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황금 물결, 구와우마을 태백 해바라기 축제 방문기
1. 아홉 마리 소가 눕는 자리, 구와우마을과 태백 해바라기 축제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해발 800m 안팎의 고원에 자리한 구와우마을은 ‘아홉 마리 소가 배불리 먹고 편안히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얻었다.
이름처럼 부드럽고 아늑한 산세가 넓게 펼쳐진 곳이다. 원래는 고랭지 배추를 재배하던 밭이었는데, 2002년 이 자리에 해바라기를 심으면서 국내 최초의 해바라기 축제지로 거듭났다.
매년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약 20만 평 넘는 부지에 100만 송이가 넘는 해바라기와 300여 종의 야생화가 함께 피어나 국내에서 손꼽히는 여름 꽃 명소로 자리잡았다. 지자체가 아니라 해바라기문화재단과 마을 축제위원회가 주도하는 순수 민간 축제라는 점도 이 축제의 특별한 지점이다. 백두대간 산마루 아래, 해발 800m라는 고도 덕분에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는 국내 유일에 가까운 경험을 제공한다.
2. 폭염 대신 이슬비, 태백에서 만난 다른 계절
수도권은 온통 폭염주의보로 들끓고 있었는데, 태백으로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구와우마을 축제장에 도착할 무렵엔 그 비가 어느새 이슬비로 잦아들어 있었다.

같은 날, 같은 나라 안에서 이렇게 다른 하늘을 마주하다니, 고원 지대라는 이곳의 지형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입장료는 7,000원(단체는 5,000원)을 내고 들어갔는데, 입장권에 별도의 표시 없이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통과가 되는 방식이라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재입장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3. 잣나무숲 사이로 스며든 안개
이슬비가 내린 탓인지 해바라기밭을 둘러싼 언덕과 산자락에는 운무가 짙게 깔려 있었다. 오른쪽 관람 코스를 따라 걷다 잣나무숲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나무 사이사이로 안개가 흘러 다니는 풍경이 제법 신비로웠다. 곧게 뻗은 잣나무 기둥들 사이로 뿌옇게 번지는 안개는, 노란 해바라기밭과는 또 다른 결의 고요함을 안겨주었다.

4. 운무와 뒤섞인 해바라기밭
언덕에 올라 아래로 펼쳐진 해바라기밭을 내려다보니, 노란 꽃물결 위로 운무가 낮게 깔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맑은 날이었다면 그저 눈부신 황금빛 평원이었을 텐데, 안개가 더해지니 꽃밭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몽환적인 장면으로 바뀌었다. 날씨가 아쉬울 법도 했지만, 오히려 이 흐린 날씨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풍경이라 생각하니 그것대로 귀한 순간이었다.

5. 2층 전망대에서 담은 해바라기밭 전경
다시 해바라기밭으로 내려와 관람 동선의 끝자락에 있는 2층 목조 전망대에 올랐다. 이곳에 서면 해바라기밭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었고, 나도 그 틈 사이에 끼어 2층 난간 너머로 펼쳐진 해바라기밭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평소 프레임을 활용한 구도를 좋아하는 터라, 전망대의 사각 난간을 하나의 액자 삼아 그 안에 해바라기 물결을 가두는 구도로 여러 장을 찍어보았다. 난간이라는 인공적인 선과 꽃밭이라는 자연스러운 곡선이 대비를 이루며 사진에 짜임새를 더해주었다.


2층 전망대 프레임 풍경



6. 왼쪽 동선을 따라 내려오며
전망대에서 내려와 이번엔 왼쪽 방향으로 관람로를 따라 걸었다. 군데군데 해바라기를 배경 삼아 인물 없이도 풍경만으로 그림이 되는 지점들이 이어졌다. 어디를 향해 셔터를 눌러도 노란빛이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이 축제만의 넉넉함이 느껴지는 구간이었다.

7. 꽃밭 사이 예술 작품들
구와우마을 해바라기 축제는 단순히 꽃만 보여주는 축제가 아니라, 대지를 캔버스 삼아 예술가들의 손길을 더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관람로 곳곳에 야외 조각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서용선, 이태량, 앤디 탐슨을 비롯한 여러 작가의 작품 10여 점이 ‘구와우 공공미술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매년 자리를 바꿔가며 전시된다고 한다.
인근 카페에서는 이태량 작가의 회화 작품 전시도 함께 열린다. 다만 개별 작품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 놓이는지, 각 작품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해마다 구성이 바뀌는 데다 축제 측이 공식적으로 상세히 밝힌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 그 자체가 최고의 예술이므로 인간의 손길은 그 자연을 거들 뿐이라는 것이 이 축제가 내세우는 방향이라 하니, 작품 하나하나에 붙은 설명을 찾기보다는 해바라기밭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조각들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이 축제를 즐기는 방식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걷는 동안 노란 꽃 사이사이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조각품들을 만날 때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반가움이 있었다.
8. 사진으로 확인한 예술 작품들
이번엔 직접 찍어오신 사진 속 안내판을 근거로, 확인 가능한 작품들을 정리해봤다.
- 우보예찬(牛步禮讚) 시비와 ‘구와우(九臥牛)’ 조각 — 뿔처럼 휘어진 두 개의 큰 강판이 마주 보고 서 있는 대형 조형물로, 그 아래 검은 대리석 시비에는 시인 송호근의 「우보예찬」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소걸음은 우아하다”로 시작해 “느릿하지만 꾸준히 천리를 가고, 우직하지만 실족이 없는 게 ‘우보의 미학’이다”로 이어지는 이 시는, 마을 이름의 유래인 ‘아홉 마리 소가 누운 자리(九臥牛)’라는 뜻을 조형물과 함께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느릿하지만 꾸준한 소걸음의 미덕을 노래한 시와, 소뿔을 형상화한 듯한 육중한 철제 조형물이 나란히 놓여 있어 이 축제의 정신적 상징물처럼 느껴지는 자리였다.



- 변선(蹁躚) – 삼수령에서 만나다 — 김주환 작가가 2019년에 만든 작품이다. 안내판에는 이 작품이 세 강의 발원이자 세 바다의 시작이 되는 빗방울이 떨어져 퍼져나가는 형상과 태백의 산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통해 구와우마을과 삼수령의 의미를 담아냈다고 적혀 있다.
- 태백의 삼수령(한강·낙동강·오십천 세 물줄기가 갈라지는 고개)이라는 지역적 상징을 빗방울과 산의 곡선으로 풀어낸 작품인 셈이다. 매끈하게 마감된 짙은 색 철판이 안개 속에서 마치 산줄기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 육면체
해바라기밭 한가운데 놓인 흰색 삼각형 골조의 작품도 있었다. 붉은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그 틀을 통해 배경의 꽃밭을 감상하거나 담아낼 수 있도록 설계된 듯했다.

- 올라가는 사람
팔 하나를 치켜들고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은 듯한 철제 인물상이다. 녹슨 강판을 오려 붙인 실루엣이 마치 위쪽을 향해 몸을 일으키거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동작으로 보이는데, 제목 그대로 ‘올라가는’ 동작, 즉 상승과 도약의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읽힌다. 감상 포인트는 이 인물상을 어떤 배경과 함께 두고 보느냐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드는 습성을 지닌 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해바라기밭 한가운데 선 이 인물상은 꽃과 마찬가지로 위를 향해 손을 뻗는 존재로도 읽힌다. 안개가 짙게 낀 배경에서 이 실루엣만 도드라지게 담으면, 뿌연 대기 속에서도 위를 향해 팔을 뻗는 형상이 한층 극적으로 느껴진다.

- 석탄캐는 사람 : 구부정한 검은 조형물, 태백의 탄광 역사를 담은 작품
앞으로 구부정하게 숙인 곡선형의 검은 철제 조형물로, 태백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태백은 오랫동안 우리나라 최대의 탄광 도시였고, 지금 이 자리가 해바라기로 뒤덮인 고랭지 밭이 되기 전에는 검은 석탄이 이 지역 경제를 지탱했다. 몸을 숙이고 곡괭이를 휘두르는 듯한 형상의 이 조각은 그 노동의 역사를 형상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감상 포인트는 이 어두운 색의 육중한 조형물이 밝은 노란 해바라기밭과 만들어내는 대비다. 화사한 여름 꽃밭 한가운데, 과거 이 땅을 일구었던 노동의 무게가 검은 실루엣으로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축제의 화려함 이면에 있는 지역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장치로 읽힌

-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하여 :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프레임과 모호한 형체의 대비

- 달 : 초승달 모양 곡선, 해바라기밭(해) 속에 놓인 밤의 상징

- 공간소통

이렇게 확인해보니, 구와우마을의 야외 조각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듯했다. 하나는 ‘구와우’라는 마을의 이름과 정체성을 소, 삼수령 같은 소재로 형상화한 상징적 작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방문객이 직접 틀 안에 들어가거나 프레임 삼아 사진을 찍도록 설계된 체험형 설치물들이다. 다만 사진에 담긴 안내판 중 일부는 작가명이나 제목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 모든 작품의 정보를 완전하게 정리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폭염을 피해 찾아간 곳에서 뜻밖에 비와 안개를 만났지만, 덕분에 남들과는 조금 다른 구와우마을을 담아올 수 있었다. 운무에 감싸인 해바라기밭도, 전망대 난간 프레임 속 황금빛 물결도, 걷다가 문득 마주친 조각 작품들도, 모두 이 하루만의 것이었다. 맑은 날의 눈부신 해바라기밭도 궁금해지는, 여운이 긴 방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