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최고의 워드프레스 검색엔진최적화(SEO) 플러그인이라 알려진 Yoast SEO을 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검색엕최적화란 참 어렵고 복잡한 영역인인데 Yoast SEO처럼 SEO 전반에 대해서 제대로 다루고 있는 플러그인만 제대로 활용해도 서치엔진 최적화는 어느 정도 커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번 네이버 웹마스터 등록에 필요한 오픈 그래프(Open Graph)를 적용하기 위해 Facebook Open Graph, Google+ and Twitter Card Tags 플러그인을 적용 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워드님이 Yoast SEO 플러그인을 적용하면 이 모든게 가능하다고하여 예전에 버렸던 Yoast SEO 플러그인을 다시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Yoast SEO의 기본 기능만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세팅해서 제대로 사용하고자 몇가지 연구(?)를 했고 그 과정을 공유해 봅니다.
1. 최고의 워드프레스 검색엔진최적화(SEO) 방법, Yoast SEO 풀러그인
서치엔진최적화 , SEO는 사이트가 인터넷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중의 하나이므로 이에 대해서 많은 솔류션들이 나왔습니다. 당장 관련 플로그인들ㅇ도 엄청난데요. 플러그인 추가에서 SEO로 검색하면 3,091개 List가 추가될 정도입니다.
▽ 서치엔진 최적화(SEO )관련 플러그인들
다 아시다시피 워드프레스 검색엔진 최적화를 위한 플러그인 중에는 Yoast SEO와 All in One SEO Pack가 가장 인기가 있습니다. 각기 백만이상의 사이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All in One SEO Pack는 2007년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으며 오랜된 덕분에 가장 많이 다운로드 된 SEO 플러그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Yoast SEO 풀러그인은 2010년에 출시되었고 강력한 성능으로 All in One SEO Pack의 가장 큰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Yoast SEO와 All in One SEO Pack는 가장 인기가 있는 SEO 플러그인이다보니 이를 비교하는 자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각 개인들의 필요성과 목적성을 고려하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Yoast SEO가 더 낫다는 의견이 조금 더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둘을 면밀히 비교하지는 못했는데 비교 자료들을 토대로 Yoast SEO를 예전에 사용했었고 다시 적용했습니다.
wpbebinner.com에서 정리한 Yoast SEO와 All in One SEO Pack 비교 글을 링크해 봅니다.
3. Yoast SEO 풀러그인 설정하기 –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여기에서는 Yoast SEO 풀러그인을 설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Yoast SEO 풀러그인을 아주 잘아시는 분이라면 필요한 붑능 찾아가서 일일히 세팅할 수도 있지만 Yoast SEO 풀러그인에서 제공하는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를 이용해 중요하고 대부분의 설정을 완료하는게 편합니다.
설치된 Yoast SEO 풀러그인에서 setting(설정)을 누르면 아래와 같은 Dashboard 대쉬보드 화면이 나타납니다.
▽ Yoast SEO Dashboard 대쉬보드 화면
여기에서 설정을 위해서는 General로이동합니다. 이 General 화면에서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를 클릭해 상세 설정 화면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면 약 12단계로 이루어진 설정이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3.1.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1단계
설정마법사에 1단계 환영 겸 Yoast SEO 설정을 계속할지를 선택하는 화면입니다. 설정하러 들어왔으니 당근 계속한다는 외쪽을 선택합니다.
3.2.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2단계
다음 2단계는 Yoast SEO로 무엇을 하려는지를 목적을 분명히 선택하는 화면입니다.
이에 대한 옵션은 실제로 사이트를 운영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테스트나 개발을 위한 것인지 등등
실제 운영하는 사이트에 적용하므로 Producrion을 선택합니다.
3.3.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3단계
세번째 단계는 사이트가 운영되는 컨텐츠에 내용이 어떤 분야인지 카테고리를 선택하는 화면입니다.
저의 경우는 블러그 성격이 가장 강하므로 블러그를 선택했습니다. 이외에도 이커머스용 온라인 상점 또는 뉴스사이트 등 몇가지 다른 분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3.4.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4단계
4번째 단계는 기업용인지 개인용인지 선택합니다.
3.5.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5단계
다섯번째는 쇼셜 미디어를 등록하는 곳입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비롯해 트위터, 유튜브 등등 이게 어떤 효과를 주는 지 테스트삼아 주로 활동하는 대부분의 쇼셜미디어를 등록했습니다.
3.6.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6단계
여섯번째 단계는 글의 형식에 따라서 노출할 것인지 아니면 서치엔지에 노출시키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합니다. 글의 형식이 포스트, 페이지 타입인지 아니면 미디어 타입인지에 따라 각기 타입별로 구글을 비롯한 서치엔지에 노출시킬지를 선택합니다.
저는 메인 페이지는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어서 포스트와 페이지는 노출하는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미디어 형식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Hidden으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3.7.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7단계
7번째 단계에서는 사이트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한사람인지 아니면 여러사람인지 선택합니다.
커뮤니티사이트나 공동으로 운영하는 블러그라면 Yes를 선택하겠지만 제 사이트는 대부분 저만 글을 쓰기 때문에 No를 선택합니다.
3.8.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8단계
여덟번째 단계에서는 구글 서치 콘솔(예전에는 구글 웹마스터라고 불렸던 것이죠)에서 구글 인증코드를 받아 구글 서치 콘솔에서 분석한 사항들을 Yoast SEO에서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구글 서치 콘솔과 연결하는 것은 별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3.9.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9단계
아홉번째 단계에서는 사이트 이름과 게시글 제목 사이를 어떤 기호를 써서 구분시켜줄것이냐를 선택하는 곳입니다. 별모양 등등 사람들에게 호기심이나 뚜렸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기호를 선택한다면 보다 많은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지 앟을까 싶습니다.
3.10. Yoast SEO, Configuration wizard(설정마법사) 10단계 ~ 12번째 단계
열번째 단계에서 열두번째 단계는 Yoast SEO에 대한 홍보 성격이 더 강합니다.
열번째 단계에서는 Yoast SEO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에 가입할지를 결정하는 곳입니다. 저는 살포시 넘어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실제로 포스팅을 할 시 Yoast SEO 풀러그인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Yoast SEO 풀러그인은 워낙 많은 기능이 있어서 이를 다 활용하는 것이 쉬은 일도 아닙니다. 너무 기능이 많아도 고민이네요.
4.1. Yoast SEO metabox를 사용해 보자
Yoast SEO에서 가장 유용한 서비스라고 생각됩니다. 이 Yoast SEO metabox는 아래 이미지처럼 포스팅 편집 화면의 하단에 보이는 box를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snippet, keyword를 손쉽게 설정하고, 바로 공유할 수 있는 검색엔진최적화 편집창입니다. 아래 부분 네모칸처럼 포스팅 내용에 대해서 SEO관점에서 분석해 최적화를 위한 분석 및 제안을 해줍니다.
적절한 제목 길이
포커스 키워드가 제목에 있는지? 또는 중간 제목애 등장하는지? 포커스 키워드가 첫번째 문단에서 나타나는게 좋다고 합니다.
이미지 등 멀티미디어가 적절히 사용되었는지?
포스팅 내용이 충분한지 Yoast SEO 에서는 최소 300자이상의 길이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메타 디스크립션이 있는지?
내부링크나 외부링크가 있는지? 내부/외부 링크가 많을 수록 좋은 컨텐츠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포커스 키워드를 사용했는지, 처음 사용하면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4.2. Yoast SEO Webmaster Tools verification
웹마스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게 앞에서도 소개되었던 Google Search Console이구요. 시장점유율은 작지만 나름 유의한 지표들을 볼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틍서 제공하는 Bing Webmaster Tools이 있고요 러시아등에서 유명한 Yandex Webmaster Tools등이 있습니다. Yandex Webmaster Tools은 러시아에서 시장점유율 60%이상을 차지하는 러시아 최대 검색엔지으로 러시아를 기반으로 전 세계 검색엔진 시장에서 4위를 차자하고 있다고 하네요. 동구를 타겟으로 한다면 관심을 기울여야 할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얼마전에 네이버에서도 웹마스터도구를 선보였습니다.
Yoast SEO에서는 Google Search Console, Bing Webmaster Tools, Yandex Webmaster Tools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등록 방법은 Yoast SEO에서 세개의 웹마스터툴(Webmaster tools)을 등록하는 방법을 설명해 놓았는데 이를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Yoast SEO을 설치했다면 여기서 제공하는 사이트맵(site map)을 사용하는게 마음이 편할 듯합니다. 사이트맵(site map)을 조금 더 좋은 내용으로 제공하려고 다른 곳에서 만든 사이트맵(site map)을 올렸더니 Yoast SEO에서 자꾸 에러메세지를 뿜어대더군요.
결론 Yoast SEO을 설치했다면 닥치고 그냥 여기서 제공하는 사이트맵(site map)을 쓰자.
먼저, Yoast SEO에서 제공하는 사이트맵(site map)을 보고 저장을 하려면 아래 이미지의 XLM Sitemap을 누릅니다. 그러면 나오는 화면에서 사이트맵을 점검할 수도 있고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웹마스터툴에 사이트맵을 올릴때 유용합니다.
또한 사이트맵에 들어갈 수 있는 페이지 수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기본이 이 1000인데 욕심에 10000으로 변경했습니다. 서버 메모리등이 허용하면 키워도 된다고 합니다.
4.4. Yoast SEO – Breadcrumbs
Yoast SEO에서는 SEO관련 굉장히 많은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하나가 Breadcrumbs인데요. 이는 빵조각처럼 이 글이 어디에 있는지 그 단계를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즉 현재 읽고 있는 페이지의 위치를 상위 페이지나, 상위 메뉴, 상위 카테고리로 이동할 수 있는 링크(LINK)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블로그 독자가 현재 일고 있는 글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위로 이동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죠.. 아마 아마 이게 제대로 작동한다면 독자가 사이트에서 머무는 시간이 증가할 수있고 이는 SEO 전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SEO를 강조하는 많은 워드프레스 테마에서 이 BreadCrumb 기능을 지원합니다. 제가 사용한 Newspaper 테마에서도 이 기능을 지원합니다.
다만 저는 이 기능을 화면이 지저분해진다고 무시했었는데 Breadcrumbs이 SEO에는 도움을 많이 준다고 하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SEO에 도음이 된다고하니 Yoast SEO에서 이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Yoast SEO의 Advanced – Breadcombs로 들어가 사용하기(Enabled)를 선택해 주면 됩니다.그런데 Yoast SEO에서 제공하는 디자인이 조금 아름답지는 않아서 Newspaper 8 테마에서 제공하는 기능을 사용하려 합니다.
4.5. Yoast SEO – RSS
일반적으로 RSS를 통해서 글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고 일부는 RSS를 통째로 인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글의 오리지낼리티가 문제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요.
Yoast SEO에서는 RSS로 공유시 이 글에 대한 권리 등등을 표시해서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변경하지않고 디폴트로 사용해도 되고 몇가지를 수정해서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5. 마치며
Yoast SEO에 대해서 나름 유용한 정보를 담겠다고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니 평범한 일반적인 플러그인 소개글이 되고 말았네요. Yoast SEO을 좀 더 열심히 써보고 그 결과를 토대로 보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Yoast SEO의 핵심은 Yoast SEO metabox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팅을 하면서 정말 SEO에 맞추어 글을 작성하고 있는지 참 궁금한데 여기에서 어느정도 가이드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으므로 아주 유용한것 같습니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사례를 연구하면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침체를 불러왔던 원인은 큼직한 로고와 헐렁한 바지로 대표되는 스트리트웨어로의 확장이라고 했는데 이제 다시 큼직한 로고가 트렌드로 제안된다고해서 그 트렌드를 잠깐 짚어 보았다.
1.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큼직한 로고 때문에 망했다는데…
얼마 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사례를 정리했었는데요. 여기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다 갑자기 정체에 빠진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 했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당시 떠오르고 있었던 어반 유스(Urban Youth)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죠. 어반 유스(Urban Youth)를 타겟으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로고를 키우고 매우 선명하게 부각시키켜고 이를 스트리트웨어에 까지 확장시킨다. 이는 헐렁한 청바지와 매우 커다란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로고가 들어간 제품들이었는데 이러한 스트리트웨어 이미지들은 곧 기존에 에 구축해 놓았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고급스럽고 프리미엄 이미지를 대체해 버린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력 저하를 가져왔다고 지적받는 스트리트웨어 이미지
즉 브랜드 영역을 젊은 계층 중심의 스트리트웨어로까지 확장하면서 브랜드 가치 하락을 불렀고 이는 미국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매출이 급속히 감소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 불행중 다행으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유럽으로의 지역 확장에 성공해 미국에서 감소한 매출 이상을 유럽에서 커버해 주어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매출을 유지할 수 있었죠..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이 지역별 판매 비중 추이, 2006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인수한 사모펀드(private equity firm Apax Partners)에 발표 자료, 유로화를 달러로 환산해 환산 환율에 따라 다른 자료와 달리 보일 수 있다.
2. 다시 로고가 더 커진다고?
아무튼 얼마전까지 트렌드는 가능하면 로고는 최소화해 있는 듯 없는 듯 하는게 대세였다. 이른바 로고리스였는데.
그런데 최근 로그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예전의 로고리스에서 벗어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큼직한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줄을 잇고 있다.
첫번째 생각해 볼것은 이제 주요 소비층으로 등장하고 있는 밀레니얼을 타겟으로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인으로 이런 빅 로고를 채용하지 않을까?
그동안 밀레니얼은 인구는 많지만 구매력 측면에서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밀레니얼들이 본격저인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겨냥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려는 것이아닐까 싶다.
자기 주장을 분명히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90년대 개성을 추구했던 스트리트웨어를 입은 세대간에는 분명히 많은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싶은 밀레니얼세대와 큼직한 로고는 코드가 잘 맞는 조합이 아닐까 싶다.
▽ 밀레니얼 세대 이미지 [이미지 출처 – 구글자료를 기반으로 편집]
3.2. 복고 트렌드 편승
역사가 돌고도는 것처럼 패션도 돌도 도는 것이리라. 최근 TV 드라마를 비롯해 많은 영역에서 복고가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복고 트렌드가 나타나는 시기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될 때라고 한다. 현재 우리 우리 사회는 빠르게 디지탈, AI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트렌드 변화 쓰나미의 한가운데 있다. 무시하면 개인적으로 무시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비켜갈 수 없는 그런 세상이 오려하고 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불안 두려움ㅇ 지난 2014년이래 계속되어온 복고 열풍의 근간이 아닐까 싶다. 이런 사회적인 복고 분위기에 패션도 복고 트렌드가 나타나고 강조되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지난 1990년대 유산이 있는 브랜드들은 그 유산을 이 시점에 다시 한번 편승해보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일전에 소개한 1990년대 스타였던 브룩쉴즈를 37년만에 다시 내세우려는 캘빈 클라인 그 대표적이 예이다.
패션업계도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하에 있다. 패션업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중의 하나는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이고 쇼셜미디어로 대변되는 급변한 미디어 환경에서 충분히 대응해야 한다. 이러한 환경하에서 효과적으로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것이 셀러브리티를 활용한 스포서쉽이고 이게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동네가 바로 패션업계이다.
그래서 쇼셜미디어에서 가장 쉽게 자연스럽게 부각을 나타내기 위해 로고를 부각시킬 수 있도록 로고가 커지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파파라치에 의헤 유통되는 많은 헐리욷 스트들의 사진중에는 의도적으로 노출 시킨게 엄청 많다,
급변하는 쇼셜 미디어 시장에 가장 효과적인 브랜드 노출 방식으로 큼직한 로고가 다시 나타났다는 생각이다.
모한 무라니(Mohan Murjani)과 함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1985년 처음으로 제품을 런칭하면서 광고를 집행합니다.
이 당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광고 예산은 불과 140만달러였다고 합니다. 이 제한된 예산(사실 140만달러가 과연 적은 돈일까하는 생각은 듭니다. 이 당시 화폐로 140만달러는 상당히 큰 돈이었을 겁니다.)으로 가장 효과적인 광고가 필요했습니다.
초기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광고는 대표 디자이너인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가장 효과적으로 알리는데 집중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광고의 컨셉을 미국의 유명 디자인중의 한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즉 ‘미국 시장에는 네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 랄프로렌, 페리 엘리스, 캘빈 클라인 그리고 타미 힐피거가 있다”
In most households, the first three names are household words. Get ready for another. His name (hint) is Tommy. The second name is not so easy. But in a few short months everybody in America will know there’s a new look
in town and new name at the top. Tommy’s clothes are easy-going without being too casual, classic without being predictable. He call them classics with a twist. The other three designers call them competition.
▽ 무명 디자이너 주제에 과감하게 유명 디자이너와 동급으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선언해 버린다. 1985년 최초의 광고,
2.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최초 광고에 대한 해석
그러면 이와 같은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광고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첫번째는 처음 시장에 진입하는 초짜 다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미국 유명 4인의 디자이너의 한명으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소개하는 과감성에 있다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광고에 모델 사진이나 의상 사진하나도 없었지만 강렬하게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번째는 4명의 위대한 디자이너 중 새롭게 등장하는 Tommy 그리고 Logo라는 아주 심플한 내용으로 주장하는 바를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1985년 광고 뉴욕 타임스퀘어광장에 걸린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당시 촌발 날리는 삼성전자 광고가 반갑다.
3.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최초 광고에 대한 반응
이런 다소 어처구니 없는 광고 전략에 대해서 신문등 공중파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에 대한 (다소 긍정적인) 노이즈를 일으키는 기사를 쏟아 내었습니다. 어쩌면 일정 부분 이런 기사를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노이즈를 뷰발하고 기사로 이어지면서 단시간내에 힐피거(TOMMY HILFIGER)의 인지도를 끌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광고와 공중파에서의 노이즈를 유발하는 기사들은 뉴욕 사람들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가장 중요한 네명의 디자이너 중의 한명이라고 인식하게 끔 만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뉴욕커를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가장 중요한 디자인너 중의 한명으로 인식한다고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미국의 패션 브랜드인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브랜드라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브랜드 진부화 및 비지니스 정체를 어떻게 뚷고 다시 성장의 기회를 잡았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패션브랜드만큼 변화가 빠르고 또 부침이 심한 분야도 드물다. 굉장히 빠른 변화 사이클 그리고 이 분야도 피해갈수 없는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을 어떻게 대응하면서 브랜드 정체성을 지켜가고 브랜드 파워를 키워가는지 보자.
1. Executive Summary
디자이너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와 인도의 섬유재벌이었던 모한 무라니(Mohan Murjani)이 만나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라는 패션 브랜드로 1985년 런칭해 당시로서는 진보적이고 과감한 디자인으로 크게 성공한다. 1990년대 시개의 아이콘이라 불릴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브랜드 관리 실패는 2000년도부터 정체에 빠졌다. 하바드비지니스 리뷰등에 나타난 가장 큰 실패 원인은 1990년 초기 형성했던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가 스트리트웨어까지 확장되면서 브랜드 가치의 하락이었다.
이런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세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국을 벗어난 글로벌화 추진이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로컬에 맞춘 affordable luxury를 지향하는 브랜드 빌딩을 통해서 새로운 성장 계기르 만들었다. 특히 유럽에서의 성공은 유럽 현지 특성을 살린 현지 디자인을 기반으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만의 우럽 디자인을 제안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런 유럽의 성공은 다시 미국으로 수입되어 판매이 선순환을 이루었다.
둘째는 디지탈 쇼룸, VR 등 앞선 매장에서의 브랜드 사용 경험을 제안하는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Digita Transformation)의 선제적 적용이다.
세번째는 고객을 만나는 방법의 혁신이다. 기존의 구태 의연한 패션쇼 등에서 벗어나 카니발형식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축제같은 발표장으로 바꾸었으며 패션쇼에서 발표한 상품은 바로 다음날 전 세계 매장에 전시할 수 있도록 공급 시스템을 혁신해 ‘See now, Buy now’라는컨셉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결과 2010년까지 매출 정체를 면치 못했고 특히 미국에서는 지속적인 매출 하락을 격어야 했으나 2011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북미 매출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유럽을 비롯한 인터내셔널 판매도 크게 증가해 많은 브랜드들이 어려울을 격고 있음에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역사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미국 뉴욕주 엘미리에서 태어났다.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고등학생 시절에 그 스스로 디자인한 조끼와 스웨터를 판매하는 소매점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는 졸업 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스포츠 의류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또한 망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조다쉬(Jordache)에서 청바지 디자이너로 취직을 한다.
한편 인도의 섬유재벌이었던 모한 무라니(Mohan Murjani)는 1970년 청바지를 유행시킨 장본인으로 다시 청바지를 대유행시키고 당시 랄프로렌보다 덜 프레피하면서도 저렴해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자 젊은 디자이너를 찾고 있었다.
모한 무라니(Mohan Murjani)와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의기 투합하여 남성 의류를 중심으로 힐피거(HILFIGER) 브랜드를 만든다.
힐피거(HILFIGER)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유통을 책임지고 있는 무라니 인터내셔널(Murjani International)에서 자금 문제와 기존 브랜드간의 충돌이 발생해 동시 여러 브랜드를 키우는 게 쉽지는 않았다,
결국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모한 무라니(Mohan Murjani) 그리고 추가 투자자 2명은 1988년 푸라니 인터내셔널을 세우고 브랜드도 힐피거(HILFIGER)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로 변경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의류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본사를 홍콩으로 이전 한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1980년대 말부터 빠르게 성장해 1992년 뉴욕 주식시장에 상장되면서 엄청난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 좀처럼 부진을 면치못하면서 2006년 사모펀드인 Apax Partner Fund in London에 의해 1.6B$에 인수되고 만다. Apax Partner Fund in London의 근거지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본사를 이전 한다. 본사를 유럽으로 이전 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이 유럽 공략이 강화되었고 유럽에서의 빠른 판매 신장을 이루면서 부진의 늪에 빠진 미국을 대신하게 된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유럽에서의 성장을 발판으로 다시 한번 도약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사모펀드인 Apax Partner Fund in London하에서 약 4년 정도 운영되면서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투자 후 일정 성과가 나면 투자금을 회수하는 사모 펀드의 특성 상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2010년 패션 전문 기업인 PVH 그룹에 $3B에 인수된다. 사모펀드인 Apax Partner Fund in London로서는 거의 2배에 가까운 수지나는 장사를 한 셈이다.
3.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성공 요인
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역사를 살펴보면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성공 요인이 무엇인지 잠깐 살펴 보자.
초기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의 유통을 맡은 모한 무라니(Mohan Murjani)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고객들이 이 새로운 브랜드의 구매를 원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단기간에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브랜드 인지도를 올리고 target 소비자가 찾아오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실시 하였다.
3.1. 과감한 광고, 가장 위대한 4명의 디자이너 중 1인으로 포지셔닝하다.
런칭 초기년도인 1985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광고 예산은 불과 140만달러였지만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라는 대표 디자이너를 효과적으로 알리는데 모든 것을 집중하였다, 즉 다다익선이라고하는 다른 군더더기 목표를 여기에 광고에 섞지 않았다.
즉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라는 대표 디자이너를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유명 디자이너와 동급으로 포지셔닝 했다. 즉 ‘미국 시장에는 네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 랄프로렌, 페리 엘리스, 캘빈 클라인 그리고 타미 힐피거가 있다”
▽ 무명 디자이너 주제에 과감하게 유명 디자이너와 동급으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선언해 버린다. 1985년 최초의 광고,
▽ 1985년 광고 뉴욕 타임스퀘어광장에 걸린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당시 촌발 날리는 삼성전자 광고가 반갑다.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광고 게시와 동시에 신문등 공중파에서 이에대한 (다소 긍정적인) 노이즈를 일으키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인지도를 단기간내에 올릴 수 있었다.
이런 광고와 공중파에서의 노이즈를 유발하는 기사들은 뉴욕 사람들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가장 중요한 네명의 디자이너 중의 한명이라고 인식하게 끔 만들었다. 실제로 뉴욕커를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가장 중요한 디자인너 중의 한명으로 인식한다고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자 백화점과 전문 매장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옷을 팔고 싶어 했으며 사람들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로고가 있는 옷을 사고자 수요가 폭발하기에 이른다.
3.2. 셀러브러티를 활용한 노이즈 마케팅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신문과 잡지에서 셀러브러티(유명 인사)들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 옷을 입었던 것을 언급하거나 그 옷을 입은 사진을 노출시킴으로써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에 관여한 셀러브러티(유명 인사)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Britney Spears, Bill Clinton, the Prince of Wales, Michael Jackson, Elton John, Snoop Dogg등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입고 있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1999년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북미 투어를 후원했다.
▽ 프레피 문화에 기본을 두었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힙합 문화와 잘 어울렸다, 당시 유명한 힙합 여성 그룹 데스티니 차일드(Destiney child), 여기에는 비욘세도 참여하고 있었다.(왼쪽 두번째)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입고 있는 마이클 잭슨, Singer Aaliyah, 비욘세,
4. 초기의 엄청난 성공
1985년 출범한 타미 피거(TOMMY HILFIGER)는 독특하고 천재적인 광고 전략에 의한 빠른 브랜드 인지도 향상 그리고 모한 무라니(Mohan Murjani) 그룹의 강력한 유통망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렇다고 하루아 침에 엄청난 매출을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 젊은 세대의 아이콘이 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1987년 70만불에 불과했던 매출은 10년 후 1997년에는 6.6억달러에 이르렀으며 밀레니엄을 맞기전 마지막해인 1999년에는 16.3억불까지 매출이 폭발한다. 아래 매출 추이 그래프 참조
▽ 타미 피거(TOMMY HILFIGER) 초기 매출 성장 추이(1985년 ~ 2000), Annual Report 및 신문 기사를 토대로 재구성, 1988년~1991년은 자료가 없어 트렌드에 맞추어 그렸다. 단위 : 백만달러
5. 2000년대 수렁에 빠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이렇게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돌연 2001년부터 정체에 빠지죠..
아래는 1992년부터 2010년까지 19년간의 매출 변화를 그래프화 했다. . 2010년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매출이 증가하지만 2001년부터는 하락 및정세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매출 성장 추이(1992년 ~ 2010), Annual Report 및 신문 기사를 토대로 재구성, 단위 : 백만달러
그러면 도대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왜 하락의 늪에 빠진 것일까?
2000년대 초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당시 떠오르고 있었던 어반 유스(Urban Youth)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죠. 어반 유스(Urban Youth)를 타겟으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로고를 키우고 매우 선명하게 부각시키켜고 이를 스트리트웨어에 까지 확장시킨다. 이는 헐렁한 청바지와 매우 커다란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로고가 들어간 제품들이었는데 이러한 스트리트웨어 이미지들은 곧 기존에 에 구축해 놓았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고급스럽고 프리미엄 이미지를 대체해 버린다..
이는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 지향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회사는 처음 시장에서 $79~$89에 판매할 제품을 만들었지만 프리미엄 이미지를 상실해 버린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는 시장에서 $49에 팔리게 되고 회사는 이 가격에 팔기 위해 브랜드가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타협하게 됩니다.
브랜드가 점차 망가지는 것이다.
“For years Tommy Hilfiger’s designers had been creating shirts that would sell for $79 but would offer the look and quality of shirts that might sell for $89. But when the market started to turn against the brand, retailers had to mark down those shirts to $49 in order to sell them. To be profitable at $49, you need to make very large compromises on materials, styling, and quality. They began designing into the discount environment, and the brand eroded further.”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력 저하를 가져왔다고 지적받는 스트리트웨어 이미지
이러한 브래드력 저하 현상은 주로 미국에서 일어났다. 이와 반대로 브랜드 관리를 철저히 했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유럽 지부는 초기의 불활을 견디고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고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비지니스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 된다.
6. 어떻게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회생시킬 수 있을까?
점차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력이 약화되고 가격 대응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매출은 정체되고 여기 저기서 위기의 신호가 오기 시작 한다.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위기 타개는 아래와 같이 세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여 진다.
첫째는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력이 살아있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글로벌로 진출해 제대로 브랜드를 세우는 것,
둘째는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Digita Transformation)으로 디지탈을 통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이 브랜드 사용 경험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것,
세번째는 기존 패션쇼와 같은 틀에 박힌 포맷에서 벗어나 고객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것
즉 해외에서는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만의 브랜드 빌딩을 강화하고 미국에서는 제한된 수요 내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만의 브랜드 사용 경험을 제공하면서 브랜드 정체성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이미지 맵
6.1. 로컬에 맞춘 어포더블 럭셔리(affordable luxury)를 지향하는 브랜드 빌딩
앞서 미국에서는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가격 중심으로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 이미지가 매우 나빠져다고 했는데 글로벌 전개 초창기에도 브랜드 관리 잘못으로 싼 브랜드 이미지를 갖게 되어 철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해외 진출 시 이러한경험을 토대로 브랜드 관리를 철저히 하게 된다. 이런 철저한 브랜드 관리에 근거한 프리미엄 브랜드력 강화는 점차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판매 가속화의 선순환의 계기가 되었다.
6.1.1. 1997년 유럽 진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글로벌 전개는 1997년 영국 진출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성공 경험을 토대로 유명인을 활용한 홍보를 집중하였다. 그래서 영국 런던 상류층이 살고 있는 Bond Street에 Retail store를 열었고, 이 오픈식에는 Kate Moss 와 Goldie Hawn같은 유명 인사가 참석해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홍보하였다.
그 결과 유통의 열렬한 참여를 끌어 낼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 브랜드가 영국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전에 유명인을 통한 홍보는 소비자보다는 유통을 자극해 유통에서 (엄청난 기대를 하고) 엄청난 재고를 준비했다가 제대로 팔리지 않아 재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싼 브랜드”이미지가 형성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초기 진출 Retail store를 폐쇄하게 된다.
최종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유럽에서도 셀러브러티를 활용 홍보 효과가 충분하다는 것을 학인하고 이 홍보 전략을 강화하게 된다.
아래는 David bowie와 슈퍼모델 iman 부부를 기용한 광고 사례이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광고 모델로 등장한 David bowie와 슈퍼모델 iman 부부, 2003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유럽 시장을 공략하면서 유럽 시장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해서 미국 브랜드가 아닌 로컬 브랜드로서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2003년 암스테르담에서 유럽 제품 디자인을 위한 디자이너를 선발한다. 이러한 디자인 인력을 토대러 유럽에 맞는 고급 제품 기획으로 유럽 시장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이 브랜드를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유럽을 위한 디자인은 철저히 유럽 문화 및 유럽인들의 특성을 반영하면서 제대로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 배(ship)모양의 PVH 유업 암스테르담 본사 건물, 여기에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와 캘빈 클라인(Calvin Klien) 유럽 본부가 있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유럽 여러 시장의 특화된 경험을 주기 위해서 현지 주문 디자인을 시도 하였다.
예를 들어 면섬유 스웨터를 보자. 미국에서 인기 있는 면섬유 스웨터는 유럽에서 인기가 거의 없었다. 과감하게 이를 포기하고 유럽을 위한 울(wool) 스웨터를 새로 개발해 공급하였다. 유럽사람들은 슬림하게 보이는 청바지와 로고는 작을수록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라인업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결과 기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보다 더욱 고급스러운 유럽을 위한 상품이 개발되고 라인업이 추가 되었다. 이탈리아 시장을 위한 가죽 자켓과 캐시미어 스웨터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이 브랜드를 상당히 고급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미국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력 저하로 고통 받을 때 유럽에서는 강력한 브랜드력을 토대로 매출을 늘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 지연별, 연도별 판매 추이 자료를 보면 브랜드 문제를 격는 미국에서의 판매는 지속 감소하지만 유럽에서의 판매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이 지역별 판매 비중 추이, 2006년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인수한 사모펀드(private equity firm Apax Partners)에 발표 자료, 유로화를 달러로 환산해 환산 환율에 따라 다른 자료와 달리 보일 수 있다.
6.1.2. 최초 무슬림 여성을 위해 디자인한 브랜드가 되다.
지역적 특색이 강한 중동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2015년 처음으로 라마단 캡슐 컬렉션을 런칭했다, 이 컬랙션은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그리고 UAE등에 전시되었다는데 적당히 수수하게 디자인되어 아주 반응이 좋았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최초로 아랍 여성을 위해 디자인 한 브랜드가 되면서 아랍 세계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이 컬렉션 덕분에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다른 컬렉션의 반응도 덩달아 좋아지는 효과를 보았다.
지역 특성에 최대한 맞춘 과감한 시도가 브랜드 빌딩으로 연결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최초로 아랍 여성을 위해 디자인한 라마단 캡슐 커럭션(Tommy Hilfiger Ramadan Capsule Collection), the Nelia White & Black Dress
6.1.3. 지역별 매출 추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매출을 북미와 기타 지역(International)으로 나누어 매출 변화 트렌드를 살펴 보았다,
앞의 Apax Partners에서 발표한 회계년도 2010년까지 자료에서도 유럽에서의 매출이 크게 증가하고 반면 미국 매출이 계속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아래 그래프에서도 회계년도 2010년까지 북미(America) 매출은 감소,정체를 보여주고 있고 유럽을 비롯한 인터네셔녈 매출은 크게 증가하고 있다.
2011년부터 북미의 매출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유럽을 비롯한 Intarnational 판매도 크게 증가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성장을 견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최근 2015년, 2016년의 매출도 북미의 감소를 보이고 있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성장을 이끄는 것은 유럽 등 북미 외 지역으로 보여진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지역별 매출 추이, 매출을 북미와 기타 지역(International)으로 나누어 트렌드를 살펴 보았다.
6.2.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Digita Transformation)
다음으로는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Digita Transformation)을 샐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온라인이 발전하고 쇼셜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Digita Transformation)이 중요한 화두가 되어 왔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도 디지탈을 통해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의 브랜드 사용 경험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판매를 화성화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해 왔다.
많은 다른 브랜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에게 매장은 브랜드 경험을 최대한대로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매장을 방문한 소비자는 최소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잠재 고객이므로 이들에게 어떤 브랜드 경험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브랜드 이미지와 매출에서의 Gap이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2015년 암스테르담 플래그쉽스토어에서 업계 최초로 디지탈 쇼룸을 열었다.
암스테르담 매장에서는 옷을 벽에 진열해 놓는 대신 테이블로 된 터치스크린을 구비해 놓았다. 이 스크린을 터치해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제품을 살펴 볼 수 있으면 이와 연결된 극장같은 대형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선택한 제품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다.
고객들은 터치스크린 테이블에서 원하는 제품을 선택하거나 맞춤형으로 주문할 수 있다. 벽에서는 자신이 입은 옷을 가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60도 돌려서 뒷모습을 점검할 수도 있다. 또한 고객은 디스플레이의 줌 기능을 활용해 단추나 박음질 등은 디자인 디테일을 확대해서 자세하게 볼 수도 있다.
The Digital Showrooms feature large interactive touchscreens built into the surface of a solid timber table. The touchscreens connect to another large high-definition cinema screen set into the wall. Using the tabletop interface, customers can digitally select Tommy Hilfiger collections to view, including its range of styles, sizes, colours and other specifications, and even create custom orders.
6.2.2. 패션쇼의 경험을 매장에서 – VR 재공
사실 디지탈 쇼룸 컨셉은 많은 업체에서 이미 구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내용이다.
패션업계에서 디지탈 트랜스포메이션 특면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다는 버버리도 이와 유사한 컨셉의 매장을 구현하였다. 다만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훨씬 더 진화된 컨셉을 제시히고 있다고 보여진다.
버버리는 패션쇼장과 동시에 매장애서도 동시에 패션쇼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패션쇼장에 올 수 없는 고객들은 버버리 매장에서 초대형 디스플레이로 패션쇼를 보도록 유도 했다. 사실 그렇게 매장에 와서 패션쇼를 보는 고객은 없었지만 쇼오프하기에는 그만이 아이템이긴 했다.
▽ 버버리 플래그쉽 스토어 내부 모습, 영국에 있는 플래그쉽 스토어 내부로 버버리 리테일 시어터(Burberry Retail Theatre)를 통해서 패션쇼를 중계해 준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또한 매장에서 패션쇼를 보는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고 이런 니즈를 매장에 VR을 설치하으로써 해소 했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뉴욕 플래그쉽 매장에 처음으로 VR 헤드셋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버버리와 마찬가지로 패션쇼가 있는 날, 매장에 비치된 VR을 통해서 입체감있게 컨텐츠를 볼 수 있으며 특히 마치 패션쇼장 바로 앞 VIP석에서 패션쇼를 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VR을 통해서 고객의 이러한 매장 경험을 보다 풍부하게 해주는효과가 있어 전 매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 VR이 설치된 매장, 가장 좋은 자리에서 패션쇼를 감상하라는 제안
▽ VR을 활용하면 이런 정도 수준으로 자세하게 , 가장 좋은 자리에서 패션쇼를 감상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다고 있다.
또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고객을 만나는 방식도 기존의 구태의연한 패션쇼를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대표적인 게 2016년 9월 TOMMY PIER과 같은 것이다.
6.3.1. 런웨이 대신 ‘See now, Buy now’
2016년 9월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30년만에 뉴욕 패션위크 런웨이 무대에 불참하고 대신 근처 부둣가에서 12미터짜리 관람차,푸드트럭, 팝업 상점을 설치해 이틀간 카니발을 열었다.
초대장이 있어야 하는 런웨이와 달리 누구나 놀러와서 솜사탕과 핫도그를 사먹고, 무료 네일 아트를 받고, 음반을 사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기존의 다소 딱딱하고 초대받은 일부만 참여할 수 있고 디자이너 패션 모델 중심의 형식적인 행사에서 벗어나 원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패션쇼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브랜드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화로 활용하였다.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뉴욕 카니발 입구 모습, 2016년 9월 , 사진 출처 Architectural Digest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뉴욕 카니발이 열린 비치 모습, 빌딩숲 앞 부두가의 다소 전통적인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 출처 thembsgroup.co.uk
▽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뉴욕 카니발이 열린 비치 모습, 옆에서 보는 야경이 매우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사진 출처 Plumage 59
▽ 타미힐피거(TOMMY HILFIGER) 뉴욕 카니발에서 지지 하디드가 캣워크를 하고 있다, Gigi Hadid walks at Tommy Hilfiger Women’s Fashion Show at Pier 19 on Sept 9, 사진출처 Peter White, WireImage
패션쇼가 끝난 다음날 옷들이 70개국 280개 매장에서 바로 전시가 되었다. 고객들은 고객들은 패션쇼를 보면서 골라 놓았던 마음에 드는 옷을 홈페이지에서 바로 구매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바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제안한 ‘See now, Buy now’ 모델이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이를 위해 디자인에서 제조까지 전 공정을 6개월로 줄였다. 가을 패션쇼에서 봄, 여름웃을 선보이는게 아니라 당장 입을 수 있는 옷을 선보이는 것이다. 통상 패션 업계에서 런웨이에서 ㅁ장 진열까지 12~18개월이 걸린다.
타미힐피거(TOMMY HILFIGER)는 뉴욕카니발이 인기를 끌자 2017년 2월에도 뉴욕패션위크에 참석하는 대신 LA에서 카니발을 열었다. 2017년 9월에는 런던에서 카니발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6.3.2. 쇼셜 미디어 스타와 적극적인 콜라보
타미힐피거(TOMMY HILFIGER)는 이 카니발에서 슈퍼모델 지지 하디드와 콜라보한 ‘타미 x 지지’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많은 패션 ㅂ래드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 시점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상대적으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근 10년간 성장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부진에 늪에 빠져 있었지만 2011년부터는 한단계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2015년에 조금 주춤했지만 다시 2016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 성장 트렌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 타미힐피거(TOMMY HILFIGER) 매출 성장 추이(1992년 ~ 2016년)
이번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사례는 브랜드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브랜드 관리를 소흘히 한 미국은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오랬동안 엄청난 노력을 해야했지만 철저한 브랜드 관리 및 프리미엄 고급 제품을 개발을 통한 브랜드력을 강화해 온 유럽은 경제 위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성장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브랜드 관리의 중요성이 절로 도출 된다 하겠다.
여전히 유통가 소비자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급변하는 환경하에서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가 또 다른 어떤 혁신을 들고올지 지속 살펴봐야 겠다,
변경해야하는 파일은 /etc/nginx/conf.d/default.conf 인데요. 이를 편집 화면으로 들어가서 PHP handler의 내용중 fastcgi_pass unix:/run/php/php7.0-fpm.sock; 을 fastcgi_pass unix:/run/php/php7.1-fpm.sock; 로 바꾸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php7.1을 인식하고 php7.1로 작동합니다.
vi /etc/nginx/conf.d/default.conf # /etc/nginx/conf.d/default.conf 편집
PHP handler의 내용은 아래처럼 생겼습니다. 제가 적용하고 있는 내용인데요. 위에서 언급한대로 fastcgi_pass unix:/run/php/php7.0-fpm.sock; 을 fastcgi_pass unix:/run/php/php7.1-fpm.sock; 로 바꾸어줘야 합니다
# Add PHP handler location ~ [^/]\.php(/|$) { fastcgi_split_path_info ^(.+?\.php)(/.*)$; if (!-f $document_root$fastcgi_script_name) { return 404; } fastcgi_pass unix:/run/php/php7.1-fpm.sock; <---------- 이 부분을 7.1로 변경해야합니다. fastcgi_index index.php; fastcgi_param SCRIPT_FILENAME $document_root$fastcgi_script_name; fastcgi_param SCRIPT_NAME $fastcgi_script_name; fastcgi_buffer_size 128k; fastcgi_buffers 256 16k; fastcgi_busy_buffers_size 256k; fastcgi_temp_file_write_size 256k; # This file is present on Debian systems.. include fastcgi_params; }
4. 설치된 PHP 버젼 확인
php -v
이러면 PHP7.0은 아래와 같은 메세지를 출력할 겁니다.
PHP 7.0.19-1+deb.sury.org~xenial+2 (cli) (built: May 22 2017 12:48:42) ( NTS ) Copyright (c) 1997-2017 The PHP Group Zend Engine v3.0.0, Copyright (c) 1998-2017 Zend Technologies with Zend OPcache v7.0.19-1+deb.sury.org~xenial+2, Copyright (c) 1999-2017, by Zend Technologies
PHP 7.1로 업데이 후에는 아래와 같은 메세지를 뿜어냅니다.
PHP 7.1.6-1~ubuntu16.04.1+deb.sury.org+1 (cli) (built: Jun 9 2017 08:26:34) ( NTS ) Copyright (c) 1997-2017 The PHP Group Zend Engine v3.1.0, Copyright (c) 1998-2017 Zend Technologies with Zend OPcache v7.1.6-1~ubuntu16.04.1+deb.sury.org+1, Copyright (c) 1999-2017, by Zend Technologies root@happist:~# ^C root@happist:~#
6. PHP 설정 파일 최적화
Nginx에서 PHP 7.1의 설정 파일은 /etc/php/7.1/fpm/php.ini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vi /etc/php/7.1/fpm/php.ini
6.1. phpMyAdmin DB 업로드 용량 확대 세팅
phpMyAdmin에서 DB를 백업 받고 또 필요에 따라 DB 업로드하려면 업로드 용량 확대가 필요합니다. 아마 처음 PHP를 설치하면 2M로 설정되어 있어 금방 용량 부족으로 업로드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php.ini에서도 용량을 증대합니다.
upload_max_filesize = 2M → 200M으로 변경 post_max_size = 2M → 200M으로 변경
Opcache는 PHP script 를 bytecode로 컴파일한 후에 공유 메모리에 저장하여 성능을 향상시키는 모듈이라고 합니다. Opcache 의 구현물은 다양하지만 Zend Opcache가 PHP 5.5부터 기본 모듈로 내장되었고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프로젝트이므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네요. 이는 아래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OPcache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php.ini파일에서 맨 아래에 아래와 같은 문구를 추가합니다.
zend_extension=opcache.so
6.3. 보안 관련 보완 추가
php.ini파일에서 보안관련 몇가지 사상을 추가하라는 추천이 있습니다.
disable_functions 기능 추가
이는 php.ini 파일 내의 disable_functions을 찾아 여기에 phpinfo,system,mail,exec 항목을 추가하는 것 입니다. phpinfo는 php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 서버에 올려주는 경우가 있는 제 이를 세팅 자체에서 불가능하게 만들는 옵션이네요.
보안을 위해서 file_uploads 기능을 사용하지 말라고 추천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 이 file_uploads 기능은 쵝 워드프레스를 세팅 시 phpMySql에 dbㄹㄹ 올리면서 사용했고 그 외는 전혀 사용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보안 위협도 있다는데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겠지요.
file_uploads = on을 off로 변경
sql.safe_mode 적용
이는 php.ini 파일에서 sql.safe_mode 항목을 찾아 on으로 변경합니다.
sql.safe_mode=off를 on으로 변경
allow_url_fopen 비적용
allow_url_fopen=off로 변경
register_globals = Off 추가
php.ini 파일 맨 마지막에 register_globals = Off 항목을 추가합니다.
기본 버젼을 삭제하는 것은 누구는 옵션이라고 합니다. 또 누구는 엉킬 수 있으니 삭제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apt-get -y --purge autoremove
저의 경우는 PHP 7.0을 삭제하니 워드프레스가 작동하지 않아서 삭제하지 않고 남겨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PHP handler를 7.1로 변경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정상적으로 PHP handler를 7.1로 변경 적용했다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버 내용을 보니 PHP 5.6, PHP 7.0, PHP 7.1이 공존하고 있기는 합니다. 기존 버젼 삭제 시 문제도 생기고, 서버 용량이 남아돌고 있으므로 그냥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철저히 비교 대상을 제한해서 비교한것은 아니지만 php 7.1로 업그레이드 한 후 속도가 3.1초~2.9초대였다면 보통 2.7초대로 좋아졌습니다. 심리적으로 좋아졌다고 스스로 위안해 봅니다.
오랬동안 네이버에서 검색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네이버에 대한 관심이 많이 없지기는 했습니다. 몇년간 네이버에서 유입은 거의 없었죠. 네이버 웹마스터도구도 등록했지만 효과는 없었습니다. 네이버 봇이 크롤링은 해가는데 색에는 전혀 반영이 안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네니버 웹마스터도구 등록을 삭제하거나 손을 봐야 겠다고 마음먹고 네이버 웹마스터도구를 살펴보았는데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더군요. 그래서 제 사이트는 매우 불성실한 사이트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를 보면 오픈 그래프(Open Graph)라는 항목이 나옵니다. 그 동안 없었는데 2016년말 네이버가 개편을 하면서 오픈 그래프(Open Graph)를 추가했나봅니다.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네이버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맞추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픈 그래프(Open Graph)를 정리해야 겠네요.
2. 오픈 그래프(Open Graph)란?
그러면 도대체 오픈 그래프(Open Graph)란 무엇일까요?
오픈 그래프(Open Graph)는 블로그의 컨텐츠를 페이스북(Facebook) 공유시 타이틀, 이미지, 요약문등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정보를 표현하는 HTML 표현식이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Facebook) 뿐만이 아니라 많은 SNS에서 활용하고 있지요. 결국 오픈 그래프(Open Graph)는 SNS 공유 시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HTML 표현식 정보로 컨텐츠의 원활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꼭 포함 시켜야하는 정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페이스북 등에서는 오픈 그래프(Open Graph)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고 트위터는 여기에 추가로 더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기위해 변형된 오픈 그래프(Open Graph)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좋은 결실을 맺어서 좋은 롤모델이되고 많은 강경화키드들이 우리나라를 멋진 나라로 만들어 주길 바래 본다.
그 동안 강경화 후보가 외교부장관으로 지명되기까지는 참으로 험난했다.
강경화 UN 사무총장 정책특보가 외교부장관 후보자가 되오 한국을 방문 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곧 이어진 검증 과정에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가장 크게 이야기된 부분은 혐의는 위장전입과 기획부동산 투기 의혹. 이중 기획 부동산투기 의혹은 부군인 이일병 연세대 명예교수가직접 거주하면서 지은 건물로 밝혀졌고, 위장 전입은 맞지만 현지 적응을 위한 교육적 목적으로 밝혀졌고 강경화후보도 공식 사과했다. 물론 사과했다고 잘못이 없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강경화 케이스를 두고 위장전입을 투기 목적과 교육목적으로 나누어서 봐야한다넌 여론이 형성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100% 완벽한 사람은 어디 있을까? 조금씩 조금씩 수준이 올라가고 새선되고 그러면서 미래로 전진하는 것 아닐까?
이 검증과정에서 강경화후보는 여러가지 이유로 집중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한마디로 정치적 희생양을 필요로하고 있었고 그런 정치 로직에 따라 정치권 , 언론이 몰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혁신을 향한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능력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자리의 능력이란 실제로 격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가? 나 강경화 장관이 인권과 위안부 문제를 풀고자 UN에 진출했다는 그 정신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철학 또는 소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난는 최소한 평작이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류에 흔들려 누구의 지시에 따르는 허수아비는 절대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가 외교부장관이 되어서 수많은 어린 여학생들의 롤모델이되고 (우리 은우에게도 롤모델이 되었으면하는 생각인데 과한 욕심이겠지) 변화를 간절히 원하는 그곳에서 소기의 변화와 성과가 있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아래는 오늘 페북등에서 돌아다니던 강경화장관관련 내용 중 가슴을 뛰게 했던 내영 몇개를 소개해 본다.
강경화가 꿈의 넓이를 넓혀 주었다. 우주 하나만큼 넓어진거야
김남훈님이 올려준 글
이런글을 페북에서 기분이 좋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맘껏 능력발휘해서 좋은 성과를 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댓글에서 나오는 것처럼 강경화키드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강경화가 우주만큼 넓혀준 꿈
와. 나 지금 초등학교 6학년 대상으로 강연을 하다가 소름이 돋다가 눈물이 날 뻔 했어. 여러분 꿈이 뭐에요? 라고 하니까 맨 앞줄 여학생이 또렷하게 “외교부 장관이요!” 지금까지 수년 간 강연을 했어도 장관이나 외교관을 언급하는 여학생은 없었어. 강경화가 꿈의 넓이를 넓혀주었다. 우주 하나 만큼 넓어진거야
의전에 대한 단상
두번째로 페북에 올라온 글, 오늘 강경화외교부장관 관련 글이 조금 더 올라왔다.
▽ 강경화가 관용차로 사용하기로 한 차종 – 의전에 대한 단상
롤모델
세번째 고일석님의 페북에서..
정말 강경화는 우리 딸의 롤모델이 될 까? 당연하겠지!!
우리 세대의 여성 차별과 강경화 후보자
세번째로 성우제님의 글,
여기서 전문을 옮겨봅니다. 이 글을 읽고 반성을 많이했다.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는 생각… 아래 이글을 공유하기위해 성우제님께 부탁을 드렸고 흔쾌히 허락을 해주시어 아래 공유를 합니다.
나는 1982년에 대학에 입학했고 내 아내는 83년 입학이니 우리는 동기나 다름없다. 같은 대학, 같은 문과대 출신. 과만 다르다. 옛날 대학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가장 놀라워 했던 것은 당시 여성 대졸자의 좁디 좁은 취업문.
우리가 졸업하던 때인 1986~88년 무렵 남자들은 취직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문과대 출신한테도 취직 자리는 넘쳐났고, 어느 회사를 가느냐 하는 것이 고민거리였다. 반면, 아내 말을 들어보면 번듯한 기업들은 아예 여성 채용공고조차 내지 않았다. 큰 회사에 취직하기는 별따기였다. 취직 걱정을 하지 않은 남자들은, 여자들도 우리처럼 잘 했겠거니 했다.
당시만 해도 형제 많은 집에서는 여자가 오빠나 남동생 때문에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 잘 해도 남자 형제들이 많으면 대학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상 졸업 후 남자 형제 뒷바라지 하는 것도 많이 보았다. 공순이 소리 들으며 오빠, 남동생 학비 댄 여성들을 나는 안다. 남녀 공학 대학에는 당연히 여자들이 적었다. 대학에 들어와 공부를 잘 해도(학점은 여학생들이 훨씬 좋았다), 졸업 후 취업할 때 또 차별 대우를 받았다.
대학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 박사학위를 받은 남자들은 교수로 모두 취직했다. 반면 같은 조건을 갖추고도 교수가 된 여자는 한 명도 없다. 남자들은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는지 다 알지만, 난다 긴다 하던 여자 선후배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 때 그 정도였으니 우리의 10년, 20년 선배 여성들에 대한 차별은 훨씬 더 가혹했을 것이다. 출생하면서부터 여자 아이라고 환영 받지 못했다. 성장하면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렇게 차별 대우를 하는데도, 그것을 이겨내고 전문 직업인으로 활동하는 선배들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사회 활동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가사와 출산과 육아에서 해방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남자들보다 훨씬 더 부당하고 가혹한 평가를 받았다. 여성을 평가하는 잣대, 직무와 전혀 관계없는 잣대가 우리 사회에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나이 쉰이 넘어서도 넘어서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좁디 좁은 문을 열었으며, 상상도 하기 어려운 험한 길을 걸어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내 눈에는,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우리 연배와 선배 여성들은 그 누가 되었든 참 대단해 보인다. 작년 뉴스에 유엔사무총장 정책특보가 되었다는 강경화라는 여성이 등장했을 때, 나는 이 분이 외국에서 공부한 줄 알았다. 저기 저 자리에까지, 국내 출신의 여성이 올라갔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멀쩡하게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까지 했다는 이력을 나중에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여겼더랬다. 저 분을 아는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한결같이 칭송했다. 무엇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유엔 마이크를 앞에 두고 찍힌 저 사진이 참 근사했다. 멋진 은발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상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잘 살아온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분이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장관으로 지명되었다는 발표가 났을 때, 많은 이들이 ‘경력’과 ‘여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빼어난 영어 실력’도 화제가 되었다. 이후 이른바 ‘위장전입’ ‘증여세 미납’ ‘기획부동산’ 등이 그것들을 뒤덮더니, 급기야 ‘딜’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누구를 살리기 위해 강경화를 날려야 한다는 말까지 회자된다. 오늘 JTBC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위장전입과 증여세 탈세를 본인이 인정했다”고 말했다.
나는, 문재인내각 청문회가 진행되는 이 시점에도,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여성 차별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강경화씨의 위장전입이, 위장전입 본뜻이 지닌 그 추악한 위장전입인가? 증여세를 내지 않았다? 국내에 살면서도 안 냈던 황교안은 넘어갔는데, 외국 살았던 강경화는 왜 못 넘어가나? 외국살이하는 것이 그렇게도 감안이 안 되나? 기획부동산? 오보에 대해 해당 언론사는 강 후보자에게 제대로 사과라도 했나? 그것을 보란듯이 보도한 손석희 남성 사장이 보란 듯이 사과를 했는지 묻는 것이다.
저 연배의 여성이, 저 자리에 올랐다면 아무리 배경이 좋았다 해도 남자들보다 두 배, 세 배는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여성을 두고 “딜한다” “강경화를 날린다” “내준다”라는 말을 감히 입에 올리는 중장년 남성들이 있다. 나는 남자들이 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대단히 불편했다. 지금껏 여성을 차별하는 환경을 누려왔으면서, 여성들의 희생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른 것도 모르고, 지금 와서 또 여성을 차별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그래왔던 것처럼, 강경화씨를 여성이라고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야당과의 ‘딜’을 위해 왜 유독 강경화씨에 대해서만 “날린다” “내준다”는 말을 쓰는가? 굳이 누구를 내주어야 한다 치자. 그런데 강경화를 지키고 김상조를 내주면 한국이 지옥 되나? 도종환을 내주면 왜 안 되는데?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중장년 남성들,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와 주변을 돌아보라. 자기 때문에, 자기 연배 남성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동년배 여성들이 희생했는지, 말없이 희생을 감수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대학에서 강경화씨에게 배운 어떤 여성은 “강경화 선생님이 교수로 임용 안 되는 것을 보고 똑똑한 여학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리버럴한 분위기의 연세대에서 그랬다면 다른 대학 분위기가 어땠는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 야당과의 딜을 위해 누구를 날려야 한다면 남자 장관 두 셋을 날리고,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강경화는 지키는 게 옳다. 그것은 저 연배 여성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자 존경이기도 하다. 남자들이 잘 나서 세상 움직여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대학 캠퍼스에서, 공평하게 치러지는 취업 시험에서 남녀 비율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똑같은 기회를 주니 여성들이 약진하는 거고, 그것은 곧 과거에 불공평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경화 후보자 입각 여부는 일체의 차별을 하지 않겠다는 문재인정부뿐 아니라 한국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차별 대우를 받으며 살아온 여성들에 대해 문재인정부와 한국사회가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으며, 지금의 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다른 것 모두 차치하고, 이렇게 멋지고 영어 잘 하는 여성 장관이 세계 외교무대에서 활약하는 걸 상상하면 기분 좋아지지 않나? 한국 대표로서 말이다.
*댓글로 두면 안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옮긴다. 나보다 7년 선배 되시는 허영숙 님의 글. “우제님은 강경화님 연배의 여성들이 어렵게 대기업에 취직했어도 결혼하면 당연히 사표를 내야했던 걸 아셨을래나? 당시엔 27살이면 노처녀라 시집못가겠네 라는 말을 들었으니 대학나오고 사회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아서 결혼보단 직장을 택한 사람들이 아직도 싱글로 살고 있다는 얘기를.”
2007년 6월 아이폰이 최초로 세상이 그 모습을 나타냈죠. 그 이후로 벌써 10년이 흘렀습니다.
스톡 포토(스톡 포토란 광고, 미디어, 출판계 등에서 상업적으로 사용할 만한 사진을 촬영한 후 이 사진을 큰 저장고에 저장해 놓으면 상업 사진이 필요한 구매자가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사진) 사이트인 셔터스톡에서 아이폰 출시 10주년을 기념해 아이폰이 바꾸어 놓은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10대 트렌드를 발표했네요.
▽ 아이폰 최초 구입자중의 한명이 환호를 지르며 뉴욕 5번가에 있는 애플스토어를 떠나고 있다. One of the first iPhone buyers leaves the Apple store on 5th Ave. in New York on June 29, 2007. (Reuters)
아이폰 출시가 미친 영향은 워낙 광범위하죠. 아이폰을 필두로 한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라 많은 관련 산업이 그 유탄을 맞았습니다.
예전에 이에 대한 포스팅을 한적 있습니다. MP3 플레이어나 네비게이션등등이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수용가 확 줄었죠.
1. 전설적인 여배우 브룩쉴즈(Brooke Shields)가 캘리빈 클라인 청바지 모델로 돌아오다.
아주 오래 전, 1980년대 초 15세의 나이로 캘빈 클라인 데님 광고에 출연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헐리우드 여배우 브룩쉴즈(Brooke Shields)가 37년만에 다시 캘빈 클라인과 광고 모델로 출연한다고 합니다.
당시 최고 미녀라고 불리웠던 브룩쉴즈(Brooke Shields)는 요즘의 아이돌 이상의 인기을 구가했었죠. 당시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 학생들 조차도 브룩쉴즈의 아름다운 얼굴이 있는 책받침 하는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죠.
▽ 보그지에 처음 출연한 브룩실즈, 브룩쉴즈는 보그지에 13번이나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제 처음 캘린 클라인 광고 모델이 된지 37년만에, 나이 52세인 브룩쉴즈(Brooke Shields)가 다시 청바지 광고 모델로 나오다고 하는데.. 15세(14세라는 글도 있더군요)의 어린 소녀 나이에 캘린 클라인 광고 모델이 되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캘빈 클라인의 성장이 큰 기여를 했더 브룩쉴즈(Brooke Shields), 가장 아름다운 또는 섹시한 청바지 광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덕분에 다시 등장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한물 간 헐리우드 여배우가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1980년대 10대, 20대로 브룩쉴즈(Brooke Shields)와 캘빈 클라인 청바지에 열광했던 중장년 미국인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광고가 될까요?
▽ 타임즈에 80년대 얼굴로 소개된 브륵실즈
그런데 브랜딩 관점에서 효과적인 전략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캘빈 클라인은 분명히 청바지 광고를 담는다고 했는데요. 청바지의 주요 Target이 젊은층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중장년층으로도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전략이 있는 것인지? 캘립 클라인이 브랜딩전책에서 새로운 전략을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튼 고개가 갸유뚱해지는 기사이긴 합니다..
그런데 전성기적 모델을 다시 불러 광고로 활용하는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모델이 브랜드 빌딩에 많은 영향을 준 경우는 특히 그렇습니다.
샤넬은 2012년 마릴린 먼로의 인터뷰를 모티브로 광고를 제작해 샤넬을 애용했던 마릴린 먼로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아무튼 이 부분은 52세의 브룩쉴즈(Brooke Shields)가 보여주는 광고를 보고 고민해 볼 문제이고요. 오늘은 1980년대로 돌아가서 이 당시 캘빈 클라인의 브룩쉴즈 광고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캘빈 클라인에 대해서
캘빈 클라인 calvin klein, Image Source – elsaelsa
1942년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난 캘빈 클라인은 의상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와 숙련된 재봉사 출신으로 캘빈 클라인에게 반느질을 가르쳐 주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미욕 패션 스쿨인 FIT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졸업하지는 못하고 바로 의류 제조공장의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죠. 캘빈 클라인은 댄 밀스타인(Dan Millstein)이란 작은 의류회사에서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보고 이를 카피해 복제품 생산에 반영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요 업무가 카피다보니 만족할 수 없어서 그 공장을 뛰어 나옵니다.
1968년 친구에게 1천만원을 빌려 자신의 이름을 딴 캘빈 클라인(Celvin Klein, Ltd.)을 세웁니다. 이해 3월 작은 호텔을 빌려 숆을 열었는데 여기에 뉴욕 대형 백화점 MD가 실수로 내려 그의 쇼룸으로 오게됩니다. 그 MD는 디자인을 마음들어 했고 당시 업계 거물이었던 밀드레드 커스틴(Mildred Custin) 사장에게 연결해 줍니다. 정말 천운이 따른 것이지요. 물론 그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여기서부터 승승장구하지요. 처음에는 여성용 코트를 만들면서 이세계에 입문했고 1973년부터는 세련되고 섹시한 기성복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캘빈 클라인을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도약시킨 것은 1978년부터 시작한 청바지 였습니다. 제품 측면에서 기존과 다르개 캐릭터를 강조한 캘빈 클라인 청바지는 당시 브룩쉴즈(Brooke Shields)를 모델로 한 청바지 광고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블당시 15세의 어린 소녀를 모델로 내세운 캘빈 클라인 광고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발과 노이즈를 일으켰는데요. 이 덕분에 아무튼 엄청난 브랜드 인지도를 얻기되고 성공하게 됩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캘빈 클라인의 브룩쉴즈(Brooke Shields) 광고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3. 캘빈 클라인 포토그래퍼 브루스 웨버(Bruce Weber)
캘빈 클라인 광고는 몇사람의 천재적인 포토그래퍼들로 읺 더욱 빛을 보았습니다. 캘빈 클라인이 추구하는 섹스어필을 단순한 누드나 성적으로 풀어내지않고 거의 예술 수준으로 끌어 올리며 캘빈 클라인 광고 자체를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게끔 했던 것이죠.
그 당시(1980년대)를 풍미했던 세명의 대표적인 포토그래퍼가 캘빈 클라인의 광고를 이끌었는데요. 캘빈 클라인의 초기 브룩쉴즈 광고를 찍은 브루스 웨버(Bruce Weber), 마돈나의 앨범 ‘트루 블루’(True Blue)의 표지 사진으로 유명한 허브 리츠(Herb Ritts), Steven Meisel가 그들입니다. 초기 캘빈 클라인 광고를 담당한 브루스 웨버(Bruce Weber)는 탁월란 감각을 발휘해 캘빈 클라인 광고가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일조합니다. 남녀의 옷을 다 벗겼지만 외설 느낌이 아닌 작품처럼 느끼도록 한 것이죠.
▽ 캘빈 클라인 포토그래퍼 브루스 웨버(Bruce Weber)의 인쇄 광고 중 하나, 1987 Obsession
또 하나의 전설적인 포토그래퍼 허브 리츠(Herb Ritts)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1980년,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은 당시 15세(14세라는 기사도 있습니다.) 어린 소녀(?, 성숙할대로 성숙했지만) 브룩쉴즈(Brooke Shields)를 내세운 광고를 시작합니다.
이 광고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섹스어필하고 유해한 것으로 받아드립니다. 곳곳에 성적인 암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광고는 엄청난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킵니다. 미성년자를 통한 섹스어필광고가 자극적이고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요소가 많다는 것이었지요.
We’re reading us to the mind would Calvin’s out of the body
독서가 영혼과 맞닿아 있다면 캘빈 클라인 진은 내 육체와 맞닿아 있죠
Whenever I get some money I buy Calvin’s and it says that he left I pay the rent Calvin Klein Jeans
돈이 생길때마다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사요. 그 나머지 돈으로는 집세를 내죠.
I’ve got seven Calvin’s in my closet and if they could talk I’d be ruined Calvin Klein Jeans
내 옷장엔 캘빈 진이 일곱 벌이나 있어요, 만약 그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난 타락하고 말 거예요.
You wanna know 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lavin’s?
Nothing
나와 캘빈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아무 것도 없어요
▽ 캘빈 클라인 브룩실즈 인쇄광고
5. 결과 또는 성과
엄청난 사회적인 논란이 일었습니다. 위의 광고 중 가장 유명한 광고카피가 나와 캘빈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아무 것도 없어요 (You wanna know 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lavin’s? Nothing) 캘빈 클라인 광고가 발표되자마자 뉴욕의 ABC, CBS는 즉각 광고 방영을 중지시켰습니다. 광고에서 브룩쉴즈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여성단체, 교육자들의 분노와 항의가 밀려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빈 클라인 청바지는 날개 돋힌듯 팔렸습니다. 이 광고가 나가자마자 다음주에 40만장이팔렸고 단 한달만에 400만장이 팔렸죠.
격렬한 사회적인 논쟁속에서 오히려 캘빈 클라인의 인지도는 높아져갔고 청소년들은 호기심에서라도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구입했던 것이죠.
후에 캘빈 클라인은 마케팅 접근 방식에 대해서 “청바지는 섹스”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더 단단하면할수록 더 판매가 잘됩니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
When asked about his marketing approach, Klein famously declared, “Jeans are sex.” He added, “The tighter they are, the better they s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