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Dante Alighieri)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피렌체를 보다 풍성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마찬가지로 미켈란첼로(Michelangelo)의 사랑이야기도 르네상스 예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 조각, 화화 그리고 건축에서 걸작을 남긴 미켈란첼로
미켈란첼로(Michelangelo)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 작품인 ‘다비드’를 남겼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 작품인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Sistine Chapel ceiling)’를 그렸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물중의 하나 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깊이 관여하였다.
결국 미켈란첼로는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이라는 조형 예술의 3대 장르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긴 셈이다. 이는 범인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는 당시 사람들이 미켈란첼로(Michelangelo)를 칭했다는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2. 미켈란첼로((Michelangelo)와 카발리에리(Tomaso de cavalieri)의 사랑
아름다운 모든 것을 사랑했던 미켈란첼로(Michelangelo)는 그 중에서 예술과 음악과 학문에 몰두하는 아름다운 청년들에 매혹 당했다고 한다.
당시 가치관의 주류를 이루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중에는 ‘예쁜게 착한 것이다.’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르네상스 예술을 주도했던 많은 예술가들이 동성애에 빠졌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 당대의 유명한 예술인들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미켈란첼로(Michelangelo)도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어 게라르도 페리니, 페보 디 포기오 같은 눈부신 외모의 청년들을 조수로 고용해 작품 활동을 했다.
또한 아름다운 여인을 묘사해야하는 작업에도 여자가 아닌 아름다운 미소년을 모델로 작업했다. 대표적으로 메디치가의 묘실을 장식하기 위해 ‘밤’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조각 작품을 제작 시도 남자를 모델로 활용했다고 한다.
2.1. 35살 어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를 만나다.
이러한 동성애적 사랑이 절정에 이른것이 1532년 미켈란첼로가 57세 되던 해 23세의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를 소개받은 후 부터였다.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는 탄탄한 육체는 물론 세련된 매너와 고상한 성품을 가지면서도 비범한 지성과 함께 예술에 깊이 빠져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꼈다.
미켈란첼로(Michelangelo)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에게 수많은 소네트(Sonnet)를 보내며 사랑을 호소했다.
“내가 너만을 사랑한다고, 내 신사여. 흥분하지 말아다오. 네게서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것, 네 미모에서 배우는 것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네. 우선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하네.”
“식음을 잊는 것이 그대의 이름을 잊는 것보다 훨씬 쉽다오. 초라하게도 음식은 단지 우리의 육신을 지탱할 뿐이지만 그대의 이름은 나의 육신과 정신 모두를 부양한다오.”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마치 굶주린 자의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을 때, 길에서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면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일시에 가라앉지요..”
미켈란첼로((Michelangelo)와 카발리에리(Tomaso de cavalieri)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동성애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미켈란첼로((Michelangelo)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 활동에 사용했으며 굉장한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젊은 청년들에게 쏟아 부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역사가들은 미켈란첼로((Michelangelo)와 카발리에리(Tomaso de cavalieri)의 관계를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무튼 그들의 관계는 32년간이나 계속되었고, 1564년 90세의 미켈란첼로는 카발리에리의 품안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비록 동성이었지만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죽을 수 있었으니 미켈란첼로의 말년은 그리 불행하지는 않았던 듯
2.2. 미켈란첼로(Michelangelo)의 소네트
미켈란첼로(Michelangelo)가 세상을 뜬지 60여년이 지난 1623년 미켈란첼로 조카의 아들이 우연히 미켈란첼로의 육필 원고를 발견한다.
이 육필 원고를 발견한 조카의 아들은 두번 놀라게 되는데,
우선 미켈란첼로의 소네트 시귀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던 것이다. 미켈란첼로가 시인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었음으로 시인으로서 미켈란첼로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다음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소네트의 대상이 모두 남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알려지면 미켈란첼로 명성이 허물어질 뿐만이 아니라 온 가문의 수치꺼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냥 묻어두기에는 너무도 너무도 아름다운 소네트들이었기 때문에 고심끝에 소네트의 대상을 남자가 아닌 여성으로 바꾸어 출판했다.
미켈란첼로(Michelangelo)의 소네트가 세상에 나오자 조각, 회화 및 거축에 이어서 시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명성이 한층 높아졌지만 이후 250년동안 미켈란첼로(Michelangelo)의 동성애 사실은 감춰지게 되었다.
미켈란첼로(Michelangelo)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겨우 인정되었다.
2.3. 미켈란첼로(Michelangelo) 작품속에 반영된 미소년 사랑
아름다운 남자를 사랑한 미켈란첼로(Michelangelo)는 그의 작품 곳곳에 이러한 특성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첼로(Michelangelo)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가니메데스의 납치(The Abduction of Ganymede)
미켈란첼로(Michelangelo)가 스케치한 ‘가니메데스의 납치(The Abduction of Ganymede)’는 원래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가 독수리로 분해서 미소년으로 유명했던 가니메세스를 납치하는 내용인데 미켈란첼로(Michelangelo)는 가니메세스를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드림(The Dream)
1533년, 미켈란첼로(Michelangelo)가 스케치 후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에게 보냈던 작품 드림, The Dream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
미켈란첼로(Michelangelo)는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에서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를 건장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레다(Study of the Head of Leda)
미켈란첼로(Michelangelo)가 1529년 그린 레다의 머리를 스케치할 때 여성 모델이 아니라 남성 모델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예쁘긴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남성적인 느낌이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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