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발상과 추진력, 그리고 大運의 사람들 이야기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ironheel@chosun.com)
1 .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상품들
신인섭 한림대 객원교수는 작년 5월 「박카스 40년-그 神話와 광고 이야기」(나남출판刊)라는 책을 내놓았다.
회사의 社史도 아니고, 특정 상품의 역사를 담은 책이 나왔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카스는 1963년 처음 나온 이래 2000년 말까지 123억7691만6000여 병이 팔려나갔고, 延매출액만 2조 536억원에 달한다.
박카스의 성공에 힘입어 1967년 제약업계 1위로 올라선 이래 동아제약은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지금도 박카스는 동아제약 매출액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박카스의 이러한 성공이 얼마나 이례적인지는 매년 시장에 나오는 상품들의 성공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시장에 나오는 새로운 상품은 약 2만 種(종) 정도, 그 가운데 시장 진입에 성공하는 제품은 200種 정도라고 한다. 즉 새로운 상품의 성공률은 1%인 셈이다. 일단 시장 진입에 성공한 상품들 가운데 3년 간 지속적으로 성공 상품이 되는 것은 20種 남짓이라고 한다. 결국 매년 약 2만 種의 새로운 상품이 시장에 나오지만, 시장에서 성공하고 꾸준하게 상품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전체의 0.1%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작년 12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는 민간연구소·대학·광고업계 등에 종사하는 전문가들과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 선정된 「2001년 10大 히트상품」을 발표했다(표1).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는 영화 「친구」가 꼽혔다. (주)SK의 OK캐쉬백, 롯데 자일리톨껌, 삼성전자 콤보, TV 홈쇼핑, 르노삼성자동차의 SM5, 대형평면TV, 아바타, 종신보험, 브랜드쌀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10大 상품을 보면 전통적인 工産品에서부터 인터넷 서비스(아바타), 유통 서비스(TV홈쇼핑·OK 캐쉬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상품의 품목과 분야가 다양한 만큼 이들 상품들에 공통되는 특성을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권성용 연구원은 『상품 그 자체 못지 않게 시대의 흐름(트렌드)을 보여 주는 상품들이 선정되었다』면서 이번에 선정된 상품들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었다.
첫째,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시 기술이 바탕이 되는 상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콤보, SM5, 대형평면TV, 브랜드쌀 등).
둘째, 口傳 광고 효과에 힘입은 상품들이 많다
(「친구」, 자일리톨껌, SM5, 아바타, 종신보험 등).
권성용 연구원이나 경영 및 브랜드 컨설팅 회사인 「브랜드&컴퍼니」의 이상민 사장은 『소비자들은 더 이상 광고를 믿지 않는 반면, 상품에 대한 「체험」을 중요시한다』고 입을 모았다.
셋째,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 부가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複合(복합) 기능의 상품들이 많이 선정되었다
(콤보, 자일리톨껌, 브랜드쌀 등).
넷째, 5∼6년 전에 비하면 문화상품들이 많이 선정된 것이 특징적이다
(「친구」, 아바타 등). 종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성격 규명이 모호한 상품들이 눈에 띈다 (OK 캐쉬백, 아바타 등). 권성용 연구원은 『히트 상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트렌스 젠더 연예인 하리수까지 거론되었다』면서 『앞으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섯째, 건강·안전과 관련된 상품들이 많다(자일리톨껌, 브랜드쌀, 종신보험, SM5 등).
이상민 사장은 이들 10大 상품의 공통적 특징에 대해 『제품의 特長點이 뚜렷해 다른 제품들과 명확하게 차별화되는 상품들로, 소비자들의 1차적인 욕구 이상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상품들』이라고 평가했다.
10大 히트 상품에 나타난 이러한 특성은 일본의 경향(日經비즈니스, 주간 다이아몬드 선정)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표2).
한국인의 정서에 호소(「친구」 등)하거나 한국적 현실에 맞는다는 점(TV홈쇼핑 등), 제작·기술 개발이나 마케팅에 대한 과감한 투자(「친구」, 자일리톨껌, SM5, OK 캐쉬백 등) 등도 히트 상품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 . 「친구」
머리보다 가슴으로 만든 영화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는 지난 한 해 전국에서 8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최고 흥행기록을 수립했다. 이는 종전 영화 「쉬리」의 560만 명, 「JSA 공동경비구역」의 530만 명을 가볍게 뛰어넘는 기록이다.
「친구」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쉬리」 이후 한국 영화의 質的 성장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01년 한국 영화 관람객 수는 4073만 명으로 전년보다 79.3%가 증가했다.
「친구」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곽경택 감독은 「친구」 이전에 「억수탕」,「닥터K」 등을 만들었다. 「억수탕」은 비평가들로부터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고, 「닥터K」는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실패했다. 이에 대해 곽경택 감독은 『세계 시장에서 어떤 영화가 먹힐까 하는 고민 끝에 가슴보다는 머리로 만든 작품이었다. 자꾸 이야기를 기획 아이템으로 접근하려고만 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러한 반성 위에서 곽경택 감독은 마음속에 간직해 왔던 자기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영화에서처럼 네 명의 친구들이 모두 고등학교 동창은 아니었지만, 영화 속 네 명의 친구들은 곽감독과 그의 친구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한다. 유오성이 扮(분)했던 깡패 준석은 현재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동건이 맡았던 영화 속 동수와는 그리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준석과 동수에 해당하는 실존 인물들은 서로 다른 조직에 몸담기 전에는 무척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영화 속의 모범생 상택이 바로 곽감독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한때 방황하던 상택이 준석을 찾아갔을 때 준석이 『네가 가출하자고 나오면 내가 좋다고 할 줄 알았나. 돌아가라』며 상택을 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영화를 만들기 전 곽감독은 준석의 실존 모델인 친구에게 양해를 구했고, 배우들과 수감 중인 그를 면회 가기도 했다고 한다.
30~40代 정서 자극
투자사가 부도를 내고 배우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친구」는 몇 번 무산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개봉하자 정치권 등 기성 세대에 대한 실망감, 경제 침체 등으로 답답해 하던 사회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組暴(조폭) 영화 붐을 선도했다. 사회의 復古 분위기도 도움이 되었다.
영화 제작 과정 전반을 지켜보았던 양중경 「盡人事(진인사 ; 곽경택 감독이 만든 영화사)」 사장은 지금까지 문화에 소외되었던 지방민들과 30∼40代 남성들의 정서를 자극한 것을 영화의 성공 요인으로 들었다.
『처음에는 영화 속의 부산 사투리를 다른 지역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서울과는 다른 지방만의 그 무엇을 보여 줌으로써 단순히 부산뿐 아니라 전국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지금의 30∼40代 남성들은 어린 시절 남자다움, 권위 등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으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러한 것들을 잊고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친구」에 나타나는 폭력, 걸쭉한 부산 사투리, 여성비하적이기까지 한 거침 없는 말투 등은 30∼40代 남성들에게 잊고 살았던 가치들을 대리만족시켜 주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들의 어린 시절 鄕愁(향수)를 자극한 것도 성공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3 . OK 캐쉬백
販促 수단에서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주)SK의 OK 캐쉬백 서비스는 가맹점에서 물건을 구매한 금액의 일정 비율을 포인트로 적립, 다른 가맹점에서 활용하거나, 현금으로 돌려받는 서비스이다.
OK 캐쉬백 서비스는 1997년 3월 엔크린 보너스 카드로 출발했다. 이때만 해도 엔크린 보너스 카드는 주유소에서 엔크린 휘발유를 注油(주유)하는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한 단순한 마일리지 프로그램의 일종이었다.
한편 1996년 9월 이래 (주)SK에서는 최태원 복합네트워크프로젝트추진팀장 (現 SK 회장)의 지휘 아래 석유 사업 이외 분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석유 사업은 국제 油價에 의해 수익성이 좌우될 뿐 아니라, 이윤이 박하기 때문이었다. 복합네트워크 사업팀 內 신규사업개발 담당자들은 (주)SK가 보유한 모든 「자원」들을 검토하여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한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신규사업들을 연구했다. OK 캐쉬백은 이때 나온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였다.
기업이 보유한 「자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 SK에 충성도가 높은 단골 고객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SK에서도 고객들에게 뭔가 줄 것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정유회사인 SK에서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고객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반대급부가 거의 없었다. 이때 다양한 업체들과 제휴하여 SK와 그들 사이에 마일리지를 共有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OK 캐쉬백 개발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양인석 OK 캐쉬백 마케팅 팀장의 말이다.
『종전의 마일리지 시스템 아래서는 SK 주유소에서 엔크린을 注油해서 일정한 포인트가 쌓이면 받은 포인트를 가지고 사은품과 교환하는 등 SK주유소에서만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OK캐쉬백 시스템 아래서는 SK주유소에서 쌓은 포인트를 가지고 OK 캐쉬백 가맹점인 버거킹에 가서 햄버거를 사 먹는 데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구요』
OK 캐쉬백 서비스는 처음에는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販促(판촉) 수단이었던 셈이다. 1999년 6월 시작된 OK캐쉬백 서비스는 같은 해 11월 엔크린 보너스 회원들을 흡수했다. OK 캐쉬백 서비스가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 SK 텔레콤 회원들을 흡수하면서부터였다.
양인석 팀장 자신이 OK 캐쉬백 서비스가 어떤 업종에 속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OK 캐쉬백 서비스는 생소한 상품-혹은 비즈니스 모델-이다. 소비자는 OK 캐쉬백 서비스를 이용, 할인 혜택을 볼 수 있다지만, 가맹점이나 SK는 어떤 이득을 볼 수 있을까?
개발자 자신도 어떤 업종인지 몰라
가맹사들은 단골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자신들이 직접 고객들의 마일리지를 관리하는 대신 이 부분을 (주)SK에 아웃 소싱(Out Sourcing·外注)한다는 의미도 있다. 신용카드社는 수수료 수입이 증가하게 된다.
(주)SK는 가맹사들로부터 받는 수수료 수입 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1700만 명에 달하는 고객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마케팅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OK 캐쉬백은 가격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고객들의 소비 행태·선호도 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주)SK에서는 이들 고객들을 대상으로 OK라는 브랜드(Sub Brand)를 붙인 쌀·生食·인터넷 복권·여행상품 등을 판매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주)SK는 더 이상 精油회사가 아니라 종합마케팅 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주)SK가 1500억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가며 광고 등을 통해 「OK 캐쉬백」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여 온 것은 바로 이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투자였던 셈이다.
2002년 1월 현재 OK 캐쉬백 회원수는 1700만 명을 넘어섰다. 종로서적·E마트·버거킹·KFC 등 5만여 곳의 업소가 가맹점으로 가입해 있다.
인터넷 상에서는 e-현대백화점(인터넷 쇼핑), 넷츠고·세이클럽·프리챌(인터넷 커뮤니티·채팅 사이트), 예스24·알라딘(인터넷 서점) 등 200여 곳이 가입해 있다.
이들 업소에서 OK 캐쉬백을 이용해서 구매를 하면 물건값의 0.2∼10%(일반적으로 3%)에 해당하는 포인트가 적립된다. 특히 OK 캐쉬백 가맹점들을 이용하면서 쌓인 점수를 인터넷 상에서의 少額(소액) 결제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면서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회원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OK 캐쉬백 서비스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다양한 점포들을 이용, 일상 생활에서 포인트를 축적할 수 있고, 그 포인트를 바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OK 캐쉬백 서비스에도 아직 한계는 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반적인 마일리지 제도에 비해서는 포인트의 사용 범위가 넓고, 주어지는 혜택이 많다고는 하지만, 축적된 포인트를 현금으로 돌려받기 위해서는 5만 포인트 이상을 축적해야 한다. 상품 구매시 평균적으로 3%의 포인트를 쌓게 된다고 했을 때 OK 캐쉬백 가맹점에서 150만원 이상을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주)SK의 입장에서도 17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그들의 소비행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을 축적해 가고는 있지만, 금년부터는 이 정보들을 어떻게 가공하고, 상업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OK 캐쉬백 서비스는 작년에 80억원의 赤字를 냈으며, 금년부터 黑字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4 . 롯데 자일리톨껌
제과업계 최초로 月매출 100억원 돌파
2000년 5월 시장에 등장, 제과업계 최초로 月매출 100억원을 돌파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끈 롯데 「자일리톨」껌이 오래 전에 한번 시장에 등장했던 상품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1990년대에 들어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설탕이 든 식품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발맞춰 해태제과에서는 1995년 무설탕껌 「덴티Q」를 내놓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덴티Q는 언론매체 등에서 선정한 그 해의 히트상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설탕 대신 甘味料로 사용한 솔비톨의 糖度(당도)가 설탕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덴티Q는 과자류에서는 「건강보다 맛이 우선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여기서 교훈을 얻어 롯데제과에서는 1997년 糖度는 설탕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치아에 손상을 주지 않고, 씹을 때 특유의 시원한 느낌을 주는 자일리톨을 甘味料로 사용한 「자일리톨F」껌을 내놓았다. 김용택 상무는 『甘味料를 설탕에서 자일리톨로 대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품 개발과정에서 기술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다만 설탕이 ㎏당 600원 하는 데 비해, 자일리톨은 ㎏당 5000∼7000원이나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자일리톨F」는 여섯 달 만에 시장에서 退出당하고 말았다. 가격이 너무 비쌌고(일반껌 300원, 자일리톨F 500원), 국내법상 식품에 대해 효능광고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제품의 特長點(특장점)을 부각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退出상품의 再起
시장에서는 退出당했지만 김용택 상무 등 자일리톨껌 개발진들은 제품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김용택 상무의 말이다.
『일본 롯데에서도 한국과 동시에 자일리톨껌을 내놓았는데, 일본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어요. 물론 일본에서는 일반껌이 100엔할 때 자일리톨껌은 120엔을 받음으로써 가격에 대한 저항이 적었던 이유도 있지만…. 국내에서도 완전히 시장에서 철수하지는 않고 편의점 「세븐 일레븐」에서는 계속 팔았는데, 많지는 않아도 꾸준히 팔려나갔습니다. 결국 제품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마케팅에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죠』
본격적인 제품 出市에 앞선 2000년 1월, 롯데제과는 서울 강남 지역의 치과병원을 중심으로 자일리톨껌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몇몇 신문에서 「한 통에 2만원짜리 껌이 나왔다」고 보도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치과를 중심으로 자일리톨껌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0년 4월 SBS TV에서 핀란드에 대한 방송을 하면서 자일리톨에 대해 다루자, 駐韓 핀란드 대사관에는 자일리톨에 대해 묻는 전화가 폭주했다고 한다.
6월이 「口腔(구강) 건강의 달」임을 의식, 제품의 再출시 시기는 5월로 잡았다. 광고의 컨셉은 「자기 전에 씹는 껌」, 「양치 후에 씹는 껌」으로 잡았다. 하지만 식품의 효능광고를 금지하는 관련 법규 때문에 자일리톨이 충치를 예방한다거나, 양치질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일반껌과는 차별화된 인상을 주기 위해 케이스에 든 코팅껌을 내놓았고, 포장의 형태도 달리했다. 첫 달 매출은 8000만원이었다.
2000년 7월 플라스틱 甁(병)에 든 코팅껌이 나왔다. 병원에서 알약을 담을 때 쓰는 것과 유사한 모양의 병에 담긴 자일리톨껌은 기존의 껌들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제품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103g들이 한 병당 5000원이라는 가격에 대한 저항감은 사라졌다.
이때부터 자일리톨껌의 판매는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2000년 7월에는 10억원, 11월에는 35억원어치의 자일리톨껌이 팔려나갔다. 2001년 9월에는 105억원을 기록, 제과업계 최초로 月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이에 힘입어 롯데제과의 껌시장 점유율은 1999년 末 60%에서 2001년 73%로 급등했다.
5 . 삼성전자 콤보
아날로그와 디지털 고객을 함께 노린다
삼성전자의 「콤보」는 VCR(Video Cassette Recorder)와 DVD(Digital Video Disk, Digital Versatile Disc)의 복합 상품이다. DVD는 보통 영화 한 편에 해당하는 약 135분의 영상과 음성을 담을 수 있는 지름 12cm 크기의 光디스크를 말한다.
DVD는 콤팩트 디스크(CD)와 같은 지름의 디스크에 현행 텔레비전 방송 수준의 화질로 영화를 담을 수 있어 새로운 영상 매체로 각광을 받고 있다.
DVD가 등장하면서 VCR의 수요는 매년 2%씩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DVD 수요는 1998년 이후 11배가 성장했다고 한다. 2001년 세계 시장에서의 VCR 수요는 4500만 대, DVD 수요는 2500만 대였지만, 2004년경에는 DVD가 VCR의 수요를 앞지를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아직까지는 VCR에 익숙한 반면 DVD에는 생소한 사람들, DVD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VCR에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콤보는 이렇듯 기존의 아날로그 고객과 신세대 디지털 고객이 공존하고 있는 과도적 상황을 잘 포착한 제품이다.
콤보의 아이디어는 DVD가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한 1999년경 나왔으나, DVD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높고, 出市된 소프트웨어가 부족해 외국에서 먼저 판매되기 시작했다. 2000년 7월 첫 미국 판매를 시작하였고, 같은 해 末 국내 시장과 유럽 시장에 판매를 시작하였다. 2001년 한 해 동안 약 115만 대의 콤보가 팔려(국내 판매 7만 대) 3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기능이 합쳐진 복합기능 제품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복합기능 제품은 고장이 잦고, 각각의 기능을 가진 개별 제품들을 함께 구입하는 것보다 값이 싼 低價品(저가품)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한국 家電제품의 低價品 이미지 불식
그러나 콤보는 단지 DVD 와 VCR을 단순히 합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DVD의 高화질, 高음질을 버튼 하나만으로 녹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등 두 가지 제품을 결합하되, 1+1=2+α의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DVD·VCD·음악 CD는 물론 MPEG(Moving Picture Experts Group), Video CD, Audio CD 포맷의 CD까지도 再生할 수 있는 互換性(호환성)도 강점이다.
의도적인 高價전략도 제품 성공의 한 요인이 되었다. VCR과 DVD 플레이어의 가격을 합친 것보다 높게 가격을 책정했다. 콤보는 미국의 家電 전문매장에서 미국·일본·유럽·중국製 VCR/DVD복합 제품 가운데 가장 비싼 대당 299달러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들은 콤보의 가장 큰 성과로 「한국産 家電제품은 中低價品」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킨 것을 들고 있다.
콤보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소비자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신제품을 他社보다 한 발 앞서 내놓는 전략(One Step Ahead)이 주효했고, 기술력으로 이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年2500만 대 규모의 DVD 플레이어 세계시장에서 삼성전자는 16%를 점유, 소니에 이어 도시바, 마쓰시다, 파이오니아 등과 함께 2위群을 지키고 있다. 영국(19%), 스페인(16%) 등에서 1등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본 시장에서도 DVD 시장의 10%를 점유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 비데오사업부 申萬容(신만용) 전무는 외국 시장에서의 콤보의 성공에 대해 『현지의 문화와 생활패턴에 맞는 제품을 적시에 개발한 것이 성공요인』이라며 『사용자 편리성을 대폭 개선하고 각 지역에 맞게 색상과 크기 등을 디자인해 공략한 것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국내에서는 아직도 DVD에 대한 가격 부담이 크고(60만원 前後), 비디오에 비해 볼 만한 영상물이 그리 많지 않아 업체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는 성장 속도가 빠르지 않다. 다만 DVD의 高화질, 高음질에 매료된 젊은층을 중심으로 DVD 마니아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DVD房도 늘어나고 있다.
6 . TV홈쇼핑
39쇼핑, TV 홈쇼핑의 본질을 먼저 이해
TV홈쇼핑 선두 업체인 「LG홈쇼핑」은 작년에 매출이 1조원을 돌파했다. 2위인 「CJ쇼핑」은 약 8000억원의 年매출. 백화점 업계에서 30년 걸린 1조원 高地를 TV홈쇼핑은 6년 만에 달성한 것이다. TV홈쇼핑 시장은 1995년 8월 등장 이후 매년 두 배씩 성장하고 있으며, 시장 규모는 2조원을 상회한다 (백화점은 16조원, 할인점은 14조원 규모). TV홈쇼핑 시장이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이면에는 LG홈쇼핑과 CJ쇼핑(舊 39쇼핑)의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39쇼핑」이었다.
초기부터 CJ쇼핑에 근무했던 이 회사 윤성용 방송제작사업부장의 회고에 의하면, 39쇼핑이 기선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39쇼핑이 경쟁사에 비해 「홈쇼핑」이라는 사업의 개념을 먼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39통상」이라는 섬유류 수출회사를 경영하면서 미국의 TV홈쇼핑 업체인 「QVC」에 물건을 납품했던 박경홍 초대 사장은 TV를 통해 장사를 한다는 데 충격을 받았고, 언젠가는 반드시 TV홈쇼핑을 해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94년 정부가 케이블TV 방송 실시를 발표하자 박경홍 사장은 하나은행·조흥은행·농수축협·애경·두산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사업권을 따냈다. 무명의 중소기업에 불과한 39쇼핑이 사업권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은 39쇼핑이 TV홈쇼핑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부장의 말이다.
『TV홈쇼핑은 방송·관리·物流(물류)·電算(전산)시스템이 하나가 되는 複合(복합) 기업입니다. 당시 다른 회사들에서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면서 TV홈쇼핑을 「방송」이라는 차원에서만 접근, 방송 시설이나 기자재, 인력들을 어떻게 확보하겠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유통업」이라는 관점에서 物流나 소비자 보호 등에 중점을 두고 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시 유통업 전문가들은 TV홈쇼핑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宅配(택배) 시스템과 신용카드 사용이 활성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TV홈쇼핑은 2∼3년 후에야 본격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에 따라 39쇼핑에서도 당초에는 케이블TV 채널을 통해 일반 광고방송을 내보내는 식의 소극적인 생존전략을 모색했다.
그러나 LG그룹이 TV홈쇼핑 시장에 뛰어들면서 39쇼핑은 전략을 적극적인 쪽으로 전환했다. 윤부장은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그 여건을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少數 정예 인력에 비용은 최대한 줄여
『그때까지만 해도 대형 物流사업 위주였던 대한통운을 찾아가 미국의 TV홈쇼핑 시장이 발전해 온 역사를 얘기하면서 설득했어요. 당시 대한통운에서는 한 件당 1만8000원 정도의 운송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 비용을 4000∼5000원 수준으로 낮추자니 처음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다행히 대한통운도 宅配 사업에는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작은 이익을 탐하다가 시장을 죽일 것이냐, 우리를 도와 주고 시장을 키울 것이냐」고 설득하자 결단을 내리더군요. 신용카드 쪽은 참여 업체 가운데 하나은행·조흥은행 등이 카드 사업의 경험이 있고, TV홈쇼핑의 사업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인력은 少數정예 위주로 확보했다. 백화점에서 물건 구매를 담당하는 바이어(Buyer) 출신들은 뽑지 않았다. 백화점이라는 우월적 위치에 서서 일해 온 바이어들은 좋은 상품을 발굴해 내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상품 기획 능력이 우수한 소규모 팬시 상품 개발업체 인력이나, 상품을 발굴하고 판매하는 능력이 있는 종합상사 출신자들을 뽑았다. 이들에게는 「상품 기획, 시장 조사, 상품 발굴, 판매 등을 일괄해서 다루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머천다이저(Merchandiser)」라는 이름이 붙었다.
방송 관련 시설이나 인력에 대한 투자는 최소화했다. 朴사장도 처음에는 기존 방송국에서 PD를 한 사람 스카우트하기로 했었다. 그 PD는 방송을 하려면 200억원대의 스튜디오 시설과 기자재, 200명 이상의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때 美QVC를 통해 소개받은 TV홈쇼핑 업체 키셀포드社 관계자들이 입국했다. 이들은 TV홈쇼핑 프로그램은 일기예보방송처럼 단순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방송관련 투자와 관련해서 스튜디오·장비는 70억원, 인력은 30∼40명이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PD도 공중파 TV에서처럼 연기자들의 몸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지시하는 PD는 필요없다고 했다. 朴사장은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하기로 했던 방송사 PD에게 전화를 걸어 스카우트를 없던 일로 했다. 리모콘 카메라를 도입, 카메라맨도 최소 인원으로 줄였다. 기본 방송사에서는 프로그램당 103명의 인력이 투입되는 데 비해, 39쇼핑에서는 6∼7명이 투입되었다.
윤성용 부장은 『홈쇼핑에 대해서는 白紙 상태였던 우리 눈에는 키셀포드社 사람들은 모두 시나이山에서 내려온 모세처럼 보였다. 그들의 말은 바로 성경이었다』고 말했다.
사원들은 39쇼핑 출범과 함께 입사한 신입사원들이었고, 사장의 나이도 젊었다. 모두 키셀포드社 관계자들의 조언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다. 어려움이 닥쳐도 기발한 임기응변으로 헤쳐 나갔다. 윤부장의 얘기다.
『소니 카메라를 들여오기로 했는데 수입 금지 품목으로 묶여 있는 거예요. 그런데 관련 규정을 살펴보니 방송중계차는 수입이 가능하더군요. 미국에서 제일 큰 방송중계차를 하나 사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카메라들을 모두 그 안에 넣고 「중계차」로 수입했어요』
그때 사온 중계차는 단 한 번도 운행을 못 하고 한동안 회사 주차장에 세워두었다가 팔아버렸는데, 지금 한강 고수부지에서 우동집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아이디어 싸움에서 승리
공중파 TV의 스튜디오는 보통 8m 높이에 최하 200평 이상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39쇼핑에서는 일반 사무실 건물의 공간을 스튜디오로 활용해서 스튜디오 시설 투자 비용을 줄였다. 物流 창고로는 39통상 소유의 공장 건물을 활용했다.
방송이나 신문 광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언론사에 뉴스거리를 자주 제공해서, 39쇼핑이 자연스럽게 매스컴을 타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TV홈쇼핑에서 개도 사고 판다」는 식의 보도자료를 만들어 언론사에 제공하는 식이었다.
반면에 「한국홈쇼핑」(現 LG홈쇼핑)은 이무렵 많은 부분에서 39쇼핑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梁勝煥(양승환) LG홈쇼핑 부장(EC상품기획1팀장)은 『케이블 TV를 이용해서 장사를 해 보겠다는 정도의 생각이었지, 39쇼핑만큼 홈쇼핑 개념에 대한 이해나 사업성에 대한 확신이 철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력도 LG그룹內 다른 계열사들에서 차출했다. 電算 시스템 구축 등에도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梁부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본을 믿고 방만한 투자를 했으며, 조직·인력관리 면에서도 엉성한 점이 많았다. 의사결정도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인정했다.
39쇼핑은 1995년 8월1일 첫 방송을 내보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39쇼핑 윤부장의 말이다.
『원래 39쇼핑과 한국홈쇼핑(LG홈쇼핑의 前身)은 8월1일부터는 시험 방송만 내 보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한국홈쇼핑에서 8월1일부터 정식 방송을 내보낸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질 수 없어 부랴부랴 녹화 테이프를 꽂아 8월1일부터 정식 방송에 들어갔어요. 사실 한국홈쇼핑에서 8월1일 첫 방송을 내보낸다는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39쇼핑은 시장을 先占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LG홈쇼핑 측의 주장은 다르다. 39쇼핑 측이 의도적으로 약속을 깨고 뒤통수를 친 것으로 여기고 있다. 39쇼핑이 첫 방송이라는 주장도 생방송이 아니어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방송 초기 39쇼핑에서는 독자 브랜드를 붙인 액세서리나 보석류들을 취급하면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케이블 TV 가입자들의 數가 적었고, TV홈쇼핑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케이블 TV 가입자가 적으면 공중파 TV를 이용하면 되잖아』
「케이블 TV 업체가 공중파 TV를 이용해서 TV홈쇼핑을 한다?」 처음엔 모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공중파 TV의 낮 방송은 금지되어 있었다. 낮 시간대에 공중파 TV를 빌려 활용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보다 얼마 전 TV에서 취업박람회를 방송한 것을 援用(원용)해 중소기업 제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소개하는 「중소기업박람회」를 열고, 이를 MBC를 통해 방송하기로 했다.
1998년부터 역전
공중파 TV의 위력은 엄청났다. 「중소기업박람회」가 방송되기 시작하자 39쇼핑 관계자들은 밀려드는 주문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케이블 TV를 통해서는 시간당 20∼30개 정도 팔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MBC 전파를 타자 시간당 수백∼1000개가 팔려나갔습니다. 원래대로 전화로 주문을 받으면서 고객의 주소, 계좌번호 등도 물어볼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 식으로 하다간 코엑스나 무역센터, 인터콘티넨탈 호텔 등 인근 건물들의 전화가 모두 다운될 판이었습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尹부장은 주문을 받는 직원들에게 고객의 이름과 주문받은 상품명, 전화번호만 받아 적도록 했다. 그렇게 접수한 주문서들은 복사 용지 박스에 담아 회사로 보냈다. 주문서를 받은 회사에서는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주문 내용을 확인하고, 주소 등 필요한 내용들을 추가로 받아 적었다. 사장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全직원들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이 일에 매달렸다.
『단 1주일 만에 몇 달치 매출을 올렸습니다. 행사가 끝나던 날, 참가했던 중소기업 사장 가운데는 「덕분에 부도를 면하게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 얼싸안고 환호하는데 한국홈쇼핑 사장이 경질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더군요』
1998년까지 39홈쇼핑은 한국홈쇼핑을 앞서 나갔다. 홈쇼핑 방송에서 볼 수 있는 L字型 자막이나, 해당 상품에 대한 방송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를 보여 주는 타이머 표시 등도 39홈쇼핑이 처음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1998년 초부터 39쇼핑과 LG홈쇼핑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1997년 LG홈쇼핑 사장으로 부임한 崔永載(최영재) 사장은 LG화학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小賣 유통」의 맥을 짚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梁勝煥 부장은 崔사장이 부임하면서 홈쇼핑에서 취급하는 상품에 대한 컨셉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TV홈쇼핑의 모델이 된 미국의 경우 국토가 넓은데다, 7000만 家口 이상이 케이블 TV에 가입해 있습니다. 때문에 TV 홈쇼핑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이 배달이 용이하고, 저소득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低價(저가) 상품들이 많았어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국토는 좁고, 케이블 TV 가입자는 당시 150만 가구 정도로 중산층 이상이 많았습니다. 崔사장님은 단순히 「싸구려」 상품이 아니라, 「高품질에 합리적인 가격의 상품」을 강조했습니다』
회사의 이름도 「LG홈쇼핑」으로 바꾸었다. 梁부장은 『소비자들은 TV홈쇼핑에서 파는 물건의 제조업체를 보고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홈쇼핑 업체를 믿고 물건을 사는 것』이라면서 『초기에 회사 이름을 「한국홈쇼핑」, 그 다음에는 「하이홈쇼핑」으로 했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LG의 브랜드 파워에 힘입어 LG홈쇼핑은 빠른 속도로 39쇼핑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TV 홈쇼핑은 우리 정서에 맞아』
소비자들이 구입 후 한 달 이내에 返品이나 교환을 요구할 때는 이유 불문하고 받아주고, 이 경우에도 고객에게 換拂(환불)을 먼저 한 후 나중에 물건을 돌려받도록 하는 등 對고객 서비스를 강화했다. 사업 아이디어 등에서는 39쇼핑을 벤치마킹,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초기에 電算 시스템 등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던 것도 급증하는 고객관리나 결제 등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반면에 39쇼핑은 이 무렵 시장 규모와 함께 회사가 커지면서 초기의 순발력 있는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느냐, 아니면 회사의 성장에 맞게 기성 기업들의 관리 체제를 도입하느냐 하는 고민에 빠졌다. 1999년 7월에는 보석 상품류를 판매하면서 인조 유리로 만든 보석을 판 사실이 소비자 단체에 의해 밝혀지면서 곤욕을 치렀다.
1999년 10월 박경홍 사장이 자살했다 (당시 39세). 이 무렵 朴사장은 7월에 있었던 가짜 보석사건과 金泳三 前 대통령의 차남 金賢哲씨와의 유착설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섰지만, 朴사장의 젊음과 패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던 39쇼핑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39쇼핑은 2000년 3월 제일제당에 인수되면서 社名도 「CJ39쇼핑」으로 바뀌었다.
현재 TV홈쇼핑 시장은 LG홈쇼핑과 CJ39쇼핑이 6 對 4 정도의 비율로 시장을 분점하고 있다. 작년 9월 「농수산 방송」·「우리 홈쇼핑」·「현대 홈쇼핑」 등이 신규로 뛰어들어 홈쇼핑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梁勝煥 LG홈쇼핑 부장은 TV홈쇼핑이 급성장하는 원인에 대해 『TV홈쇼핑이 우리 국민들의 정서와 한국의 환경에 맞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첫째, 우리 국민들은 남의 말을 잘 믿는 편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귀가 얇은 것이고…. 둘째, 餘暇(여가) 문화·봉사 문화가 낙후되어 있어 TV시청률이 높고, 맞벌이 비율이 낮아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주부들이 많습니다. 셋째, 국토가 좁고 인구 밀도가 높아 物流費 부담이 낮습니다. 이 때문에 소비자가 물류비를 부담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홈쇼핑 회사에서 물류비를 부담할 수 있습니다』
8 . 대형 평면TV
기술력과 고급 브랜드 이미지로 승부
20인치 이상의 대형 평면TV가 국내 TV시장의 주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작년 한 해 대형 TV의 판매는 전체 TV시장의 60%를 웃돌았다.
대형 평면TV는 브라운관 방식이 80만∼200만원, 프로젝션 방식(光學거울, 스크린 등을 이용한 投射방식으로 大화면 영상을 구현한 TV)은 200만∼500만원, PDP(Plasma Disply Pannel) 방식은 800만∼1900만원에 달하는 高價品이다. 소니, 도시바 등 일본 家電업체들이 국내 시장을 공략하고 있으나, 국내 업체의 점유율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 프로젝션 TV의 경우 1997년 국내 업체의 시장점유율은 39%였으나, 2001년에는 71%로 늘어났다. PDP TV의 量産은 일본보다 4년 정도 늦었으나, 2000년 4월 세계 최대의 63인치 HD(High Definition) PDP를 생산하면서 일본을 추월했다. 이는 그동안 국내 家電업체들이 高부가가치 제품 생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형화·평면화·畵質 개선에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대형 평면TV의 마케팅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업 이미지보다는 제품 이미지를 강조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PAVV」, LG전자의 「엑스켄버스」등은 회사名은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하면서 제품名만을 강조하면서 고급 브랜드로 승부를 꾀하고 있다.
2001년 11월 디지털 방송(프로그램의 제작, 전송, 수신 등 全과정이 아날로그이던 것이 디지털로 처리되어 신호의 손상이 없는 고선명 화질은 물론 다양한 부가서비스도 즐길 수 있는 멀티미디어 방송)의 실시와 함께 대형 평면TV의 수요는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8 . 르노 삼성 SM5
『1년 반 만에 다시 살아난 차』
자동차는 일반적으로 고객이 식상하지 않도록 매년 年式을 바꾸거나 2년마다 디자인을 개선한다. 그런 의미에서 르노삼성자동차의 「SM5」는 이례적인 존재이다. 1998년 1월 처음 출시된 모델임에도 해가 갈수록 잘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1만5000대가 팔렸던 SM5는 작년 한 해 동안 7만여 대가 팔렸다.
르노 삼성자동차의 김중희 이사는 自社의 중형승용차 SM5를 두고 『판매 없이 1년 반 이상을 끌다가 다시 살아난 車』라고 말했다.
SM5는 1995년 출범한 삼성자동차가 승용차 시장에 뛰어들면서 1998년 3월 처음 내놓았다. SM5는 1990년대 중반 나온 일본 닛산(日産) 자동차의 베스트셀러 「세피로」(수출명 「맥시마」)를 기본 모델로 한 것이었다.
김중희 이사는 『삼성자동차와 닛산의 제휴는 회사 최상층부에서 경영전략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고, 세피로는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카였다. SM5를 모델로 선정하고, 국내 생산에 들어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새 모델의 이름은 「SM5」로 지어 다른 자동차들과 차별화를 꾀했다.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는 「쏘나타」·「르망」 등 단어를 사용한 命名法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SM5는 회사名의 英文 이니셜과 숫자를 조합해 이름을 지음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을 짓는 벤츠나 BMW처럼 고급車라는 느낌을 주었다.
1997년 IMF 사태가 닥치면서 삼성자동차는 경제위기를 불러 과잉 중복투자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었다. 1998년 말까지만 해도 月3000∼4000대 가량 나가던 SM5는 빅딜이 발표된 1999년 초부터는 매월 약 200대로 판매량이 뚝 떨어졌다. 빅딜될 경우 斷種(단종)될 것을 우려하여 中古자동차 판매상들도 소비자들에게 SM5 구입을 만류할 정도였다. 2000년 4월 삼성자동차는 프랑스의 르노자동차에 매각되었다.
택시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口傳 마케팅
이무렵 그동안 SM5를 사용해 본 개인택시 운전기사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판매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SM5를 열두 시간 운전해도 다른 車 열 시간 운전하는 것보다 피로감을 덜 느낀다」는 얘기가 돌았다. 택시를 두 시간 더 운전하면 하루에 1만5000∼2만원을 더 벌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개인사업자인 개인택시 운전사들은 약간 값이 더 비싸더라도 SM5를 구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2001년 말 현재 SM5 택시는 개인택시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볼 때 자동차에 대한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택시운전기사들 사이에서 SM5가 호평을 받자, 자가용 SM5의 판매도 늘어났다.
실제로 택시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SM5에 대해 호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는 부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택시기사는 『자가용 운전자들과는 달리 우리로서는 車가 정비소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바로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했다.
르노삼성자동차에서는 단순히 이런 자연발생적인 口傳 마케팅에 의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口傳 마케팅」을 조장하고 나섰다. 10만㎞ 이상을 走行한 SM5를 보유하고 있는 車主로부터 차량을 매입, 각 영업장에 배치했다. 소비자들이 직접 그 車들을 試乘(시승)해 보라는 의미였다.
試乘해 본 후 현장에서 구매한 소비자가 70%에 달한다고 한다. 국내 최장인 3년, 6만㎞의 無償 품질보증도 실시하고 있다.
요즘 르노삼성자동차 임직원들은 「엉덩이보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後尾燈(후미등) 등이 파손된 SM5를 발견하면 車번호를 적어 회사 서비스 센터로 알리고, 거기서 다시 해당 車主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캠페인이다. 르노삼성자동차가 외국계 회사라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기업들이 잘 나서지 않는 각종 소규모 문화행사에 스폰서로 나서기도 한다. 르노삼성자동차 관계자들은 이렇게 소비자에게 「정서적」으로 접근하는 마케팅 기법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김중희 이사는 『출범 초기 삼성자동차는 後發 走者라는 한계를 품질로 극복하기 위해 공장시설 등에 많은 투자를 했고, 고급 부품들을 사용했는데, 그 결실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라면서 『엔지니어로서 「車는 3년 정도 타면 바꾸는 것」이라는 운전자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9 . 아바타
인터넷 인형놀이로 1년에 129억원 벌어
본래 「아바타」란 古代 인도에서 「땅에 내려온 神의 化身」을 의미했으나, 오늘날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인터넷 채팅이나 가상현실 게임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캐릭터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보다는 여자 아이들이 두꺼운 종이에 그려진 예쁜 衣裳(의상)들을 가위로 오려 내서 이리저리 붙이던 「인형 옷 갈아 입히기」 놀이를 연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 「인형 옷 갈아 입히기」 놀이가 인터넷 상에서 부활한 것이 바로 아바타(Avatar)이다. 「아바타」란 일종의 사이버 人形인 셈이다.
아바타 서비스를 처음 선보인 「네오 위즈」社의 「세이 클럽」의 경우 이 사이버 인형의 옷 한 벌 값은 1000∼4000원 정도. 캐릭터의 얼굴을 성형수술하는 데는 4000원, 헤어 스타일을 바꾸는 데는 850원, 염색하는 데는 450원이 들어간다. 어른들의 시각에서 보면 어린애 장난 같은 이 인터넷 상에서의 사이버 인형놀이가 작년 한 해 동안 200억원대의 시장을 형성했다.
1999년 7월 「세이 클럽 」은 2000년 인터넷 채팅 열풍을 선도하면서 65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문제는 이 650만 명의 회원들을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유지하면서, 수익을 창출해 내느냐였다. 「세이 클럽」 디자인 팀을 중심으로 아바타 서비스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물론 사이버 상에서의 「인형 옷 갈아 입히기 놀이」에 과연 네티즌들이 비용을 지불할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았다. 2000년 6월부터 「세이 클럽」에서는 무료로 아바타 서비스를 시작했다. 네티즌들의 반응이 좋았다. 같은 해 11월7일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 「네오 위즈」 관계자들은 잘 하면 月300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비스를 시작한 첫 날 「세이 클럽」은 1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해 11월 1억7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한 아바타 서비스는 2001년 3월부터는 月1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작년에 「네오 위즈」는 아바타 판매로 129억원을 벌어들였다. 이는 「네오 위즈」 전체 매출 312억원의 46%에 해당된다. 금년에는 아바타 등 「세이 클럽」 부분의 유료 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을 전체 매출의 86% 로 올릴 것이라고 한다.
아바타 판매와 함께 회원數도 꾸준히 늘었다. 작년 말 현재 회원數는 1400만 명. 이 중 유료회원은 200만 명을 넘는다. 「아바타 의상연구동호회」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도 생겼다고 한다.
原價는 매출의 2% 미만
김영채 「세이 클럽」 사업기획팀장은 아바타 사업이 성공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종전에는 네티즌들이 인터넷 상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아이디(ID)와 별명밖에 없었습니다. 아바타는 그들에게 形像(형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수단이었고, 그 점이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은 것 같습니다』
아바타 서비스 개발자의 한 사람인 김수연(27)씨는 아바타 디자이너 겸 머천다이저(Merchadiser). 유통업계의 머천다이저처럼 아바타 서비스를 이용하는 네티즌들의 트렌드 파악, 상품기획, 시장조사, 디자인, 마케팅, 판매 등을 담당한다. 현재까지 나온 아바타 관련 상품은 5000여 종. 그 가운데 90% 이상이 그녀의 아이디어의 산물이라고 한다.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그녀는 패션 잡지들을 구독하고, 영화관이나 패션 쇼 등을 쫓아다닌다고 한다. 영화제작사와 제휴해서 「달마야 놀자」, 「흑수선」 같은 히트 영화들의 캐릭터를 활용하거나, 「필라」 등 오프라인 업체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현실에서 유행하는 의류 디자인들을 아바타에 활용하기도 한다. 아바타가 일종의 간접광고(PPL·Product Placement)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김수연씨는 『캐릭터는 6週에 하나, 의류는 일주일에 열 벌 정도를 만들어 낸다. 하루에도 옷을 몇 벌씩 디자인해 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에 하나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아바타 디자인 개발은 김씨 등 두 명이 담당하지만, 외부로 아웃 소싱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인건비나, 오프라인 업체에 대한 수수료 등 아바타 디자인 개발에 들어가는 원가는 아바타 매출의 2% 미만이다. 대신 이 아바타들이 활용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채팅 커뮤니티 「세이 클럽」 자체에서는 독자적인 수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김영채 사업기획팀장은 『「세이 클럽」의 기본 서비스는 채팅과 커뮤니티 기능이다. 무료로 제공한다고 해서 기본 서비스를 부실하게 해 놓고 아바타와 같은 유료 상품을 구입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9 . 종신보험
고객의 필요에 맞게 特化
생명보험이라고 하면 이른바 「보험 아줌마」라고 불리는 보험모집인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알음알음으로 보험 가입을 청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험의 내용은 대개 被보험자가 일정 기간 동안 특정한 질환 등으로 사망할 경우 보험금이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푸르덴셜 생명」의 김동훈 팀장은 종신보험이 우리나라 보험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우선 「사람이 죽으면」 사망 원인에 관계없이, 언제 사망하더라도 보험금이 지급된다는 것이 기존의 보험과 다릅니다. 대신 보험금도 기존의 보험 상품(2000만∼5000만원)에 비해 큽니다(1억원 이상).
둘째, 보험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보험가입자의 필요에 따라 합리적인 인생 설계의 일환으로 보험에 가입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보험아줌마」들 대신 「라이프 플래너(Life Planner)」 혹은 「라이프 컨설턴트(Life Consultant)」 등으로 불리는 전문 보험모집 인력들이 보험가입자의 직업과 급여 수준, 재정 상태, 가족 구성, 건강 등에 따라 각자에게 맞는 보험금과 보험료를 산정합니다』
종신보험을 처음 도입한 것은 「라이너 생명」이었지만, 한국 특유의 緣故(연고) 위주의 보험모집 풍토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종신보험을 본격적으로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푸르덴셜 생명이었다. 푸르덴셜 생명은 취급하는 보험 상품을 사실상 종신보험 하나에 국한시키고, 종신보험 판매에 全力을 기울였다. 특히 부유층을 대상으로 「타깃 마케팅」을 전개한 것이 주효했다.
IMF 사태를 겪고, 高齡化(고령화) 사회가 도래하여 장래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면서 종신보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金利가 물가상승률을 밑돌게 되면서 저축성 보험에 대한 매력이 사라진 것도 보장성 보험인 종신보험 확산에 기여했다.
국내 생명보험 회사들도 1999년 이후 金利 변동에 따른 위험을 회피할 수 있고, 고객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다투어 종신보험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한생명」·「교보생명」·「삼성생명」 등 국내 3大 생명보험사의 종신보험 판매 실적을 보면 1999년 1만7000건에 불과했던 신규 계약 건수는 2001년에는 107만4000건으로, 初回 보험료는 61억원에서 4472억원으로 늘어났다.
삼성생명 라이프 컨설턴트 박종석씨에 의하면 삼성생명에서 새로 판매하는 보험 상품 가운데 90% 이상이 종신보험이라고 한다. 종신보험에 癌(암), 각종 성인병, 사고 등에 대비한 몇 가지 特約(특약)을 附加(부가)하면 보험가입자의 死後(사후)는 물론 生前(생전)에 발생할 수 있는 질병, 사고 등에 대해서도 보장이 되기 때문에 기존의 다른 보험 상품들이 존재의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소정의 보험금을 보장하면서 보험사의 채권·증권 투자 운용수익률에 따라 지급되는 보험금이 늘어날 수 있는 變額(변액) 종신보험이 인기를 끌고 있다.
11 . 브랜드쌀
전체 쌀시장의 70% 차지
국민들의 소비 수준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쌀을 구입하면서도 더 맛있는 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기능성 쌀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쌀에도 「브랜드」가 붙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1992년 쌀認證 제도가 도입되면서 백화점을 중심으로 브랜드쌀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1993년 경남 산청에서 재배된 「메뚜기쌀」(무농약 재배로 논에 메뚜기가 산다는 의미)이 브랜드쌀의 효시라고 한다. 1996년 양곡 소매업 자유화 이후 20㎏들이 소포장 쌀이 나오면서 쌀의 브랜드化가 촉진되었다. 2001년末 현재 700여 가지의 브랜드쌀이 난립하고 있으며, 전체 쌀 시장의 70%를 브랜드쌀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브랜드쌀은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예로부터 맛 좋은 쌀로 이름난 여주쌀·이천쌀·철원쌀 등에 브랜드를 붙여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임금님표」(경기 이천産)·「김포금쌀」(경기 김포産)·「대왕님표」(경기 여주産)·「철원 오대쌀」(강원 철원産) 등이 그것이다. 이런 쌀들은 일반미보다 20% 정도 비싸게 팔리고 있다.
여주郡에서는 군수가 「대왕님표쌀」이라는 브랜드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 브랜드는 여주郡 內 10여 개 농업법인회사와 農協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이는 他지역 쌀을 들여다가 精米(정미)만 여주에서 한 후 「대왕님표」 브랜드를 붙여 반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수매와 별도의 품질 등급제도를 두어 쌀의 품질을 관리하거나, 새로운 기능성 쌀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親환경 農法으로 재배하거나, 특수 기능을 추가한 기능성 쌀이 등장하고 있다. 부산에 있는 「풍년농산」은 농업벤처 1호로 선정된 대표적인 기능성 쌀 생산업체다.
羅準淳(나준순) 풍년농산 사장은 1급 기관사로 10년 간 외항선을 탔던 사람이다. 처음 배를 탔을 때 식량·부식의 관리를 담당했던 경험이 농산물 가공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선원 생활을 그만 둔 후 先親이 운영하던 정미소를 물려받은 것이 풍년농산의 시작이었다.
『産地名에 의존하는 브랜드쌀에게는 지금이 위기』
1997년부터 풍년농산은 농민과의 계약 재배를 통해 親환경 農法으로 재배한 쌀들을 내놓았다. 농약을 쓰는 대신 오리를 논에 풀어 놓아 病蟲害(병충해)를 驅除(구제)하는 오리농업으로 지은 「풍년오리농법쌀」, 상수원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경남 기장군 철마 지역에서 低농약 재배된 「메뚜기가 노는 철마쌀」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회사 부설로 쌀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인제大 식품과학부와의 産學 협동 연구를 하도록 했다. 이들은 쌀을 5℃ 상태에서 低溫(저온) 보관할 때 햅쌀과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온수로 쌀을 세척하면 殺菌(살균)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를 활용하여 내놓은 것이 「5℃ 이온쌀」, 「5℃ 이온 씻지 않은 쌀」 등이다. 「5℃ 이온쌀」은 부산지역에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 서울의 대형 할인매장 등에도 등장했다.
풍년농산은 최근 쌀에 金·銀가루를 코팅한 금쌀·은쌀을 내놓았다. 羅사장은 이것이 금·은 성분이 들어간 음식이 몸에 좋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흥미거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각종 의약품 성분을 쌀에 코팅하는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금쌀·은쌀을 만들어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쌀에 다른 성분을 코팅한 쌀은 이미 나오고 있다. 쌀표면에 인삼 성분을 입힌 「헬삼미(Health蔘米)」 등이 이미 시판되고 있는 것이다.
브랜드쌀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삼성경제연구소의 민승규 박사는 『쌀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土壤(토양)·品種(품종)·加功(가공) 세 가지인데, 이 중 토양이나 품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쌀을 어떻게 가공, 보관하느냐에 따라 쌀의 맛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민박사는 『브랜드쌀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 지금이 産地에 바탕을 둔 브랜드쌀들에게는 오히려 위기』라고 말했다. 産地의 명성에 기댄 안이한 마케팅과 함께, 일부에서는 다른 지역의 쌀을 들여다가 精米만 한 후 자기 지역 브랜드를 붙여 시장에 내놓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민박사는 『별다른 특징 없이 産地名에만 의존하는 브랜드쌀들은 쌀시장이 개방되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기능쌀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