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야구선수 요기베라 명언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Updated on 2009-05-06 by

It ain't over till it's over

It ain't over till it's over
멋진 말입니다.

이 글은 회사 인트라넷에 올라온 글입니다.

전설적인 야구선수 요기베라 명언 It aint over till its over.jpg

집에 와서 요기 베라에 대해 찾아보니 관련 기사가 많이 있더라구요.
대단한 선수였다고하네요.

[레전드 스토리] '10개의 우승반지' 요기 베라

요기베라1.jpg

요기 베라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배리 본즈(762) 새미 소사(609) 켄 그리피 주니어(593) 라파엘 팔메이로(569) 테드 윌리엄스(521) 알렉스 로드리게스(518) 어니 뱅크스(512). 4084개의 홈런을 날린 이들 7명에게는 단 한 개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도 없다. 하지만 여기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끼울 수 있는 선수가 있다. 통산 358홈런의 요기 베라다.

베라가 풀타임으로 뛴 17년간(1947~1963) 뉴욕 양키스는 14번 월드시리즈에 올라 10번 우승했다(베이브 루스 15년간 4번, 루 게릭 14년간 6번, 조 디마지오 13년간 9번, 미키 맨틀 18년간 7번).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는 베라가 안방을 지킨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지금 남아있는 베라의 이미지는 '요기즘(Yogiism)'으로 불리는 그의 화려한 언변이다. '피자를 어떻게 잘라드릴까요'라는 점원의 물음에 '8개는 배부르니 4개로 해주시오'라는 종류의 유머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 It's Over)'와 같은 잠언은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말들이었다.

실제로 베라는 엄청난 수다쟁이었다. 마스크를 쓰고는 상대 타자와, 1루에 나가서는 상대팀 1루수와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양키스는 베라가 1루에 있을 때 건 히트앤드런은 신기할 정도로 무조건 실패했다. 사인을 받은 베라의 입이 얼어붙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베라'는 작전이 걸렸다는 신호였다. 이를 알게 된 후 케이시 스텐겔 감독은 베라가 있을 때는 작전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베라는 화려한 언변에 앞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였다. 그가 포수로서 기록한 306홈런은 마이크 피아자(396) 칼튼 피스크(351) 자니 벤치(326) 다음이다. 벤치와 피스크, 이반 로드리게스(디트로이트)의 공격력 역시 일품이지만 통산 출루율과 장타율에서 모두 베라에 뒤진다.

[주요 명포수들의 통산 성적]
베라 : .285 .348 .482 / 2150안타 358홈런 1430타점(반지 10개)
벤치 : .267 .342 .476 / 2048안타 389홈런 1376타점(반지 2개, GG 10개)
피스크 : .269 .341 .457 / 2356안타 376홈런 1386타점(GG 1개)
피아자 : .308 .377 .545 / 2127안타 427홈런 1335타점
퍼지 : .303 .340 .479 / 2495안타 288홈런 1182타점(반지 1개, GG 13개)

1949년부터 1958년까지 10년간, 베라는 한 번도 20홈런 80타점 장타율 .470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포수 중에서는 베라를 제외하면 오직 피아자만 해낸 일이다. 11년 연속 80타점 역시 포수 역대 최고기록이다(2위 피아자 10년). 베라는 1949년부터 1955년까지 7년 연속 팀내 타점 1위를 지켰는데, 이는 디마지오의 마지막 3시즌, 맨틀의 첫 4시즌과 겹친다.

베라는 MVP 7회 수상의 본즈를 제외한 8명의 3회 수상자 중 한 명이다(로이 캄파넬라, 디마지오, 지미 팍스, 맨틀, 스탠 뮤지얼, 알렉스 로드리게스, 마이크 슈미트). 하지만 1950년부터 1956년까지 7년 연속으로 4위 이내에 든 것은 베라가 유일하다(푸홀스는 지난해 9위에 그침으로써 타이기록에 실패했다). MVP 투표에서 15년 연속 표를 받은 것도 본즈와 함께 역대 공동 2위 기록이다(1위 행크 애런 19년 연속).

"그 어떤 공도 때릴 수 있다"

좌타자였던 베라는 선구안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배트컨트롤 능력이 있었다. 조 매드윅,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배드볼히터로 꼽히는 베라는, 발목 높이의 공을 골프스윙으로 넘겼으며, 바깥쪽으로 크게 빠지는 공은 툭 건드려 안타를 만들어냈다. 얼굴 높이의 공을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로 만든 적도 있었다. 베라에 비하면 지금의 블라디미르 게레로(LA 에인절스)는 양호한 편이라고.

베라의 배트컨트롤을 증명해주는 또 한 가지는 삼진 숫자다. 베라가 메이저리그에서 19년을 뛰며 기록한 통산 414개의 삼진은 애덤 던(신시내티)의 2년치에 해당된다. 삼진보다 홈런이 많았던 시즌이 5번이었으며, 13년 연속으로 볼넷보다 적은 삼진을 기록했다. 베라 이후 7번 이상의 '400타수 이상 25삼진 이하'의 시즌을 만들어낸 선수는 토니 그윈이 유일하다. 1950년에는 믿을 수 없는 597타수 12삼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베라는 필요한 순간 어김없이 한 방을 날려주는 당대 최고의 클러치 히터였다. "마지막 3회 동안 가장 무서운 타자는 베라"라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폴 리차드 감독의 주장은 기록이 증명해주고 있다. Retrosheet가 추적이 가능한 1950년부터 1956년까지 타석의 79%를 분석한 결과, 베라는 주자가 없을 때 .258, 주자가 있을 때 .318, 득점권에서 .314, Close & Late에서 .327의 타율을 기록했다.

베라는 포수로서도 최고였다. 또 다른 전설적인 양키스 포수 빌 디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은 덕분에 기본기가 탄탄했다. 수비율 1.000 시즌을 만들어낸 역대 4명의 포수 중 한 명이며, 당시 최고기록이었던 148경기 연속 무실책을 기록하기도 했다(현 기록은 마이크 매시니 252경기). 리그에서 가장 많은 더블플레이를 만들어낸 것도 6번이나 됐다. 체력도 뛰어나 리그 최다 출장을 8차례 기록했으며, 1962년에는 37세의 나이로 22이닝 연장전을 완주하기도 했다. 유일한 약점은 그리 강하지 않은 어깨였다.

하지만 '포수 베라'가 진정으로 빛난 부분은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부분이었다. 베라는 특히 투수 리드와 투수를 다루는 능력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투수들의 심리상태를 모두 꿰뚫고 있었다. 투수들은 마운드에 올라온 베라의 한 마디에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1956년 돈 라슨의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도 베라의 노련한 리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력 후반 베라는 좌익수로 자주 기용됐는데, 좌익수 수비 역시 뛰어났다. 펜스 뒤 관중들과 수다를 떠는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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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티 포드와 함께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브랜치 리키가 준 좌절

베라의 본명은 로렌스 피터 베라다. '요기(Yogi)'라는 이름은 어린 시절 한 친구가 요가수행자 같다고 해서 붙여준 것이다. 베라는 1925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이탈리아 이주민 아들로 태어났다. 벽돌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베라도 14살 때 학교를 관두고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베라는 눈에 띄는 실력을 드러냈다.

1942년 베라는 동네 친구 조 가라지올라(전 애리조나 단장 조 가라지올라 주니어의 아버지)와 함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세인트루이스 입단은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가라지올라에게 500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한 브랜치 리키 단장은 가라지올라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베라에게는 250달러를 제시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베라는 이를 거부했다. 리키의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가라지올라는 통산 .257 42홈런 255타점으로 은퇴).

리키가 베라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한 것은 키 172cm의 작은 체구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리키 역시 선수 시절에는 키 175cm의 작은 포수였다는 것. 리키의 포수 실력은 마이너리그에서 한 경기 13개의 도루를 허용했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베라의 모습이 자신의 선수 시절과 겹쳐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 당시는 리키가 이미 브루클린 다저스로 옮기기로 마음을 굳혔을 때로, 베라를 세인트루이스가 아닌 다저스에 입단시키기 위해 일부러 낮은 계약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저스로 옮기기 전에 양키스가 나타나 500달러를 제시함으로써 리키는 남 좋은 일만 시켜줬다. 그리고 베라는 덕분에 이를 더 악물었다.

루키리그 팀인 노포크로 보내진 베라는 프로 첫 타석에서 만루홈런을 터뜨리는 등 첫 2경기에서 12안타 23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944년에는 해군에 입대, 2차대전에 참전해야 했다. 대공포 사수였던 그는 이탈리아-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D-데이'에 참전한 메이저리거는 베라가 유일하다.

베라를 처음 눈여겨 본 사람은 뉴욕 자이언츠 감독인 멜 오트였다. 스프링캠프에서 베라의 범상치 않은 모습을 확인한 오트는 양키스 래리 맥파일 단장에게 찾아가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조그만 포수가 하나 있던데 우리에게 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맥파일은 베라가 누군지 몰랐지만 일단 거절하고 봤다. 이렇게 베라는 카디널스도, 다저스도, 자이언츠도 아닌 양키스의 선수가 됐다.

역시 베라의 가능성을 직감한 조 매카시 감독은 당시 막 유니폼을 벗은 디키에게 베라의 개인교습을 맡겼다. 디키로부터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은 베라는 1949년 마침내 양키스의 주전포수가 됐다. 1972년 베라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자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였던 8번을 영구결번했다. 문제는 8번은 디키의 번호이기도 했다는 것. 이에 양키스는 계획에 없었던 디키의 8번까지 영구결번으로 해줬다. 베라는 디키에게 진 신세를 톡톡히 갚았던 것이다.

14번의 월드시리즈를 치른 베라는 경기수, 타수, 안타, 2루타, 단타에서 지금도 월드시리즈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47년 첫 월드시리즈에서는 월드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대타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라슨이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1956년, 2차전에서 베라는 만루홈런을 날려 다저스 에이스 돈 뉴컴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7차전에서는 다시 뉴컴을 상대로 2개의 투런홈런을 뽑아냈다.

양키스의 위대한 전설

1963년 38살의 베라는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이듬해 양키스의 감독이 됐다. 베라는 감독 첫 해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다. 하지만 밥 깁슨이 버틴 세인트루이스에게 3승4패로 물러났다. 월드시리즈 패배 바로 다음날, 양키스는 베라를 경질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의 감독이었던 자니 케인을 데려왔다. 베라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듬해 케인의 양키스는 리그 6위에 그쳤다. 그 이듬해에는 꼴찌였다. 양키스는 그 후 11년간 월드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1972년 뉴욕 메츠의 감독이 된 베라는 이듬해 메츠를 월드시리즈에 올렸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는 '베라의 시즌은 끝났다'라고 쓴 기자에게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메츠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3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1976년 베라는 코치로 양키스에 돌아왔다. 그 해 양키스는 베라를 감독에서 해임한 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올랐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는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 베라는 다시 양키스의 감독이 됐다. 하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이듬해 시즌을 6승10패로 시작하자 성질 급한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겨우 16경기 만에 베라를 경질했다. 베라에게는 첫 번째보다 더 큰 상처였다. 그 후 14년간, 베라는 양키스와 연을 끊고 살았다.

1944년부터 1995년까지 52년간, 양키스는 12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6회 우승 경력의 거의 절반이다. 이 12번의 우승에는 모두 베라가 선수(10번) 또는 코치(2번)로 있었다. 양키스는 무려 반 세기 동안 베라 없이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내지 못했던 것이다.

1999년 7월19일, 스타인브레너는 베라와 화해하기 위해 '요기 베라의 날'를 만들고 베라와 라슨을 양키스타디움에 초청했다. 70세 라슨이 시구를 맡았으며 74세 베라가 그 공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데이빗 콘은 마치 베라의 양키스 복귀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믿을 수 없는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1999년 디마지오의 사망으로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양키' 자리를 물려받은 베라는 지금도 양키스의 막후 실력자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양키스 입단을 고민하는 선수들에게는 '베라의 전화 한 통'이 특효약이다. 양키스의 역사인 양키스타디움은 올시즌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인 여든두살의 베라는 아직도 팬 곁을 지키고 있다.

요기베라3.jpg

새 양키스타디움 시구자는 이미 정해져있다?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기사입력 2008-02-22 11:14 |최종수정 2008-02-25 21:13

2015년 9월 23일, 영면하다

요기베라는 2015년 9월 23일 영면합니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간략히 세계일보 기사를 인용합니다.

야구계 불멸의 명언을 남긴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가 향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3일(이하 한국시각) MLB닷컴은 "요기 베라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25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베라는 1946년 9월 23일 양키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고, 1965년까지 현역 생활을 하며 2120경기에 나서 타율 2할8푼5리(7555타수 2150안타), 358홈런을 기록했다
.
베라는 1948년부터 1962년까지 15시즌 연속 올스타에 뽑혔고, 세 차례(1951년, 1954년, 1955년)나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에 올랐다.

양키스는 베라가 주전 선수로 뛰는 동안 10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챔피언 반지 10개를 수집한 선수는 베라뿐이다. 양키스는 베라의 등번호 8번을 영구결번했다.

베라는 1964년 양키스 감독에 올랐지만 1년만에 해고됐고 1965년에는 지역 라이벌팀인 뉴욕 메츠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기도 했다.

베라가 명언을 남긴 것은 1971년 메츠 감독이 되고난 2년 후이다.

1973년 베라는 메츠가 시카고 컵스에 9.5경기차로 뒤진 조 최하위를 달리고 있을 때 한 기자의 질문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결국 시카고 컵스를 제치고 내셔널리그 동부조 우승까지 차지했다.

베라는 1972년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 투표에서 396표 중 339표를 얻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도 했다. – 세계일보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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