에서 황홀한 야경을 보다

이번 5월 연휴를 틈타 경주엘 다녀왔다..
경주는 중학시절 수학여행으로 다녀오고는 처음이라 기대 만빵이었다..
오랜만에 가본 경주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많이 세련되고 복잡한 곳으로…
연후라서인지 사람들이 무지 많았다.  이아기를 들으니 4월 초 벗꽃이 필 무렵은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벼르고 별러서 저녁 무렵 안압지를 갔다.
어렵운 시간을 내준 집사람과 지흥씨-연화씨 부부에게 감사…
그리고 덕분에 고생한 아이들에게는 미안…


해질 무렵 안압지는 고즈녁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어둠이 깔리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역시 야경이 아름다운 안압지답다.
경주 여행 - 안압지에서 황홀한 야경을 보다 27

잔디밭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경주 여행 - 안압지에서 황홀한 야경을 보다 28

경주 여행 - 안압지에서 황홀한 야경을 보다 29 

해지기전에 호수를 배경으로 한컷 찍어 보았다
경주 여행 - 안압지에서 황홀한 야경을 보다 30

드디어 어둠이 깔리고..조명이 켜지면서 환상적인 정취를 뽐낸다..
경주 여행 - 안압지에서 황홀한 야경을 보다 31
경주 여행 - 안압지에서 황홀한 야경을 보다 32    

안압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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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5월 연휴를 틈타 경주엘 다녀왔다..
경주는 중학시절 수학여행으로 다녀오고는 처음이라 기대 만빵이었다..
오랜만에 가본 경주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많이 세련되고 복잡한 곳으로…
연후라서인지 사람들이 무지 많았다.  이아기를 들으니 4월 초 벗꽃이 필 무렵은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벼르고 별러서 저녁 무렵 안압지를 갔다.
어렵운 시간을 내준 집사람과 지흥씨-연화씨 부부에게 감사…
그리고 덕분에 고생한 아이들에게는 미안…


해질 무렵 안압지는 고즈녁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어둠이 깔리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역시 야경이 아름다운 안압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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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밭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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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기전에 호수를 배경으로 한컷 찍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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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어둠이 깔리고..조명이 켜지면서 환상적인 정취를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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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남자 나이 50, 그 쓸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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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남자 나이 50, 그 쓸쓸함에 대하여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회사형 인간’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대한민국의 50대 남성. 정년이 코 앞에 있지만 경제적으로 막상 해 놓은 것은 별로 없다. 부모와 자녀에 대해 책임감이 높아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식들 ‘눈치보기’ 급급하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도 많지 않고, 가족과 소통에도 서툴러 스트레스와 외로움에 한숨 짓는다.‘탈진상태’에 빠진 50대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58년 개띠’인 대기업 부장 김형석(가명)씨는 요즘 거의 우울증에 빠져 있다. 임원 승진에서 몇 년째 누락됐고, 자연히 후배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가 된 지도 몇 년 된 것이다. 요즘과 같이 경기가 어려워지면 스트레스 강도가 더하다. 그는 “회사가 더 이상 나를 필요치 않는 것을 이미 확인했고 사표를 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이들 학자금과 노부모 생각에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골에 홀로 된 어머니가 있고 그의 아들은 대학생이며, 딸은 아직 고등학생이다.


김 부장은 “억울한 마음도 많다”고 토로했다. 서울의 중상위급 대학을 졸업, 입사한 이래 휴일도 잊은 채 열심히 일했다. 새벽빛을 보며 집에서 나와 자정이 다 되어야 퇴근하는 게 일상이던 탓에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는 “내가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자부심과 이렇게 일하다 보면 돈과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으로 믿고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자신의 청춘을 다 받친 25년 직장생활이지만 그는 어느새 후배의 눈치를 봐야 하는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그는 요즘 최대한 회사에서 버텨야 한다는 생각보다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을 많이 하지만 선뜻 무엇을 할지 막막하다. 김 부장은 “앞으로 30년에 달할 우리 부부의 노후대책은 고사하고, 적어도 아이들이 결혼할 때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데 특별한 기술도 없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라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글귀다. 공자는 나이 쉰에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는 얘기다. 공자는 70세가 넘게 장수했지만 공자가 살았던 시대, 쉰이면 이미 노인에 해당할 나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까지 갈 것도 없다. 19세기 중반만 해도 서구의 인간 평균수명은 47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나이 쉰의 사람을 보고 노인이라고 했다가는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79.1세.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 100세가 될 날이 머지않았고, 건강관리만 잘하면 120세까지도 살 수 있다는 게 의학자들의 확신 어린 말이다. 당장 향후 10년 후에는 수명이 90세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나이 쉰은 평균적으로 이제 겨우 인생의 절반을 산 셈이다.


‘58년 개띠’는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의 중심에 있다. 흔히 “채이는 것이 58년 개띠”라고 하는 말은 인구 분포상 이 세대의 수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개띠세대가 성장함에 따라 사회는 요동치고 격변을 겪었다. 이들은 극심한 입시전쟁에서 고교 평준화라는 교육제도 변혁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또 이들이 ‘물밀듯이’ 대학에 진학한 70년대 말부터 대학 입학 제도가 출렁거렸다. 이 세대는 결국 1981년 ‘대학 입학은 쉽게, 졸업은 어렵게’라는 졸업정원제라는 대학제도를 낳았다.


두 번의 경제위기 직격탄 맞아 
기러기아빠의 상당수는 50대다. 사진은 조기유학 이미지. <경향신문>
58년 개띠가 포함된 한국의 50대는 정치·사회적으로 6·3세대와 386세대 사이에 있으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 사이에도 놓인 전형적인 ‘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황상민 교수는 “이들은 자신을 특징지을 뚜렷한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불운한 세대”라며 “이들은 선배인 4·19세대와 6·3세대, 후배인 386세대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박탈감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50대들은 70~80년대 초 경제호황과 맞물려 직장에서 산업의 역군으로, 가정에서 든든한 가장으로, 정치·사회적으로 넥타이부대로 1987년 넥타이 혁명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이들이 중간 간부가 되기 시작하며 맞은 IMF 외환위기 때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정리해고·명예퇴직의 파고를 맞아야 했다.


IMF 외환위기 시절,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던 52세 박영춘씨(가명)는 “우리 세대는 중동건설 특수 바람을 타고 사막의 먼지를 마시며 달러벌이에 앞장섰고, 건설뿐 아니라 자동차, 무역 등 모든 업종에 종사하며 주말도 반납한 채 밤낮으로 뛰었다”며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실직 대상이 돼 거리에 나앉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고 회고했다.


또 이들은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최근의 경제 위기 때도 조직에서, 후배들에게도 가장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우리나라 직장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만 53세로 평균 근속연수는 20년8개월이다. 하기야 삼팔선(38세 정년), 사오정(45세 정년) 소리도 옛말인데 50세까지 버티며 월급을 받았다면 ‘만수무강’한 축에 속한 행복한 인생일지 모른다.


하지만 삼팔선·사오정은 경제적으로 제2의 도전을 해볼 여지가 있다. 다시 공부를 할 수도, 전혀 다른 분야에 뛰어들 수도 있지만 50대들은 그럴 용기도, 또 여건도 되지 못한다. 현업에 치여 사느라 미래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그래서 58년 개띠를 비롯한 한국의 50대 남자들의 가장 큰 걱정은 지금 하고 있는 경제활동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느냐와 은퇴 후 삶이다.


실제 지난 2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20~50대 직장인 107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50대는 젊은층보다 은퇴 후의 삶에 대한 대비가 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46.4%)와 30대(43.4%) 10명 중 4명 이상이 현재 직장을 그만둔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고 응답한 반면 40대는 35.0%, 50대 이상은 37.8%에 그친 것이다. 결혼과 출산이 늦어지면서 한국의 50대 상당수는 자녀가 학업 중이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나이여서 자신의 노후보다는 당장 자식들에게 필요한 돈을 마련하느라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는 세대이기도 하다. 청년실업이 증가하면서 대학을 졸업한 자식들에게 용돈까지 대줘야 하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이들은 일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3월 현재 50대 남자의 고용률은 84.2%로 20대 남자의 고용률 56.2%보다 훨씬 높다. 이것은 정년에 임박한 50대들이 비정규직 자식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기막힌 처지에 내몰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을 곳도 마땅치 않다. 그러다 보니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가족에게 푸는 일도 적지 않다. 올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는 51세 김효석씨(가명)는 “집에 있다 보니 힘든 내 맘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귀찮아하는 것 같은 아내에게 짜증이 나고, 아이들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섭섭함과 자괴감이 치밀어오른다”고 말했다.


“소외감과 불안감은 일종의 화병” 황상민 교수는 “이는 지금 한국의 50대 남자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며 “이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를 위해 보내는 전형적인 ‘회사형 인간’으로 살아왔고 늘 경쟁에 치여 살아왔기 때문에 가족을 포함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어 대화에도 어려움을 겪는다”고 진단했다. 황 교수는 이어 “그 같은 스트레스가 가족이나 약자 등 엉뚱한 곳에서 폭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정성호 강원대 사회학과 교수도 저서 <중년의 사회학>(살림)에서 “부부 관계, 자녀 관계, 직장에서 사회적 관계 등에 어려움을 느끼고 소외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은 한국의 중년 남성이 겪는 일종의 화병”이라며 “이들은 가정과 사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뜬 세대’”라고 말했다.



한국의 50대는 지금까지 밤낮을 잊고 가족과 회사를 위해 뛰어다녔지만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찬밥 대우를 받는다. 사진은 50대 남자의 처진 뒷모습. <경향신문>
또 대한민국에 사는 50대는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해 부모에 대한 봉양과 자녀 뒷바라지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식들에게 봉양받지 못하는 세대다. 2007년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이 전국 50대 86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향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묻는 질문에 13.6%만 ‘자녀’라고 답했고, ‘자녀에게 부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71.7%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게다가 50대 남자는 신체적으로도 ‘내리막길’이다. 쉰을 넘기면서 눈도 침침해지고 술 마신 다음날 해독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며 성기능도 저하한다. 여기저기 몸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파도 아픈 것을 내색하지 못한다. 서울시 공무원인 54세 윤인구씨(가명)는 “늘 졸리고 피곤하다는 느낌에 절어 지내지만 아들이 결혼할 때 집 한 채라도 마련해주려면 일터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내 몸 돌볼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남성심리학>(리더스북)을 펴낸 인제대 스트레스연구소 소장인 우종민 박사(현 백병원 신경정신과 박사)는 “만약 건강에 이상 증세가 보일 경우 임원 승진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중년이 되면 회사에서 마련한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며 “경쟁우선주의·성과우선주의 문화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경쟁 상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본능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도 없다. 당연히 스트레스는 안으로만 쌓여간다. 우 박사는 “여자들은 동창회에 나가서 남편 흉도 보고 자식 자랑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지만 50대 남자들은 동창회를 나가도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를 할까 생각하기 때문에 만나면 속이야기는 털어놓지 않고 괜한 정치 이야기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50대 부부 5분만 같이 있으면 싸움” 
주민등록인구 (통계청, 2008년 12월 기준) 
이들은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아내, 자식들과 대화나 공감 능력은 서툴다. 쉴틈없이 회사 일에 매진하느라 그동안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체내에 여성 호르몬이 점차 증가하면서 사소한 일에도 서운한 감정을 갖는 일이 잦다. 누가 조금이라도 기분 상하는 말을 하기라도 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내가 누군데’ 하며 토라진다. ‘50대 부부가 5분만 같이 있으면 싸움이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재직 중인 53세 김모 교수는 “학교 연구실 대신 집에서 일을 해보려 했는데 결국 며칠 만에 다시 짐을 싸들고 학교로 나왔다”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 투성이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과 아내에게 자꾸 잔소리를 쏟아내고 부모님께도 대드는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심리학자는 “우스갯소리로 20대와 50대 남녀가 모텔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을 측정하면 50대 남자들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며 “인터넷도 하고 대화도 나누면서 하루 종일 모텔에서 즐겁게 보낼 수 있는 20대와 달리 대화에 서툰 50대는 딱 한 가지 목적만 이루고 나오기 때문에 모텔에 머무는 시간이 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이민아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 풍파를 겪으며 누구보다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고, 자신의 삶이 의지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한국의 50대 남자는 기본적으로 대화하는 준비가 안 돼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노는지, 직장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세대”라고 말했다.


이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배운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오직 술이다. 룸살롱, 폭탄주, 이런 게 익숙한 세대다. 하지만 술은 당장 힘겨움을 잠시 덜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건강만 더 해친다. 우종민 박사는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경쟁사회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너무 밟아 기름이 다 떨어진 탈진 상태”라며 “펌프에서 물을 솟게 하려면 세 바가지의 물, 즉 마중물을 부어야 하듯이, 50대 이후를 편안하게 보내려면 가족과 친구, 취미 이 세 가지 마중물을 미리 준비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족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이민아 교수는 “한국의 대다수 50대 남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장수나 마찬가지”라며 “패잔병이 아니라 때로는 부상하고, 때로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가족을 위해 힘들게 살아온 가장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전장에서 돌아온 장수를 맞듯 따뜻하게 맞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커버스토리]인생 2막 ‘50대의 꿈’을 펼쳐라
기사입력 2009-04-30 14:22 


새 도전으로 행복을 발견한 중년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을 바꾸는 것”
 
대기업 상무이사를 그만두고 자전거여행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차백성씨(왼쪽)와 광고회사 임원에서 요리사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오시환씨. 
“인생 2막이요? 이제는 인생 3막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는걸요.” 49세이던 2000년 겨울 대우건설 상무 자리를 박차고 자전거로 세계를 누비고 싶다는 어릴 적 꿈을 좇아 자전거여행가로 변신한 차백성(58)씨의 얼굴엔 활기가 넘친다. 그토록 고대한 세계여행의 꿈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사직한 직후 그가 첫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미국 서부해안 종주.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까지 7000㎞를 질주했다. 이어 일본, 뉴질랜드, 하와이, 미국 중서부와 캐나다 록키산맥, 유럽 8개국 등 최근까지 세계 곳곳을 자전거를 타고 누볐다.


평소 즐긴 자전거·요리로 새인생 성공 청춘을 바친 직장을 그만두는 데 갈등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표를 쓴 시기가 가장 적당한 때라고 판단했다. 50대 어느 지점에서는 직장에서 밀려나는 게 냉혹한 사회의 현실인 탓에, 밀려나기 전에 준비해나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다리 힘이 더 빠지기 전에 본격적으로 자전거 세계여행을 시작해야한다는 마음도 컸다. 차씨는 “마흔아홉에 사표를 낼 때만 해도, 앞으로 20년 정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50대부터 인생 후반전은 내가 하고 싶었던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면서 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며 “하지만 평균수명이 늘면서 지금은 75세 이후 또 다른 인생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유명 인사가 됐다. 자전거여행가로 명성을 얻으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자전거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고 방송 출연과 강의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차씨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사람”이라며 “요즘 내가 그 기쁨을 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 쉰이 넘은 남자들에게 사회는 봉사활동 외에 다른 일을 선뜻 주지 않는다”며 “쉰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꾸릴지 생각하고 준비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나이 50부터는 인생 2막을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쉰의 남자는 열 살 아이의 심정으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며 “문제는 그간의 사회적 삶에 발목을 잡힐수록 인생 2막은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가족, 직장, 직업 등 그의 첫 번째 인생에서 자유로워야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대다수 50대 남자가 자신이 처한 문제를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50대를 위한 곡 ‘그래’가 포함된 홍서범의 새 앨범 ‘리턴 투 룩’.
광고회사 이사로 근무하다가 마흔여덟 살에 사표를 쓰고 요리사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오시환(55)씨는 “시간이 없어 인생 2막을 준비할 짬이 없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마음가짐이 안 돼 있을 뿐, 정말 시간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직장에만 매어 사는 사람은 인생의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먼저 찾아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취미생활도 병행하라”고 주문했다. 만약 좋아하는 것이 없거나 골프라고 답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게 오씨의 생각이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카피라이터로 들어간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오시환씨는 코래드, M.A.P.S, 거손 등을 거치며 20년간 광고인으로 살았다. 나이 40을 넘기면서 인생 2막을 고민했다. 맛있는 것을 먹은 날은 반드시 집에 와서 같은 음식을 만들 정도로 평소 취미가 요리였던 그는 언젠가 요리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마흔여덟이 된 해에 사표를 썼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듯, 무작정 가게 먼저 차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게 기초 단계인데 많은 사람이 그걸 모른 채 음식점을 냈다가 퇴직금을 다 날린다”며 “나는 요리를 밑바닥부터 배우기 위해 돈 100만 원 들고 미국 플로리다로 건너갔다”고 말했다.


플로리다의 일식당과 뉴욕의 한식당에서 꼬박 3년간 주방보조로 일했다. 2003년 겨울 귀국해 호프집에서 주방장으로 6개월간 근무한 후 바다요리전문점 ‘해장금’을 열었다. 지금도 직접 새벽장을 봐 음식을 만들어내는 그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지금 그의 옆에는 그의 전철을 밟아 10년 동안 일한 기자직을 그만두고 미국 플로리다로 건너가 바닥부터 요리사 수업을 하고 온 허강우(43)씨도 있다. 오씨는 “취미생활을 하더라도 준프로 수준이 될 만큼 열심히 하라”며 “그렇게 하면 설령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는 게 전혀 두렵지 않다”고 단언했다.


인제대 스트레스연구소 소장인 우종민 박사도 취미생활을 가족, 친구와 함께 인생을 살면서 꼭 갖춰야 할 요소로 들었다. 우 박사는 “이 세 가지를 다 겸비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인생을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회사생활도 더 밝고 긍정적인 자세로 하기 때문에 조직에도 더 오래 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짜증과 스트레스에 짓눌려 허구한날 찌푸리는 사람보다 밝고 환한 얼굴로 일과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 인간관계나 업무성과 면에서 아무래도 더 이롭기 때문이다.


인생에 꼭 필요한 ‘가족·친구·취미’ 직업적 특성상 누구보다 바쁘게 사는 중앙일간지 기자로 26년간 잔뼈가 굵은 윤명훈(55·가명)씨의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기쁨도 취미생활이다. 그의 취미는 나무를 다듬어 물건을 만드는 목공. 주중에는 짬을 내기 힘들어 주로 쉬는 토요일을 이용한다. 아파트에 살고 있어 따로 작업할 공간이 많지 않은 그는 베란다를 자신의 작업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윤씨는 “나무에 대패질을 하고 못을 박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내가 만들고자 하는 물건을 손수 완성시킬 때 쾌감은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다”며 “우리 집에는 그동안 내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온 크고 작은 물건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퇴직하면 자신이 만든 목공 작품들로 전시회도 열 예정이다.


50대에 새로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인생은 딱 한 번뿐”이라는 것과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철저히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58년 개띠인 가수 홍서범씨는 최근 이 땅의 50대를 위한 노래 ‘그래’를 발표했다. ‘어느날 우연히 뒤돌아 보니 어느덧 내 나이 반을 넘기고 아쉬운 날들이 너무도 많아. 오- 그래 많은 걸 잊고 살았어. 이제는 날 위해 일어서야 해. 남겨진 날들도 너무도 많아. 나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아. 오- 그래 나에겐 꿈이 있어(중략)’라는 가사다. 홍서범씨는 “어느 날 문득 정신없이 살아온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됐고,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오면서 경제적 압박 등으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을 우리 세대에 남은 인생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보자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 곡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축구도 후반전에 역전하는 일이 많듯 인생도 후반전 역전이 가능하다”며 “단, 축구에서 작전타임과 휴식시간을 잘 활용해야 후반전에서 잘 뛰는 것처럼,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다스린다면 50대가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차기곡으로 ‘만 쉰’을 발표할 예정이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노잉(Knowing)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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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C에 입과하고 제대로된 회식이 없었는데 이제야 회식을 할 수 있었다.
나름 분위기 잡는다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근처 영통 홈플러스 근처의 영화관으로 갔다..
3사람은 노잉을 선택했고 3사람은 그림자 살인을 선택했다..  난 노잉을…
나름 재미있게 보았는데 결말은 조금 허전하다. 기존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져있었던 탓일까?
나머지 두 사람은 어이 없다는 표정이다…그린자 살인을 보았던 3사람은 아주 만족스런 눈치…

나오면서 헐리우드도 옛날의 헐리우드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앗다. 
가볍게 보고 넘기기엔 무겁다.. 모 수석께서는 지국종말론자의 후원을 받은 영화같다고 했는데…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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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미국 렉싱턴의 윌리엄 도즈 초등학교 개교기념식에서 이 학교 학생들 모두가 50년 후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그림을 타임캡슐에 담아 묻는 행사를 진행합니다.
 
이 때 한 소녀, 루신다…..어쩐 일인지 그녀만 그림이 아닌 이상한, 뜻을 알 수 없는 숫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쪽지를
내밉니다.  이 영화 노잉의 미스테리는 바로 여기서부터가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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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으로부터 꼭 50년이 더 지난 2009년  루신다가 다녔던 학교 학생인 니콜라스 케이지(‘ 존 코스틀러’역)의 아들 캐일렙이 역시 학교 개교기념식 행사에서 바로 그 루신다의 비밀스런 암호가 담긴 쪽지를 개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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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장면은 존이 아들 캐일렙이 받은 쪽지에 적힌 이상한 숫자들의 의미를 연구하는 모습입니다.
과연 숫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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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의미를 찾아라…. 숫자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자와 사망자수 그리고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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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예고된곳을 지나다 비행기 2대가 비상착륙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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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예고된 지하철 사고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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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럽에게 외계인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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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신다가 살았던 예집을 살펴보고 있다.
여기에서 EE란 Everyone Else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종말이 가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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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로 아이들을 피신시키겠다는 다이애나는 외게인들이 아이들을 데려가지 추격에 나서다
무리해서 신호를 어기고 교차로를 지나다 트럭에 치인다.
10월 19일 .
루신다(다이애나 엄마)가 다이애나가  그날 죽는다고 했던 그날  정시에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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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떠나보내고 허탈해하는 니콜라스 케이지….
더 이상 할수 있는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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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가는 길 질서는무너지고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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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랫동안 서먹하게 지내던 아버지를 찾아가 화해한다.
목사인 아버지는 이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라며..
이 가족은 껴안은 채 종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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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구를 덮친 열폭풍…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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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받은 아이들은 애덴동산 같은 곳에서 새로운 내일을 품습니다.노잉(Knowing)을 보다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