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018년 4분기(애플 회계년도로는 2019년 1분기) 애플 실적이 발표되었습니다. 시장에서 예상하는대로 상당히 부진한 성적이었죠.
매출 843억 달러(전년 동기 비 -4.5%)
순이익 200억 달러(전년 동기 비 -0.5%)
그렇지만 그동안 애플 미래에 대한 우려로 애플 주가는 지난 2018년 10월 고점 대비 30%이상 지속적으로 하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낮아진 시장 기대 정도의 애플 4분기 실적이 발표되자 오히려 주가가 상승하는 기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월가에서는 애플의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에서의 부진 및 아이폰 판매 부진이 이미 시장에 알려져 주가에 선 반영되었기 때문에 이제 애플의 대형 악재는 모두 알려졌다는 반응입니다.
애플에 대한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제거되고 애플의 실적이 치명적으로 나쁘지는 않기 때문에 그동안 과하게 하락한 주가가 회복되는 과정에 접어들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죠.
2. 4분기 애플 실적을 살펴보자
그러면 4분기 애플 실적을 살펴보면서 과연 일각에서 이야기하는만큼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감내할만한 수준인지를 고민해 보시죠.
2.1. 2년만에 매출 및 손익 감소를 보이다.
우선 애플 매출을 살펴보면 2018년 4분기 애플 매출은 843억 달러로 전년 동기 883억 달러에 비해 -4.5% 감소했습니다.
4분기는 애츨로서는 최성수기에 해당하는데요. 그동안 애플은 최성수기인 4분기에 매출과 손익을 극한으로 증가시켜 왔습니다.
그동안 애플 매출이 감소한 적이 자주 있었지만 최성수기인 4분기에 매출 감소는 극히 드문 현상이었습니다. 애플로서는 최성수기에 격는 매출 감소라는 점이 뼈아픈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분기별 애플 매출 및 전년 비 성장율 추이(2013년 1분기~2018년 4분기) Quarterly Apple’ quarterly Revenue & Growth rate, Graph by Happist
손익은 매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감소폭이 적습니다. 4분기 애플 순이익은 20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비 -0.5% 하락하는 수준에서 방어했습니다.
그동안 애츨 손익 성장율이 나빠진 경우는 최대 -27%까지 하락하는 등 극심한 하락을 격기도 했기 때문에 이번 순이익의 감소한 미비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향후 트렌드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매출 감소에 비해서 순이익 감소가 적기 떄문에 순이익율은 오히려 23.7%로 근래 가장 높은 수준으로 뛰어 올랐습니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애플 실적이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분기별 애플 순이익 및 순이익율 추이(2013년 1분기~2018년 3분기) Quarterly Apple’s Net Profit & Profit Ratio, Graph by Happist
2.2. 그러나 아이폰은 폭망하고 있다.
비록 애플 전체로는 매출 감소와 손익 감소가 미비하더라도 애플의 메인 비지니스인 아이폰은 아주 나쁜 결과를 보였습니다.
2018년 3분기 실적 발표 시 앞으로 애플은 아이폰 등 제품 판매량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발표로 시장의 우려를 낳았습니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불투명해지면서 정보가 왜곡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죠.
아무튼 이번 2018년 4분기 실적 발표에서는 아이폰, 맥킨토시, 태블릿 등 주요 하드웨어 판매량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대목이죠.
아무튼 애플 아이폰관련해서는 매출만 발표되었는데 2018년 4분기 아이폰 매출은 520억 달러로 2017년 4분기 616억 달러에 비교해서 -16%나 감소했습니다.
4분기가 아이폰 수요가 절정에 이르는 최고 성수기인점을 고려하면 매출이 두자리수치로 감소한 것은 여러모로 중요한 변화 요인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그동아 IT 산업의 총아로 불리웠던 스마트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분기별 아이폰 매출 및 전년비 증가율(2013년 1분기~2018년 3분기) Quarterly iPhone sales and Growth rate, Graph by Happist
이렇게 아이폰 매출이 감소함에 따라 아이폰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62%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아이폰 매출 비중 62% 비중은 다른 비수기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그동안 성수기인 4분기엔 최대 70%까지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낮아진 것입니다.
4분기를 기준으로는 5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애플 내에서 다른 제품들이 성장하고 상대적으로 아이폰 매출이 줄어들면서 점차 아이폰의 위상이 낮아질것으로 대부분 전망하고 있습니다.
분기별 아이폰 매출 및 매출 비중(2013년 1분기~2018년 34분기) Quarterly iPhone sales and portion, Graph by Happist
2.3. 애플이 기대하는 서비스 매출은 늘었지만…
애플은 실적 발표에서 아아폰 매출은 감소했지만 애플 서비스 매출은 큰폭으로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208년 4분기 애플 서비스 매출은 109억 달러로 전년 동기 비 28% 성장했습니다. 수치상으로 판단 시 성장율은 괜찮은 수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2017년 4분기 애플 서비스 매출 성장율은 18%로 그동안 추세에서 벗어나 상당히 낮아진 상태였습니댜. 상대적으로 낮게 성장한 전년 동기를 기준으로 하다보니 성장율이 높게 나온 것이라 4분기 28% 성장은 과장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애플이나 다른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애플 서비스 성장이 장미빛만은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분기별 애플 서비스 비지니스 매출 및 전년 비 성장율(2013년 1분기~2018년 4분기) Quarterly Apple’ Service Revenue & Y2Y Growth rate, Graph by Happist
2.4. 웨어러블을 비롯한 기타 제품의 여전한 성장세
여러번 지적하듯 애플 내에서 아이폰 성장이 주춤한 사이 서비스와 웨어러블을 비롯한 기타제품군이 크게 성장하고 있죠.
애플 기타 제품에는 스마트 와치, 에어포드와 같은 웨어러블 제품과 애플 TV 그리고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 제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AirPods, Apple TV, Apple Watch, Beats products, HomePod, iPod touch and other Apple-branded and third-party accessories가 포함된다고 합니다
4분기에 기타제품은 73억 달러로 전년 동기 비 33% 성장했습니다. 최근 6개 분기동안 애플 기타 제품군은 30%이상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마 아이폰 판매 부진을 어느 정도는 커버해주고 있습니다.
분기별 애플 기타 제품군 매출 및 전년 비 성장율(2013년 1분기~2018년 4분기) Quarterly Apple’ Other Products’ Revenue & Y2Y Growth rate, Graph by Happist
2.5. 북미를 제외하고 전지역에서 역성장하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 매출 감속 두두러지지만 유럽이나 일본 등 전통적으로 애플 성장을 지원해 왔던 유럽이나 일본의 매출도 감소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매출이 감소해도 일부 지역의 영향이었지만 4분기 실적은 북미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감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애플 지역별 분기별 전년 비 성장율(2013년 1분기~2018년 4분기) Quarterly Apple’ Revenue Y2Y Growth rate by Area, Graph by Happist
3. 애플의 향후 전망은?
아울러 애플은 다소 부정적인 2019년 1분기(애플 회계년도로 2019년 2분기)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매출 : 550억 ~ 590억 달러
총마진율 37%~38% 사이
영업비용 : 85억 ~ 86억 달러
기타 이익 : 3억 달러
이러한 2019년 1분기에 대한 애플 전망은 월가의 전망치보다 낮은 수준입니다리피니티브는 2019년 1분기 애플 매출을 588억 달러로 전망했는데요. 애플 최고치 전망도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도 그렇고 애플도 그렇고 스마트폰 업체들이 수요 및 무역전쟁의 여파로 상당히 고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이번 2018년 4분기 테슬라는 지난 3분기에 이어서 분기 연속 흑자를 실현하면서 경영이 안정화 될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흑자 수준이 3분기 3.12억달러 수준에서 1.39억 달러로 큰폭으로 감소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난 3분기와 같은 대규모 흑자를 실현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최근 테슬라의 정리해고 발표와 같은 선제적 조치들이 발표된 게 아닐까 추정합니다. 앞으로 2019년 1분기의 실적을 보면 테슬라가 안정적인 손익구조를 확보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판명될 것으로 보입니다.
분기별 테슬라 순이익 추이(2012년 1분기 ~ 2018년 34분기) Quarterly Tesla Net income. Graph by Happist
마찬가지로 테슬라의 매출총이익율도 지난 3분기 22.3%까지 올랐지만 이번 4분기에는 20% 수준으로 다소 낮아졌습니다. 물론 기존 10%대보다는 높은 수준이긴 하죠.
일론 머스크가 그동안 이익율을 예전 수준으로 회복시킬것이라도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들어난 셈입니다.
분기별 테슬라 매출총이익율 추이(2012년 1분기 ~ 2018년 4분기) Tesla quarterly Gross Profit Margin, Graph by Happist
그러나 테슬라는 모델 3의 생산성이 계속 개선되고 있다고 밝혀 앞으로의 전망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4분기엔 모델 3 생산 시간은 3분기에 비해서 20% 감소했으며 이는 지난 2분기에 비해서는 65%가 개선되었습니다.
그 결과 4분기에는 보다 낮은 가격 모델 판매가 증가했지만 모델 3의 마진은 20%이상을 유지했습니다.
2. 생산과 판매는 상승세를 유지하다.
지난 3분기 모델3 생산 급증 및 판매에 힘입어 대규모 흑자로 전환했는데 이러한 생산량 증가 및 판매 증가 추세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슬라는 지난 4분기 동안 모델 3를 61,394대 생산해 점차 생산 능력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4분기엔 주당 7,000대 생산 수준까지 개선되었습니다. 주당 5,000생산이 가능하느냐로 논란이 많았던 2분기와는 확실히 달라진 분위기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론 머스크가 공언했던 주당 1만대 생산은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최근에 이런 이야기들은 쑥 들어갔습니다.
4분기 생산량 86,555대(모델 3 61,394대와 25,161대의 모델 S 및 모델 X)로 전분기 비 8% 증가
4분기 판매량(출하량) 90,700대로 전분기 대비 8% 증가
테슬라 분기별 자동차 생산량 및 자동차 배송량 추이 Tesla production & delivery(~Q4 2018), Graph by Happist
모델 3 판매 증가에도 기존 모델 판매 영향 無
이렇게 모델 3 생산 및 판매 증가에 따라 테슬라 성과가 좋아지는 가운데 기존 모델 S와 모델 X의 판매는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보다 저가인 모델 3가 시장에 출시해 인기를 끄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오래된 모델인 모델 S나 모델 X의 판매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것은 테슬라 전략이 잘 먹히고 있다는 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테슬라 분기별 모델별 출하량 추이, Tesla Delivery per model, graph by Happist
2018년, 연간 245K 대 판매
이에 따라 2018년 한해동안 모델 3 145,846대와 99,394대의 모델 S 및 모델 X를 출하해 전년 比 138%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판매 추이는 테슬라가 아주 오래전에 세웠던 오리지널 판매 목표를 크게 초과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일론 머스크는 이후 2018년 50만대 생산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분석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습니다.
테슬라 연도별 배송량 추이와 원래 계획 비교 Tesla yearly delivery Graph by Happist
3. 매출 증가
이렇게 모델 3를 비롯한 테슬라 자동차 전체 생산 및 출하량 증가는 테슬라 매출을 크게 높였고 이런 트렌드는 4분기에도 이어졌습니다.
2018년 3분기 테슬라 매출은 72.26억 달러를 기록해서 전년 동기비 120%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분기별 테슬라 매출 및 전년 동기 비 성장율(2012년 1분기 ~ 2018년 4분기) Tesla Querterly Revenue & Y2Y growth tate
이러한 테슬라 매출 증가를 연도별로 살펴 보죠.
2018년 전체로 테슬라는 214억 달러 매출을 올려 전년 비 82% 성장했습니다. 순이익도 2017년 22억 달러 적자에서 올 2018년에는 9.8억 달러로 크게 줄였습니다.
테슬라 연도별 매출액 및 순이익 추이 Graph by Happist
4. 그동안 테슬라 위기 징후였던 재무지표들의 변화
이제는 테슬라 위기설은 어느정도 잦아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테슬라가 망할 것이라도 주장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죠. 그렇지만 여전히 월가에서는 테슬라 주식 폭락에 베팅하는 세력은 여전하다고 합니다만.
재무적인 관점에서 테슬라의 상황은 어떤 상태인지 그동안 점검했던 팩터 중심으로 점검해 봤습니다.
4.1. 고객 예치금 비중 추이
테슬라 위기를 나타내는 지표중의 하나가 ‘고객 예치금 및 고객 예치금이 전체 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었습니다.
그것은 테슬라가 모델 3를 발표 후 45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려 1,000달러 예약금을 걸고 모델 3를 예약했는데, 모델 3생산이 늦어지면서 대규모 예약해지 상태가 발샐하면 테슬라의 재무 건전성을 크게 해칠 것이라는 예상때문이었죠.
왜냐하면 모델 3 예약금 등으로 받은 고객예치금이 거의 10억 달러에 이르고, 이 고객예치금이 테슬라가 가진 전체 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이상 높아졌기 때문에 대규모 인출 사태가 발생하면 테슬라가 감당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죠.
그렇게 위험한 상태였던 고객 예치금은 2018년 3분기엔 9억달러로 줄었고, 4분기엔 8억달러가 못되는 수준까지 줄었습니다. 그리고 고객 예치금이 차지하는 비율도 4분기엔 21.5%까지 하락하면서 예년 수준으로 회복했습니다.
분기별 테슬라 고객 예치금 및 고객 예치금이 전체 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 (2015년 1분기 ~ 2018년 4분기) Customer Deposits ratio in cash & equivalents(%)
4.2.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증가세로 돌아서다.
테슬라 위기를 주장하는 가장 큰 지표가 바로 테슬라가 가지고 있는 현금이 얼마나되는냐였죠.
실제로 테슬라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2017년 1분기 40억 달러를 정점으로 계속 줄어들어 2018년 2분기엔 22.4억 달러까지 줄어들면서 위기가 증폭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줄어들던 테슬라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3분기에 30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했고 이번 4분기엔 37억 달러 수준가지 늘면서 그동안의 우려를 어느정도 씻어 내고 있습니다.
분기별 테슬라 현금 및 현금성 자산(Tesla Cash and cash equivalents) 추이(2012년 1분기 ~ 2018년 4분기) Quarterly Tesla Cash and cash equivalents
4.3. 잉여현금흐름(FCF)이 플러스로 돌아서다.
테슬라의 잉여현금흐름(FCF)를 보죠.
잉여현금흐름(FCF)는 가용현금흐름이라고도 부르는데 기업 유동성을 파악하는데 핵심적이 지표라고 합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손익계산서(PL) 상의 매출, 이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경영 위기 시에는 미래 현금 창출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잉여현금흐름(FCF)를 살펴 본다고 합니다.
테슬라의 잉여현금흐름(FCF)은 2018년 2분기까지 계속 감소를 보였지만 3분기엔 8.8억 달러 그리고 4분기엔 9.1억 달러로 플러스로 전환하면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전환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작품 소장고에서 출발한 우피치 미술관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바로 보티첼리이다.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던 보티첼리(Botticelli)는 그 예술 활동의 전반부를 메디치가를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보니 당연하게도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티첼리(Botticelli)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으며 보티첼리(Botticelli) 작품성도 매우 뛰어나기에 우피치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내세우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는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을 소개하는 우피치 미술관 도록이나 우피치 미술관 공식 가이드의 표지가 보티첼리(Botticelli) 작품으로 채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피치 미술관 도록 표지에 나오는 보티첼리(Botticelli), Uffizi Gallery Catalog우피치 미술관 가이드 표지에 나오는 보티첼리(Botticelli) 작품, Uffizi Gallery Guide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두각을 나타낸 보티첼리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는 1445년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근처에서 염색공이엇던 마라아노 필리페피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외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이지만, “작은 술통”이라는 뜻을 가진 보티첼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게 다 이름인줄 안다.
1464년 마사초의 제자였던 프라 필리포 리피의 제자가 되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470년 독립해 자신만의 공방을 세웠다고 한다.
그가 유명해진 계기는 오니산티 성당을 위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가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오니산티 성당에 그린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여기서 성공을 거둔 후 그는 메디치 가문에 발탁을 받았고 이후 메디치가문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모네타(Simonetta)와의 만남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보티첼리는 결혼하기 위해 피렌체를 방문한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를 만나게 된다.
시모네타(Simonetta)는 제노바 명문가 출시으로 15세가 되자 피렌체 유력 가문인 마르코 베스푸치와 결혼하기위해 피렌체로 왔다.
그녀는 빼어난 미인으로 1475년 마상시합 축제에서 미의 여왕으로 뽑히는 등 피렌체 최고 미인으로 인정받았고, 피렌체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미모를 칭송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뽑내는 피렌체의 한 떨기 꽃이었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시모네타 초상, Sandro Botticelli, Idealized Portrait of a Lady (Portrait of Simonetta Vespucci as Nymph), 1480, Städel Museum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시모네타(Simonetta)는 예술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고 예술가들을 존중하고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피렌체 최고의 미인의 존중과 관심은 많은 예술가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그러한 예술가중엔 보티첼리도 있엇다.
시모네타(Simonetta)는 당시 피렌체 예술가중의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보티첼리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녀는 보티첼리에게 ‘나는 당신의 비너스가 될 것이다.’라며 보티첼리의 재능과 작품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관심이 아마도 보티첼리가 시모네타(Simonetta)를 사모하는 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미인단명이라고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는 22세의 젊은 나이로 페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죽음은 피렌체 예술가 및 일반들의 슬픔을 자아 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천명의 피렌체 시민들이 참여해 장지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일반적인 장례식 관습과 달리 그녀의 얼굴을 별도로 가리지 않았는데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티첼리 작품속에 되살아 난 시네모타
시네모타가 세상을 떠난 후 보티첼리는 그의 작품속에서 그녀를 애도하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의 상당 수는 그녀를 애도하면서 그녀를 모델로 그린 헌정화라고 할 수 있다.
‘봄’에서 봄의 여신 플로라로 나타나다.
보티체리가 세상을 떠난 시모네타를 애도하며 그린 첫번째 작품이 바로 ‘Primavera(봄)’이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프리마베라, Sandro Botticelli, Primavera, c. 1482, Uffizi Gallery, Florence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봄의 정경을 그린 것으로 여기 나오는 클로리스와 플로라는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보티첼리는 여기서 봄의 여신 플로라를 그가 사모하는 시네모타를 모델로 그렸는데 여위고 홍조 띤 얼굴로 추정컨데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시모네타의 마지막 모습으로 보인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봄중에서 시모네타로 추정되는 플로라, Sandro Botticelli, Primavera, c. 1482, Uffizi Gallery, Florenc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고대 로마신화에 따르면 비너스는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했닥 한다. 이를 모티브로 그림 중안의 거대한 조개 가운데 부문에 비너스가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서풍 제피로스는 바람을 불어 꽃이 춤을 추고 비너스가 타고 있는 조개는 해변가로 밀려간다.
오른쪽에선 시간의 여신 호라(Hora)가 비너스를 맞으며 풍부한 장식의 가운을 입혀주려고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1484-86년경, Tempera on canvas, 172.5 cm × 278.9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앞서 ‘Primavera(봄)’에선 봄의 여신 ‘플로라’를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렸는데, 이 비너스의 탄생에선 시간의 여신 호라(Hora)의 모델이 시모네타로 보인다.
또한 여기의 비너스도 시모네타가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피렌체 최고 미인이었던 시모네타는 보티첼리 그림 곳곳에서 헌정되고 있나 보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의 비너스,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1484-86년경, Tempera on canvas, 172.5 cm × 278.9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이 그림은 시네모타가 사망한지 8년 후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비너스를 시네모타를 모델로 그렸다면 8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그녀를 애도하고 그리워했다는 이야기이다.
비너스와 마르스(Venus and Mars)
전쟁의 신 마르스(Mars)가 비너스와 사랑에 빠졌다. 비너스의 부드러운 미소앞에서는 전쟁의 신도 무장해제당하고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스 산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사티로스들은 전쟁의 신 마르스의 무기를 가지고 주변에서 놀고 있고, 마르스 귀에 고동을 불면서 장난을 치고 있다.
이처럼 사랑에 빠진 비너스와 마르스를 그린 것은 이 작품이 결혼하는 메디치가의 신부를 위해서라고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와 마르스, Sandro Botticelli, Venus and Mars c. 1485 Tempera and oil on poplar panel, 69 x 173cm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에서 비너스는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렸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단 시모네타가 사망한지 7~8년이 흐린 시점이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와 마르스의 부분, Sandro Botticelli, Venus and Mars c. 1485 Tempera and oil on poplar panel, 69 x 173cm National Gallery, London
팔라스와 켄타우로스(Pallas and the Centaur)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 켄타우로스(the Centaur)앞에 서있는 아데나의 미네르바 여신 팔라스(Pallas)
여기에서 표현되는 팔라스는 아테나 여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별칭이다. 팔라스 아테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전에 소개한 ‘봄(Primavera)’의 의상이 유사하다.
여기에 나오는 미네르바 여신 팔라스(Pallas)는 물론 보티첼리가 사모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를 모델로 했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Sandro Botticelli, Pallas and the Centaur, c. 1482, empera and oil on poplar panel, 207 x 148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시모네타 가까이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다.
보티첼리는 한 때 피렌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예술가였지만 말년에는 거의 잊혀진 존재로 전락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동안 벌어 놓았던 많은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말년은 상당히 곤궁하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하고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고 이에 감명을 받아 그의 전 재산을 성당과 수도원에 기증하고 스스로 궁핍하게 생활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말년에 어렵게 살았으며 보티첼리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해주었던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생활비를 지원하지않았다면 “길거리에서 굶어 죽을 것”이라고 바사리는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1510년, 65세의 나이로 죽어가던 보티첼리는 시모네타의 발끝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끝까지 시모네티를 사모했다.
결국 보티첼리는 그가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해준 곳이자 그가 사모하던 시모네타가 묻혀있는 아르노강가의 살바토레 디 오니산티 성당(Chiesa di San Salvatore di Ognissanti)에 묻혔다.
결국 보티첼리는 죽어서야 그가 사모하던 시모네티 근방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작품과 더불어 그의 시모네티를 향한 사랑이야기 끊임없이 전해지고 회자되면서 그의 사랑은 영원함을 얻었다!!
살바토레 디 오니산티 성당(Chiesa di San Salvatore di Ognissanti)이 어디인지 구글 지도에서 찾아 보았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아르노강변으로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다.
아래는 아르노강에서 바라 본 살바토레 디 오니산티 성당(Chiesa di San Salvatore di Ognissanti) 픙경이다. 아르노강이 굽어보이는 성당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보티첼리는 천국에서 시모네티와 행복할까?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아르노강에서 바라 본 살바토레 디 오니산티 성당(Chiesa di San Salvatore di Ognissanti), Image – Choi dongsoon
피렌체의 사랑이라는 주제로 조금은 진부하지만 피렌체와 관련된 사랑이야기를 풀어보고 있는데 오늘은 ‘냉정과 열정사이(冷静と情熱のあいだ, Calmi Cuori Appassionati, Between Calm And Passion)’로 읽어보는 피렌체라는 내용으로 정리해 보련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冷静と情熱のあいだ)’
냉정과 열정사이(冷静と情熱のあいだ)는 1999년 소설로 출간되어 젊은층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2001년 영화화 되었다.
열정적으로 사랑을 쫒는 남자 주인공 준세와 냉정하게 사랑에 거리를 두려는 여자 주인공 아오이가 피렌체와 일본을 오가며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
저작권 문제가 어찌되는지 모르겠지만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冷静と情熱のあいだ)’ 전편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2시간 4분이 넘는 긴 런닝시간이지만 짬을 내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화질은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다.
영화 장면을 찾아가보자.
영화 곳곳에서 사랑을 찾는 준세와 아오이가 피렌체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전체 내용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인상적인 피렌체의 풍광을 보여주는 몇군데를 소개해 본다.
피렌체 두우모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冷静と情熱のあいだ)’가 시작되면 대표적인 OST인 ‘The whole nine yards’가 흐른다.
그러면서 아오이와 준세이의 대화가 흐른다.
준세, 그거 알아? 이런 말.. 피렌체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언제쯤 같이 올라가 줄래? 피렌체 두오모에? 응 언제? 음 먼 훗날 먼 훗날 언제? 글쎄… 한 10년 뒤쯤? 10년 뒤라… 그럼 우린 30살이잖아 준세 약속해 줄거지? 내 서른 살 생일은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그래, 약속해
아오이와 준세는 서른살이 되던해 피렌체 두우모에서 만나기로 한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두오모 The Santa Maria Del Fiore Cathedral dome, Image – ilya-orehov
미켈란첼로광장(Piazzale Michelangelo)
아오이와 준세의 대화가 끝나면 피렌체 풍광을 푸르른 외곽 풍경에서 시작해 시내까지 천천히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홍보하는 홍보 이미지도 이 미켈란첼로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서 담았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홍보 이미지, 미켈란첼로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서 준세와와 아오니
이 미켈란첼로광장(Piazzale Michelangelo)은 피렌체 전망을 보는 최적의 장소로서 또는 피렌체의 아름다운 석양을 보는 장소로서 아주 유명하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야경이 아름다운 미켈란첼로 광장, 미켈란첼로광장에서 바라 본 피렌체 시내, Image – Choi dongsoon
우피치미술관(Uffizi Gallery)
미술 복원 전문가로 나오는 준세
그렇기에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서는 수많은 미술작품과 함께 우피치미술관(Uffizi Gallery)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공방은 Stefano scarpelli 라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미술품 복구 전문가가 운영하고 있는 실제 공방이라고 한다.
우피치미술관(Uffizi Gallery)이 야 워낙 유명하니 굳이 위치나 소개가 불필요할 듯..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Galleria degli Uffizi, Piazzale degli Uffizi, Firenze, Italy, Image – Mariamichelle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내부, Galleria degli Uffizi, Piazzale degli Uffizi, Firenze, Italy, Image – Uffizi Gallery
준세가 첫 복원 작업을 맡았으나 (영화에서는) 누군가에게 찢겨져버린 루도비코 카르디 일 치골리(Ludovico Cardi Il Cigoli, 1559~1613)의 작품 ‘회개하는 막달레나(1610년 작)’
아래는 ‘냉정과 열정사이’ 영화에서
냉정과 열정사이 영화에서 루도비코 치골리(Ludovico da Cigoli)의 1610년 작 ‘회개하는 막달레나(Maddalena in penitenza)’를 복원하는 준세루도비코 치골리(Ludovico da Cigoli)의 1610년 작 ‘회개하는 막달레나(Maddalena in penitenza)’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의 재생을 테스트했던 루도비코 카르디 일 치골리(Ludovico Cardi Il Cigoli, 1559~1613) 의 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원죄없는 잉태) 1589년 작)
루도비코 카르디 일 치골리(Ludovico Cardi Il Cigoli, 1559~1613) 의 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원죄없는 잉태) 1589년 작)
아르노 강변도로
준세가 자전거를 타고 아르노 강변도로를 달린다.
‘냉정과 열정사이’ OST가 들려주는 아른다운 선율과 함께 시원하게 달리는 준세를 보노라면 당장 피렌체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영화에서는 원경으로 베키오다리와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위를 달리는 준세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흐르는 흥겨운 OST가 압권이다.
또한 이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는 준세가 아오이를 생각하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길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 바라본 베키오다리(베키오다리(Ponte Vecchio)와 에서 담아 본 그라지에다리(Ponte alle Grazie)와 베키오궁전(Palazzo Vecchio) 풍경, Image – Choi dongsoon
그리고 단테의 사랑이야기에서 단테가 베키오다리쪽에서 올라오던 베아트리체를 만난 장소가 바로 이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이다.
단테(Dante Alighieri)와 베아트리체(Beatrice)의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의 만남, Henry Holiday – Dante and Beatrice, Image – Henry Holiday (1839 – 1927)
결혼식이 열리던 곳, Piazza del Limbo
아오이 지인의 결혼식이 열리던 성당이다. 어디인지 몰라서 구글지도를 찾아 보았는데 위에서 소개한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 근방이다.
이 결혼식이 끝날 무렵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준세를 보고 아오이는 깜짝 놀란다.
그러나 스치듯 지나치고 마는 두 사람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우연히 자전거를 고치는 준세이를 발견한 아오이
리퍼블리카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어느 날, 준세이가 복원하던 그림이 갈갈이 찢겨진 채 발견된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준세이
경찰조사를 받고 나온 준세는 리퍼블리카광장 벤치에 앉아 상심에 빠진다. 여기에 여자친구(?) 매미가 찾아와 위로하고…
구글에서 찾아 본 리퍼블리카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위치이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리퍼블리카광장, Piazza della Repubblica, florence, Image – kirkandmimi
산타 안눈치아타광장(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
아오이의 서른살 생일이 된던 날, 준세와 아오이는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난다
두오모에서 만나 두 사람은 두우모가 보이는 산타 안눈치아타광장(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에서 그동안 마저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눈다.
멀리 떨어진 두사람, 마치 그동안 두 사람이 덜어져 있던 시간의 간격만큼이나 서먹서먹하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포스터, 두오모가 보이는 산타 안눈치아타광장(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에서 만난 두사람
여기는 상당히 생소한 장소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구글 지도의 힘을 빌렸다.
PIAZZA DEL POGGI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서먹한 가운데 아오이가 자기가 알고 있는 음악회를 알고 있다며 준세이를 이끌고 간 곳에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예술이 태동하고 성장한 예술의 도시요, 수 많은 예술가들의 가슴앓이가 뛰어난 걸작으로 승화되어온 사랑의 도시기이도 하다.
피렌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기로 한 김에 몇 차례에 나누어 피렌체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먼저 이탈리아의 독자적인 문학의 시초가 된 단테의 이야기이자, 유럽에서 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께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1. 아홉살, 운영의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1274년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가 아홉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포르티나리 가문의 축제에 참석했다. 그는 거기서 운명의 소녀 베아트리체(Beatrice, 1226~1290)를 만났다. 그녀와의 만남은 아주 짧았지만 운영처럼 단테의 영혼을 송두리채 빼았아 가고 말았다.
단테는 그의 시집 ‘신생(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 1293)’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 숙명의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던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던 생명의 정신은 너무도 격렬하게 요동쳤으며 작은 맥박소리에도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보아라, 신이 오시어 나보다 더 강하게 나를 압도했도다……”
단체의 영혼을 빼앗아 간 베아트리체(Beatrice)였지만 그녀의 이름도 모른체 헤어지고 만다.
베아트리체 초상, Beatrice Portinari,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2.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 두번째 조우
세월은 무심히 흘러 9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단테와 베아트레체는 다시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어느 날 단테가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 난간에 기대고 있었는데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방향에서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꿈에도 그리던 베아트리체였다.
그녀는 단테의 짝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테에게 보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테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이 만남이 전부였다.
단테(Dante Alighieri)와 베아트리체(Beatrice)의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의 만남, Henry Holiday – Dante and Beatrice, Image – Henry Holiday (1839 – 1927)
몰락한 귀족의 아들인 단테가 당시 피렌체 최고의 가문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과 인연을 맺기는 불가능했던 게 당시 냉혹한 상황이었다.
3. 정략결혼과 베아트리체의 죽음
단테는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마음에 품은 채 당시 사회 관례대로 1285년 어린 나이에 약혼했던 젬마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 지 2년만이었다.
베아트리체 역시 1287년 피렌체의 부자 가문이자 은행가였던 시모네 디 바르디와 결혼을 한다. 그렇지만 베아트리체는 1290년 6월 8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베아트리체 죽음 당시 단테의 꿈, Dante’s Dream of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1871, Walker Art Gallery,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4. 베아트리체가 준 강렬한 예술적 영감
문학 수업에 열중하던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와의 첫사랑,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랑은 단테에게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단테가 온갖 열정을 다해 쓴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숭고한 사랑, 신에 버금가는 고귀한 존재 , 구원자로 재창조해 그의 사랑을 예술속에서 영원하게 만들었다.
“나는 베아트리체. 그대가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곳에서 왔어요. 사랑이 날 이곳까지 이끌었지요. 내가 주 앞에 설 때 당신을 칭찬해 드리겠나이다.”
아래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위해 바친 시 ‘사랑의 노래’의 귀절이다.
“나의 아씨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도 싫도록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지긋이 바라보리라. 그를 바라보며 복이 있도록 드높은 곳 환한 밝음 속에서 오직 신을 우러러 축복 받는 천사와도 같이 내 비록 한낱 인간이건만 내 마음의 주님을 우러러 보면 천사에 못지않게 축복을 받고 솟아오르는 넋을 퍼덕이리라. 이런 힘이 그에게 있거니 남은 모를지라도 그를 바라 그리운 나는 아노라.” –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리라 –
1274년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가 아홉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포르티나리 가문의 축제에 참석했다. 그는 거기서 운명의 소녀 베아트리체(Beatrice, 1226~1290)를 만났다. 그녀와의 만남은 아주 짧았지만 운영처럼 단테의 영혼을 송두리채 빼았아 가고 말았다.
단테는 그의 시집 ‘신생(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 1293)’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 숙명의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던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던 생명의 정신은 너무도 격렬하게 요동쳤으며 작은 맥박소리에도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보아라, 신이 오시어 나보다 더 강하게 나를 압도했도다……”
단체의 영혼을 빼앗아 간 베아트리체(Beatrice)였지만 그녀의 이름도 모른체 헤어지고 만다.
베아트리체 초상, Beatrice Portinari,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세월은 무심히 흘러 9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단테와 베아트레체는 다시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어느 날 단테가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 난간에 기대고 있었는데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방향에서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꿈에도 그리던 베아트리체였다.
그녀는 단테의 짝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테에게 보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테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이 만남이 전부였다.
단테(Dante Alighieri)와 베아트리체(Beatrice)의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의 만남, Henry Holiday – Dante and Beatrice, Image – Henry Holiday (1839 – 1927)
몰락한 귀족의 아들인 단테가 당시 피렌체 최고의 가문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과 인연을 맺기는 불가능했던 게 당시 냉혹한 상황이었다.
단테는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마음에 품은 채 당시 사회 관례대로 1285년 어린 나이에 약혼했던 젬마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 지 2년만이었다.
베아트리체 역시 1287년 피렌체의 부자 가문이자 은행가였던 시모네 디 바르디와 결혼을 한다. 그렇지만 베아트리체는 1290년 6월 8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베아트리체 죽음 당시 단테의 꿈, Dante’s Dream of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1871, Walker Art Gallery,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문학 수업에 열중하던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와의 첫사랑,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랑은 단테에게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단테가 온갖 열정을 다해 쓴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숭고한 사랑, 신에 버금가는 고귀한 존재 , 구원자로 재창조해 그의 사랑을 예술속에서 영원하게 만들었다.
“나는 베아트리체. 그대가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곳에서 왔어요. 사랑이 날 이곳까지 이끌었지요. 내가 주 앞에 설 때 당신을 칭찬해 드리겠나이다.”
아래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위해 바친 시 ‘사랑의 노래’의 귀절이다.
“나의 아씨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도 싫도록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지긋이 바라보리라. 그를 바라보며 복이 있도록 드높은 곳 환한 밝음 속에서 오직 신을 우러러 축복 받는 천사와도 같이 내 비록 한낱 인간이건만 내 마음의 주님을 우러러 보면 천사에 못지않게 축복을 받고 솟아오르는 넋을 퍼덕이리라. 이런 힘이 그에게 있거니 남은 모를지라도 그를 바라 그리운 나는 아노라.” –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리라 –
이런 엄청난 관광객 인파를 보는 것도 여행의 한 즐거움이고 아무도 없어서 썰렁한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너무 많다며 투덜거리면서 다리를 건넜다.
원래는 베키오다리 좌우에 있는 보석상점들 사진을 담고, 여행오기전부터 기대했던 베키오다리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는데..
우선 연말이라서인지 문을 연 상점이 몇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로 도대체 사진을 담을 공간과 장면을 포착하기 어려웠다. 사람들 뿐인데 뭐..
2차대전 당시 폭파를 면했던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역사
우선 피렌체 관광의 필수 코스라해도 과장이 아닌 베키오다리(Ponte Vecchio)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베키오다리(Ponte Vecchio)는 피렌체 남쪽으로 흐르는 아르노강(Arno)를 가로지르는 12개의 다리(아르노강 상하류를 잇는 고속도로 다리까지 포함) 중에서 가장 오랜된 다리이다.
아르노강(Arno)에서 가장 강폭이 작은 곳에 위치해 아마 가장 먼저 다리로 연결되어, 아주 오래전 로마시대부터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키오다리(Ponte Vecchio)는 처음에는 목조건물로 지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목조다리는 생명을 다해 무너지자 1117년에 석조다리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이 석조다리도 붕괴가 계속되자 1345년 Teddeo Gaddi의 설계로 다시 건설되었고, 이 다리가 현재까지 기본 형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암살을 막기위한 비밀통로, 바사리의 회랑(Vasari Corridor)
한편 이 베키오다리는 피렌체 공화국 청사인 피티궁전(Pitti Palace)과 베키오궁전(Palazzo Vecchio)을 연결하고 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지만 피렌체도 권력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에 항상 정적에 대한 암살의 위험은 상존하고 있었다.
정적에 대한 암살의 위협이 높아지자 공화국 청사인 피티궁전(Pitti Palace)과 베키오궁전(Palazzo Vecchio)을 연결하는 베키오다리에 관련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만들기로 한다.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코시모 1세는 우피치궁전(지금은 우피치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을 설계한 Giorgio Vasari에게 명령해 베키오다리 2층에 관련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회랑을 1565년 건설한다. 따라 이 회랑은 설계자의 이름을 따서 바사리의 회랑(Vasari Corridor)이라고 불린다.
푸줏간을 내몰고 금세공업자로 채우다.
원래 이 베키오다리에는 고기를 파는 푸줏간, 대장간 그리고 토스카니 지방을 대표하는 가죽 공장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러나 피티궁전(Pitti Palace)과 베키오궁전(Palazzo Vecchio)을 오고 가는 위정자들에게 이러한 천한(?) 상점들이 눈에 거슬렸나 보다.
1593년 이런한 상점과 공장에서 심한 악취가 난다는 이유로 이러한 가게들을 전부 추방하고 당시 떠오르고 있었던 금세공업자들로 채웠다. 그 이후부터는 이 베키오다리에는 보석가게와 예술품 딜러들이 다리 양쪽을 채우고 있다.
2차대전당시 유일하게 파괴를 면한 베키오다리
세계2차대전은 이탈리아 각 유적지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첬는데 피렌체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동안 독일은 1943년부터 1944년까지 피렌체를 점령해ㅗ였다. 1944년 독일군은 연합군 공격에 밀려 도주하면서 추격하던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아르노강의 모든 다리들을 폭파시켰다.
하지만 하를레 슈타인하우슬린(Charle Steinhauslin)이라는 독일군 장군은 베키오 다리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폭파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무사히 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베키오 다리를 폭파하지 않는 대신 베키오다리 남쪽에 있었던 바사리 코리도르 같은 역사 지구의 거리들은 지뢰밭으로 만들어 진격을 늦추었다. 이러한 연유로 베키오다리 주변 건물들은 현대와 고전적인 옛 스타일을 혼합한 형태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사랑
1274년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가 아홉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포르티나리 가문의 축제에 참석했다. 그는 거기서 운명의 소녀 베아트리체(Beatrice, 1226~1290)를 만났다. 그녀와의 만남은 아주 짧았지만 운영처럼 단테의 영혼을 송두리채 빼았아 가고 말았다.
단테는 그의 시집 ‘신생(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 1293)’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 숙명의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던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던 생명의 정신은 너무도 격렬하게 요동쳤으며 작은 맥박소리에도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보아라, 신이 오시어 나보다 더 강하게 나를 압도했도다……”
단체의 영혼을 빼앗아 간 베아트리체(Beatrice)였지만 그녀의 이름도 모른체 헤어지고 만다.
베아트리체 초상, Beatrice Portinari,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세월은 무심히 흘러 9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단테와 베아트레체는 다시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어느 날 단테가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 난간에 기대고 있었는데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방향에서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꿈에도 그리던 베아트리체였다.
그녀는 단테의 짝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테에게 보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테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이 만남이 전부였다.
단테(Dante Alighieri)와 베아트리체(Beatrice)의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의 만남, Henry Holiday – Dante and Beatrice, Image – Henry Holiday (1839 – 1927)
몰락한 귀족의 아들인 단테가 당시 피렌체 최고의 가문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과 인연을 맺기는 불가능했던 게 당시 냉혹한 상황이었다.
단테는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마음에 품은 채 당시 사회 관례대로 1285년 어린 나이에 약혼했던 젬마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 지 2년만이었다.
베아트리체 역시 1287년 피렌체의 부자 가문이자 은행가였던 시모네 디 바르디와 결혼을 한다. 그렇지만 베아트리체는 1290년 6월 8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베아트리체 죽음 당시 단테의 꿈, Dante’s Dream of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1871, Walker Art Gallery,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문학 수업에 열중하던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와의 첫사랑,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랑은 단테에게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단테가 온갖 열정을 다해 쓴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숭고한 사랑, 신에 버금가는 고귀한 존재 , 구원자로 재창조해 그의 사랑을 예술속에서 영원하게 만들었다.
“나는 베아트리체. 그대가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곳에서 왔어요. 사랑이 날 이곳까지 이끌었지요. 내가 주 앞에 설 때 당신을 칭찬해 드리겠나이다.”
아래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위해 바친 시 ‘사랑의 노래’의 귀절이다.
“나의 아씨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도 싫도록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지긋이 바라보리라. 그를 바라보며 복이 있도록 드높은 곳 환한 밝음 속에서 오직 신을 우러러 축복 받는 천사와도 같이 내 비록 한낱 인간이건만 내 마음의 주님을 우러러 보면 천사에 못지않게 축복을 받고 솟아오르는 넋을 퍼덕이리라. 이런 힘이 그에게 있거니 남은 모를지라도 그를 바라 그리운 나는 아노라.” –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리라 –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코시모 1세》(바르젤로미술관) 《빈도 알토비티:Bindo Altoviti》(루브르미술관) 《퐁텐블로의 님프》(루브르미술관)《황금의 소금 상자》(빈미술사미술관) 《나르시스》 《페르세우스상(像)》등이 있다.
그는 고전주의적이고 능숙한 장식성이 보이는 금세공품을 제작했고 후에 모뉴멘탈한 조각을 제작했다. 그는 미켈란첼로의 애제자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under Loggia dei Lanzi, Florence, Image – Paolo Villa
그의 작품에서 라파엘로의 우아함과 미켈란젤로의 웅대함 같은 16세기의 이탈리아 최성기 르네상스 고전예술의 영향을 받으면서, 마니에리스모의 주관주의로 옮겨가며, 세부 표현에 기술자적인 기교를 보인 점에서, 후기 르네상스적 성격을 가진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기존 도덕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행동과 성격의 소유자로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의 예술성있는 작품들이 단점을 커버하는 것 같다.
베키오다리는 금세공업자들의 공간으로 피렌체 출생의 대표적인 금속공예가라 할수있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동상이 설립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석양의 베키오다리
베키오다리는 피렌체 중심을 가르고 흐르는 아르노강(Arno)의 한 폭판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으로 유명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덩달아 화려한 야경으로도 유명하다.
미켈란첼로광장(Piazzale Michelangelo) 석양을 보고 내려오면서 담아보았던 석양 무렵의 베키오다리 풍경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연말의 베키오다리 삼점들은 대부분 휴가를 떠난 상태라서 조금 아쉬운 느김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전부 영업을 하고 있어 불이 전부 다 들어왔다고해서 엄청난 명작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지만 조금은 더 풍성한 석양 무렵의 풍경을 담지 않았을까?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야경이 아름다운 미켈란첼로 광장, 황혼 무렵의 베키오다리 세로사진, Image – Choi dongsoon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야경이 아름다운 미켈란첼로 광장, 황혼 무렵의 베키오다리, Image – Choi dongsoon
아래는 이번 여행에서 담은 사진은 아니지만 베키오다리의 진한 석양 풍경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라 여기 소개해 본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이미지도 있고 새롭게 소개하는 이미지도 있다. 역시 사진을 잘 담는 사람들이 참으로 먾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는 순간이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석양 풍경, Sunset of Ponte Vecchio, Firenze, Italy, Image – 27707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베키오다리(Ponte Vecchio)가 보이는 풍경, Ponte Vecchio, Firenze, Italy, Image – mark-boss
미켈란첼로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서 바라본 베키오다리를 비롯한 아르노강이 보이는 피렌체 풍경이다. 지금 보니 뭐가 풍성함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야경이 아름다운 미켈란첼로 광장, 미켈란첼로광장에서 바라본 아르노강과 베키오다리 풍경, Image – Choi dongsoon
손각대로 담아본 베키오다리 야경
저녁 무렵 피렌체를 가족들과 돌아다니며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를 건너게 되었다.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베키오다리는 생각보다는 운치가 있어서 손각대로 베키오다리 야경을 담아 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무리해서 삼각대를 가지고 떠났지만 항상 들고 다닐 수 없어서 호텔에 두고 나왔는데 삼각대를 아쉬워하면서 담아 보았던 베키오다리 야경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