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예술가를 만나다] 르네상스 문학 시대를 연 단테를 따라가 본 피렌체

Updated on 2019-02-06 by

피렌체는 곳곳에 르네상스 문학을 낳았던 단테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피렌체가 비록 르네상스 미술과 조각과 당시의 건축물로 유명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르네상스 문학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피렌체 여행을 시작하면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문학에서는 당연히 단테의 이름을 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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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상스 이전의 정치 경제적 배경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이자 14세기 르네상스 문화 시대를 열었던 단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래 간단히 그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정리해 보자.

1.1. 황제파(기벨린당)와 교황 지지파(겔프당)가 충돌하다.

14세기 피렌체는 기벨린당과 겔프당으로 나누어져 격렬하게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극심한 내부 갈등과 긴장이 극도로 높아지자 피렌체 구성원들은 새로운 대안을 열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새로운 대안에 대한 열망이 다른 지역도 아닌 피렌체에서 더욱 더 강력했기 때문에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당시 갈등의 두축인 기벨린당과 겔프당은 각각 유럽의 세속 권력을 상징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을 지지하는 황제파와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는 교황 지지파를 대표한다.

1260년 프랑스가 나폴리를 차지하면서 프랑스와 남부 프랑스인 프로방스, 피렌체가 있는 중부 이탈리아 그리고 나폴리 중심의 남부 이탈리아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프랑스의 정치적 독립을 인정하는 겔프당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 지지파인 겔프당이 득세하면서 이들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난다. 14세기 초부터 교황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흑당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한다고 주장하는 백당으로 나누게 된 것이다.

1.2. 피렌체 경제 발전으로 길드의 세력이 커지다.

그러나 1289년 피렌체 주변에서 그간 중세시대의 근간을 이루었던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수많은 농촌 인구가 피렌체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농촌 인구가 피렌체와 같은 도시로 빠져나가자 기존 농노제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했던 귀족들은 점차 몰락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이들 귀족이 지지했던 기벨린당도 쇠락해졌다.

한편 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자 이들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섬유, 모직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이들 신흥 상인들은 겔프당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겔프당의 세력이 급속히 커져갔다.

그러나 피렌체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신흥 상인들은 점차 길드로 조직화되고, 단순 경제 단위였던 길드는 세력이 커지고 점차 정치적 역량을 키우면서 기존 정치 세력이었던 겔프당은 점차 힘을 잃게 된다.

경제적 단위였던 길드는 피렌체의 정치, 경제, 문화의 기본을 이루는 조직이 되었다. 사람들은 공직에 나가가 위해서라면 길드를 통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단테의 경우 아무런 직업이 없었지만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의사와 약사 길드에 가입했다고 한다.

길드를 통해서 피렌체 시민들은 기존 체계보다는 용이하게 정치 참여가 가능해졌고, 이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시비타스(civitas)’, 즉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시민의식이 기존 중세시대의 갖힌 생각을 깨뜨리고 시민, 즉 인간에 기본한 인본주의적 르네상스가 꽃피울 수 있는 기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단테의 어린 시절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가 그린 단테 초상(Portrait of Dante Alighieri)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가 그린 단테 초상(Portrait of Dante Alighieri)

단테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단테가 사모하던 베아트리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필하기 시작한 ‘새로운 삶(Vita nuova)에서 언급한 내용을 기반으로 1265년 출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정확하게 1300년이 되던 해 단테는 인생의 중간 전환점인 서른 다섯 살에 상상의 지적 여행을 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를 역으로 계산하면 1265년이 나오기에 이 해를 단테가 태어난 해로 추정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에 없기 때문에 피렌체시에서는 그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사들여 단테의 생가 또는 단테 박물관을 만둘었다.

단테 박물관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3. 단테 예술혼의 근원이 된 베아트레체에 대한 사랑

단테의 예술혼은 전적으로 그가 9살때 만난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깨 최고의 러브 스토리로 알려지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대한 사랑과 예술로 승화되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3.1. 아홉살, 운영의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1274년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가 아홉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포르티나리 가문의 축제에 참석했다. 그는 거기서 운명의 소녀 베아트리체(Beatrice, 1226~1290)를 만났다. 그녀와의 만남은 아주 짧았지만 운영처럼 단테의 영혼을 송두리채 빼았아 가고 말았다.

단테는 그의 시집 ‘신생(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 1293)’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 숙명의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던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던 생명의 정신은 너무도 격렬하게 요동쳤으며 작은 맥박소리에도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보아라, 신이 오시어 나보다 더 강하게 나를 압도했도다……”

단체의 영혼을 빼앗아 간 베아트리체(Beatrice)였지만 그녀의 이름도 모른체 헤어지고 만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사랑, 베아트리체 초상, Beatrice Portinari,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베아트리체 초상, Beatrice Portinari,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3.2.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 두번째 조우

세월은 무심히 흘러 9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단테와 베아트레체는 다시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어느 날 단테가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 난간에 기대고 있었는데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방향에서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꿈에도 그리던 베아트리체였다.

그녀는 단테의 짝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테에게 보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테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이 만남이 전부였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사랑, 단테(Dante Alighieri)와 베아트리체(Beatrice)의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의 만남, Henry Holiday - Dante and Beatrice, Image - Henry Holiday (1839 - 1927)
단테(Dante Alighieri)와 베아트리체(Beatrice)의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의 만남, Henry Holiday – Dante and Beatrice, Image – Henry Holiday (1839 – 1927)

몰락한 귀족의 아들인 단테가 당시 피렌체 최고의 가문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과 인연을 맺기는 불가능했던 게 당시 냉혹한 상황이었다.

아래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위해 바친 시 ‘사랑의 노래’의 귀절이다.

“나의 아씨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도 싫도록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지긋이 바라보리라.
그를 바라보며 복이 있도록 드높은 곳 환한 밝음 속에서 오직 신을 우러러 축복 받는 천사와도 같이
내 비록 한낱 인간이건만 내 마음의 주님을 우러러 보면 천사에 못지않게 축복을 받고 솟아오르는 넋을 퍼덕이리라.
이런 힘이 그에게 있거니 남은 모를지라도 그를 바라 그리운 나는 아노라.” –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리라 –

3.3. 정략결혼과 베아트리체의 죽음

단테는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마음에 품은 채 당시 사회 관례대로 1285년 어린 나이에 약혼했던 젬마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산타 트리니타다리(Ponte Santa Trinita)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 지 2년만이었다.

베아트리체 역시 1287년 피렌체의 부자 가문이자 은행가였던 시모네 디 바르디와 결혼을 한다. 그렇지만 베아트리체는 1290년 6월 8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베아트리체 죽음 당시 단테의 꿈,  Dante's Dream of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1871, Walker Art Gallery,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베아트리체 죽음 당시 단테의 꿈, Dante’s Dream of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1871, Walker Art Gallery, Image – Dante Gabriel Rossetti

문학 수업에 열중하던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와의 첫사랑,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랑은 단테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잃은 상실감을 ‘신곡’에서 아래와 같이 회상한다.

그녀가 말햇다. “무슨 사슬이 당신의 길을 막았기에 계속 나아갈 희망을 버려야 했나요?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건들였나요?” 서러운 함숨을 몰아쉬며 나는 대답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내 입술은 가까스로 몇마디를 만들었다. 울먹이며 나는 말했다. “당신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을 때 세상이 내민 헛된 즐거움이 나를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4. 전사로서 단테

앞서 지적한대로 피렌체에서 세력을 강화한 겔프당 내에서 적극적인 교황지지파인 켈프 흑당과 소극적인 교황 지지파인 겔프 백당으로 크게 갈리게 되었다.

단테의 집안은 피렌체에 대한 교황의 개입이나 외부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겔프 백당에 속해 있었다.

단테는 피렌쳉 파견나온 교황청과 프랑스 대사를 홀대함으로 발생한 교황의 분노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겔프 백당의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를 방문했다.

이러는 와중에 프랑스 국왕의 동생이 교황의 사주를 받고 피렌체에 전격적으로 진격해 피렌체의 겔프 백당을 모두 축출하고 단테 가문을 비롯한 겔프 백당에 속한 가문들의 재산을 전부 압수해 버렸다.

그리고 단테등을 반역 혐의로 기소했고, 단테가 재판을 인정하지 않자 궐석 재판으로 2년 유배형과 막대한 벌금형을 내렸다.

당연히 단테는 이러한 재판을 인정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이미 법금 납부없이 피렌체로 돌아올 시 화형에 처한다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단테는 피렌체 땅을 밟지 못하고 21년간에 걸친 유랑을 시작했다.

단테는 라벤나에서 귀도 노벨로(Guido Novello)의 비호를 받으며 그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321년 말라리아로 생애를 마감했다.

5. 베아트리체가 준 강렬한 예술적 영감

단테가 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의 죽음은 단테에게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단테가 온갖 열정을 다해 쓴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숭고한 사랑, 신에 버금가는 고귀한 존재 , 구원자로 재창조해 그의 사랑을 예술속에서 영원하게 만들었다.

“나는 베아트리체. 그대가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곳에서 왔어요. 사랑이 날 이곳까지 이끌었지요. 내가 주 앞에 설 때 당신을 칭찬해 드리겠나이다.”

그는 피렌체를 떠나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이탈리아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단테는 여러 편의 시나 논문을 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다 알고 있듯이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이라는 장엄한 서사시이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단테기념관(MUSEO CASA DI DANTE), 단테 ‘신곡(The Divine Comedy) 오리지널 에디션 , Image – MUSEO CASA DI DANTE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단테기념관(MUSEO CASA DI DANTE), 단테 ‘신곡(The Divine Comedy) 오리지널 에디션 , Image – MUSEO CASA DI DANTE

‘신곡’의 내용은 단테가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베아트리체(Beatrice),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안내를 따라 지옥-연옥-천국으로 여행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로마 국가 서사시인 ‘아이네이스’를 지은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가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보여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그와 같이 같이 지옥과 연옥 여행을 시작한다.

이어 천국에서 베아트리체(Beatrice)를 만나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10녀개의 천국 하늘을 둘러본다. 이어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안내로 신의 성스러운 얼굴을 뵙게 되고, 삼위 일체의 깊은 이치를 깨닫게 된다.

단테의 ‘신곡’은 분명 시대적 한계가 있지만 당시 일반적이었던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토속어로 ‘신곡’ 을 지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있도록 만들어 향후 이탈리아 문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철저히 신을 찬양하는 것만이 지고의 선이었던 시절에 신이 아닌 인간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감정 그리고 인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신에 매몰된 중세에서 빠져나와 상큼한 개인의 감정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르네상스 문학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니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당시의 카톨릭 사상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 받는다.

5. 피렌체에서 단테의 흔적을 찾아보다

피렌체는 단테를 추방하고 그가 외지에서 쓸쓸히 사망하도록 만들었지만 추후에 피렌체는 위대한 시인의 흔적을 피렌체 곳곳에 만들었다.

5.1. 단테를 위한 빈 무덤을 산타 크로체 성당에 만들다.

1321년 단테는 말라리아에 걸려 라벤나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라벤나의 산 피레르 마조레성당에 묻혔다.

단테의 위대함을 알게된 피렌체 사람들은 죽어서라도 그를 피렌체에 모시고 싶어했다. 그러나 라벤나의 산 피레르 마조레성당은 이를 거부했고, 혹시나 있을 피렌체 사람들이 단테의 무덤을 도굴할까봐 가짜 무덤까지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아무튼 단테를 피렌체로 모시는 것이 무산 된 후 1829년 피렌체는 르네상스 천재들이 모셔져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 in Florence)에 단테를 위한 ‘빈 무덤’을 만들고 그를 기리기 시작했다.

산타 크로체 성당의 단테 비문은 ‘신곡’ 지옥편에서 빌려온 아래 문구가 새겨져 있다.

“가장 위대한 시인을 찬양하라.
우리를 떠났던 그의 정신이 귀환하시도다.”

아래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 in Florence) 정면 모습과 왼쪽 출입구에 서 있는 단테 조각상 모습이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 in Florence) 정면 이미지, CC BY-ND Violator1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 in Florence) 정면 이미지, CC BY-ND Violator1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 in Florence) 왼쪽 출입구에 서 있는 단테 조각상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 in Florence) 왼쪽 출입구에 서 있는 단테 조각상

5.2. 피렌체 두오모에서 단테

피렌체 두오모 내부 북쪽 벽면에는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Domenico di Michelino)가 1465년에 그린 ‘단테의 신곡’이 전시되어 있다.’이 그림은 단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피렌체 시민들이 미켈리노에게 주문해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단테는 그가 지은 ‘신곡’을 들고서 책에서 발광하는 빛으로 피렌체를 비추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지옥을 가리키며 경계하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결국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함을 아쉬워하듯 피렌체 성밖에 서서 피렌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소장된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Domenico di Michelino)가 1465년에 그린 '단테의 신곡(La commedia illumina Firenze)'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소장된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Domenico di Michelino)가 1465년에 그린 ‘단테의 신곡(La commedia illumina Firenze)’

5.3. 단테 생가 & 단테 박물관

피렌체 두오모 골목길을 조금 걷다보면 단테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단테의 생가이면서도 단테 박물관(MUSEO CASA DI DANTE)인 곳이다.

피렌체시는 단테 생가라고 추정되는 곳의 건물을 사들여 이를 단테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단테 탄생 700주년이었던 1965년 문을 열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7개 방에 단테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단테의 행적으로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정리해 놓았다.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단테 생가, 단테 박물관, Image - Choi dongsoon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 단테 생가, 단테 박물관, Image – Choi dongsoon
  • 단테박물관 위치 : Via Santa Margherita, 1, 50122 Firenze FI, Italy
  • 단테박물관 연락처
    홈페이지 : museocasadidante.it
    전화번호 : +39 055 219416
  • 단테박물관 운영 시간
    겨울 시즌(11월 ~ 3월) : (화~금)오전 10시 ~ 오후 5시, (토~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월요일은 휴관
    여름 시즌(4월 ~ 10월) : 매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 입장료
    일반인 : 4유로(예전에는 무료였으나 지금은 입장료를 받음)
    학생 및 여행자 그룹 등 : 2유로
    6세 이하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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