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1등 따라잡기◆
‘승부는 곡선 주로에서 갈린다’.
자동차 레이스를 보자. 1등과 2등이 선두 바꿈을 할 때는 거의 곡선 주로에서다.
쇼트트랙 스케이팅 경주에서도 곡선을 파고들어 1위로 올라선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호황일 때 시장 판도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지금 같은 불황기에 ‘스타’가 나게 마련이다.
매경이코노미는 위기를 기회로 삼은 기업들을 심층 분석했다. 40년 만에 남양유업을 턱밑까지 쫓아온 매일유업, 순이익에서 강호 삼성생명을 물리친 교보생명, 영업이익에서 GS홈쇼핑을 따라잡은 CJ오쇼핑을 사례로 꼽았다.
또 유명한 경영학자 짐 콜린스가 분석한 1등 기업의 몰락 과정도 조명했다.
[위기 때 선두 따라잡는 3계명]
■ 1위가 놓친 사각지대를 뚫어라
웨지우드, 울워스그룹, GM, 메릴린치, 트리뷴컴퍼니….
이들 글로벌 기업들의 공통점이 뭘까.
지난해와 올해, 금융위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몰락한 세계 1위의 ‘전통 명가(名家)’들이다.
영국의 명품 도자기 업체 웨지우드는 1759년에 세워져 250년 전통을 자랑한다.
그러나 매출 급감으로 올해 1월 문을 닫았다.
영국 전역에 800여개 할인매장을 보유한 울워스그룹도 지난해 11월 파산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초대형 자동차 업체 GM은 자금난으로 파산위기에 부딪혔다.
후발주자가 1등 기업을 따라잡기란 참 어렵다.
언뜻 생각에 더 좋은 제품을 싼값에 내놓으면 업계 순위는 자연히 바뀔 것 같다.
하지만 마케팅 측면에서 선발 기업인 1등이 갖는 이점이 너무 많다.
시장에서는 가장 먼저 1등을 차지한 기업만 기억한다. 실제로 미국 내 1등 기업 가운데 70%가 선발 진출 기업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경쟁 판도가 흔들린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불황기 한국 기업들의 순위 변화를 살펴봤다.
97년 외환위기 당시의 충격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불황 직전 상위 25%에 속했던 기업 가운데 3분의 2가 불황기를 거치며 탈락하는 등 극심한 변화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1위를 빼앗기도 어렵지만 1위를 지키기도 어렵다.
선두 자리에 안주, 과거의 성공방식에 도취해 앞을 못 보기도 한다.
역량을 넘어선 성장정책에 매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펩시에 밀린 코카콜라나, K마트에 인수된 세계 최대 소매업체 시어스로벅의 몰락이 여기에 해당된다.
GM은 대형화의 함정에 빠졌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렇다면 후발주자가 1위를 쫓아갈 수 있는 비결이 뭘까. 마냥 선두를 쫓아가는 ‘모방형 전략’으로는 곤란하다. 1위의 빈틈을 노리고 공격해야만 한다.
1. 호황을 기다려 선행투자하라
전략적 비용절감과 R&D 투자 필수
‘경제는 사이클이다. 아무리 어려운 불황기라도 끝은 있다.’
이 문구는 경제학의 정석으로 받아들여진다.
힘든 시기를 넘기면 분명 호황기가 온다. 이때를 준비한다면 불황기에 미리 투자하는 게 맞다.
여러 연구에서도 이 점은 입증됐다. 하지만 불황에 주머니를 여는 경영자는 그리 많지 않다.
이 명제를 머리로는 믿어도 행동으로는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개발(R&D) 투자부터 주저한다. 실제로 많은 선두 기업이 생존 차원에서 투자를 축소한다.
하지만 당장의 부작용은 없더라도 후속작을 창출하지 못해 결국 경쟁에서 도태된다.
반면 지속적으로 R&D에 돈을 쏟은 후발업체에는 기회가 온다.
애플이 그런 사례다. 애플은 IT 거품 붕괴 이후 세계적인 불황을 맞았다. 99년 대비 매출이 10% 가까이 줄었지만 R&D 투자를 40% 이상 늘렸다. 그 결과 아이팟, 아이튠즈 등 메가톤급 혁신상품을 연속적으로 개발해 냈다.
컴퓨터에서 쓴맛을 본 애플은 MP3플레이어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코닝의 선행 투자도 주목할 만하다.
코닝도 2001년 IT 거품 붕괴의 타격이 컸다. 광통신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광섬유 사업에서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100억달러를 투자해 55억달러 적자를 봤다.
단기적으로는 위기관리에 들어갔다. 전 세계 2만여명 직원(총 직원의 50%)을 해고하고, 12개 공장을 폐쇄했다.
하지만 동시에 투자액을 늘렸다. 6억달러가 넘는 사상 최대의 투자를 단행하고 매출액 10%를 꾸준히 R&D에 투자했다.
그 결과 현재 코닝은 광섬유 분야에서 세계 선두업체로 발돋움했다.
2007년 매출 59억달러, 영업이익률 18.4%라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끊임없는 R&D 투자는 연이은 히트상품을 내는 데도 필요하다.
많은 후발 기업은 히트상품 이후 성공적인 속편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1위로 올라서는 데 성공한 후발 기업은 2~3차례 대형 후속타를 쳐냈다.
90년대 중반 하이트가 ‘150m 천연 암반수’로 1위로 올라선 뒤 온도계 마크 달린 맥주, 점자 표시 맥주 등으로 얘깃거리를 이어나갔다.
과일주스, 생수, 스포츠음료 등 연이은 후속제품으로 펩시는 거함 코카콜라를 넘어섰다.
당장 생존이 어려운데 무슨 투자냐고 항변할 수 있다.
불황에 비용절감은 당연한 일. 하지만 비용절감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류한호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단기적 효과만을 고려한 비용 감축은 미래 성장 저해 요소로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2001~2003년 미국 자동차 빅3가 인력 구조조정으로 불황을 넘겼지만 경쟁력 강화를 못 했던 게 좋은 예다.
반면 도요타는 고가 부품을 통합하고 공정을 개선해 비용을 절감한 뒤 R&D에 투자했다.
2. 적극적으로 브랜드를 알려라
위기 때 노출효과 높다
전기밥솥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업체에 불과했던 성광전자는 외환위기 이후 주문이 뚝 끊겼다.
성광전자는 98년 독자브랜드 ‘쿠쿠’를 출시했다.
그리곤 3년간 50억원의 광고비를 쏟아 부었다. 소비자 머릿속에는 모두가 힘들 때 자신 있게 광고하는 성광전자가 각인됐다.
경기가 살아나고 지갑이 열리자 소비자들은 쿠쿠를 먼저 떠올렸다.
성광전자는 독자 브랜드를 시작한 지 불과 1년 3개월 만에 국내 압력밥솥시장 1위로 등극했다.
현금 자산은 갖췄지만 브랜드 등 무형자산이 약했던 기업에 불황은 기회다.
호황 때보다 훨씬 적은 투자로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
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불황기에는 경쟁사들이 긴축경영에 치중해 저비용으로도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케팅의 대가로 꼽히는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는 자신의 저서 ‘포지셔닝’에서 “추격자는 상황이 유동적일 때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위 기업들은 스피드보다 제품 품질에 더 공을 들이지만 우수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선두가 1위를 공고히 하기 전에 많은 분량의 광고와 프로모션으로 압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을 통한 구전 마케팅도 브랜드를 알리는 데 효과적이다. MP3플레이어시장 국내 1위인 ‘아이리버’는 10~20대가 자주 찾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제품을 홍보했다. 500명의 구전단도 활용했다. 독특한 제품 디자인도 한몫했지만 삼성전자라는 거대 기업에 맞서는 중소 후발 업체의 성공적인 마케팅이었다.
29년 세계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시리얼시장 1위는 포스트였다.
하지만 공황이 닥치자 포스트는 마케팅을 줄였다.
반면 격차 큰 2위였던 켈로그는 광고를 더 늘렸다. 극빈자에게 시리얼을 무료로 배급하기도 했다.
위기 뒤 켈로그 시리얼은 미국인 아침식사의 대명사가 됐다. 여전히 켈로그는 1위를 지키고 있다.
스포츠계의 스타 김연아를 광고모델로 등장시킨 매일유업도 브랜드 이미지를 신선하게 바꾸는 효과를 가져왔다.
3.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라
1위가 놓친 빈틈을 노려야
70년대 조미료시장 1위는 단연 미원이었다. 당시 화학조미료시장에서 ‘미풍’이라는 브랜드로 미원을 추격하던 제일제당은 화학조미료의 대명사가 돼버린 미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천연 조미료를 강조한 ‘다시다’를 선보였다.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자연적인 음식에 관심 갖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조미료의 ‘대명사’는 이제 다시다의 몫이 됐다.
새로운 시장을 연다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 필요는 없다. 기존 제품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부분을 강조하면 된다.
디지털카메라 선두주자로 세계 시장 1위에 오른 캐논.
경쟁사들이 화소 경쟁에 골몰하던 2000년, 제품 디자인을 전면으로 내세운 ‘IXY DIGITAL’을 내세웠다.
‘디지털 카메라의 생명은 화소’로 정의되던 시장구도를 바꿔버렸고 단숨에 1위에 올라섰다.
국내 유명 사례로, 하이트맥주의 OB맥주 추월 사례가 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하이트의 전신인 조선맥주는 시장점유율이 25%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하 150m 천연암반수’를 강조해 맥주를 평가하는 기준을 바꿔버리고 1위로 올라섰다.
1위의 빈틈을 노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2000년 혜성처럼 등장한 광동제약의 ‘비타500’은 40년간 1위를 고수하던 동아제약 ‘박카스’를 매출 기준으로 눌러 화제를 낳았다. 비타500의 성공요인은 유통 채널 다변화였다. 박카스가 의약품으로 분류돼 약국을 통해서만 판매되는 약점을 공략했다. 이를 위해 비타500은 약품 성분을 쓰지 않고, 슈퍼마켓·할인점·편의점 등으로 유통채널을 확대했다.
CJ오쇼핑은 홈쇼핑에 처음으로 보험과 자동차 상품을 선보였다. 홈쇼핑에서 팔릴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던 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은 CJ오쇼핑이 GS홈쇼핑을 턱밑까지 쫓아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출처 : 주간매경 [명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