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오르는 가을, 두번째 임진강댑싸리공원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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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타오르는 가을, 두번째 임진강댑싸리공원 방문기

2026년 10월 14일 · @Happist

프롤로그 · 푸르렀던 약속

지난번 임진강댑싸리공원을 찾았을 때, 나는 조금 일렀습니다. 동글동글 부풀어 오른 댑싸리는 한여름의 초록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나는 붉게 물든 정원을 상상하며 갔다가 푸른 물결 앞에서 가만히 서 있다 돌아왔지요. 초록도 아름다웠지만, 마음 한켠에는 작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때 속으로 약속 하나를 했어요. 가을이 깊어지면, 댑싸리가 제 몸을 붉게 태울 무렵에 다시 오겠다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느꼈습니다. 달력을 넘기다 문득 시간이 맞았고, 며칠 사이 날씨가 한결 서늘해졌으니 댑싸리도 어느 정도 익었을 거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농부가 감이 익는 때를 손끝으로 아는 것처럼, 나도 가을이 깊어지는 속도를 눈치껏 헤아려 본 셈입니다.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서고, 몸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창밖이 유난히 환했습니다. 구름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 투명한 하늘이었지요. 이런 날은 어디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확신이 듭니다. 하늘이 도화지라면 오늘은 가장 깨끗한 새 도화지였고, 그 위에 붉은 댑싸리를 올려놓으면 얼마나 어울릴까 생각하니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졌습니다.

집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뺨에 닿는 공기가 문득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어제와 다르고, 지난주와는 더더욱 다른 기운이었어요. 여름의 끝자락이 남겨 두었던 미지근한 숨결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맑고 서늘한 바람이 소매 사이로 스며들었습니다. 코끝이 살짝 시큰해질 만큼 깨끗한 냉기.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아, 완연히 가을이구나.

계절은 그렇게 소리 없이 문턱을 넘어옵니다. 달력이 알려 주기도 전에 피부가 먼저 알아채고, 마음이 그 뒤를 따라 천천히 물들어 가지요. 차가운 공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나는 오늘의 여행이 아주 좋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가을 아침의 청량함은 언제나 좋은 하루의 서막이니까요.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약속을 지키러, 붉게 타오르는 정원을 향해 차의 시동을 걸었습니다.

가는 길 · 붉은 예감

평일의 도로는 한없이 너그러웠습니다. 주말이면 꽃 구경 나선 차들로 길게 늘어서던 길이 오늘은 마치 나만을 위해 비워 둔 것처럼 한산했어요. 브레이크를 밟을 일이 거의 없이 차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고, 창문 너머로 스치는 가을 들판이 느린 필름처럼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막히지 않는 길 위에서는 마음도 덩달아 막힘없이 풀어집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노래에 맞춰 핸들을 쥔 손가락이 가볍게 박자를 탔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 어딘가에서 붉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노을이 땅에 내려앉았나 싶었어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댑싸리였습니다. 누군가의 텃밭 가장자리, 혹은 집 앞 작은 화단에 심어 둔 댑싸리가 불을 지핀 듯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었는데도 그 붉은빛은 망막에 오래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길을 따라 달리는 동안 종종, 마치 이정표처럼 붉은 댑싸리가 얼굴을 내밀었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그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콩콩 뛰었습니다. 길가의 작은 댑싸리가 이 정도로 붉다면, 수만 그루가 모여 있는 공원은 얼마나 장관일까. 기대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부푼 마음은 액셀을 밟는 발끝까지 전해졌습니다.

여행의 반은 설렘이라고들 하지요. 목적지에 닿기 전, 가는 길에서 이미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길가의 붉은 점 하나하나가 ‘곧 도착할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돼.’라고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 고요한 도로 위에서, 나는 가을이 건네는 작은 예고편을 한 장면씩 천천히 감상하며 달렸습니다.

지난 방문에서는 푸른 댑싸리만 보았으니, 오늘의 붉음이 더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아쉬움이 기대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나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 따뜻함을 안고 나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주차장의 황금 자리 · 작은 행운

시계가 열두 시를 조금 넘긴 무렵, 마침내 임진강댑싸리공원 주차장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어요. 평일 한낮인데도 주차장이 거의 가득 차 있었거든요. 줄지어 선 차들의 반짝이는 지붕이 가을 햇살을 되받아 은빛 물결처럼 일렁였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어쩐지 정겹고 든든했습니다. 붉게 익은 댑싸리를 보려는 마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거지요.

나에게 좋은 자리란 이런 곳입니다. 공원 입구에서 가장 가까워서, 최대한 적게 걸어도 되는 곳. 꽃구경의 낭만이야 걷는 데 있다고들 하지만, 정작 정원에 닿기도 전에 지쳐 버리면 아까운 힘을 낭비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천천히 차를 몰며 입구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있을까, 없을까. 이 정도 붐비는 날이라면 기대하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세상에, 공원 입구에서 아주 가까운 자리, 내가 속으로 ‘황금 자리’라 이름 붙인 그 자리에 딱 한 칸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누군가 방금 막 떠난 듯,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입니다. 핸들을 돌려 조심스럽게 차를 넣으며, 나는 속으로 작게 환호했습니다. 오늘은 하늘도 길도 자리도, 모든 것이 내 편이구나. 시동을 끄고 문을 열자 서늘한 가을 공기가 상쾌하게 밀려들었습니다.

주차장이 이렇게 북적이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댑싸리가 어느 정도 붉게 익어 절정에 가까워졌기 때문이겠지요. 꽃이든 단풍이든, 절정을 향해 가는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달아오릅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우리는 그 짧고 눈부신 시간을 만나기 위해 각자의 하루를 비워 이곳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작은 행운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 채로 나는 가방을 둘러메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부랴부랴, 하지만 입가에는 웃음을 매단 채로. 붉은 정원이 바로 저기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먼저 성큼성큼 앞서 달려 나갔습니다.

코스모스 길과 하얀 갈대꽃 · 바람이 걷는 길

주차장에서 공원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양편에서 코스모스가 나를 맞아 주었어요. 가느다란 줄기 끝에서 분홍, 하양, 진분홍 꽃잎이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코스모스는 바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꽃이고, 바람이 불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꽃이 됩니다. 오늘은 마침 서늘한 바람이 알맞게 불어서, 길 전체가 한 폭의 물결처럼 부드럽게 일렁였습니다.

나는 걸음을 늦추었습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어요. 이 길은 주차장에서 정원까지 그저 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산책로였으니까요. 이 코스모스 길을 천천히 따라 걷다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낭만이 샘물처럼 솟아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이 길을 걷는다면, 혹은 오랜 친구와 나란히 걸으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 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겠지요. 혼자 걷는 나조차도 어느새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있었습니다.

꽃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릴 때마다 길 위에 얼룩덜룩한 빛무늬가 번졌습니다. 코스모스 한 송이 한 송이가 작은 등불 같았고, 그 등불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디든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벌 한 마리가 꽃에서 꽃으로 부지런히 옮겨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 평화로운 오후가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코스모스 길 너머로, 눈이 번쩍 뜨이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하얀 갈대꽃이었어요. 은빛 솜털 같은 이삭이 가을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하얀 파도처럼 한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찌나 곱던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그저 바라보았습니다. 분홍빛 코스모스와 흰 갈대꽃, 그 위로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세 가지 색이 어우러진 그 풍경은 어떤 화가도 흉내 내기 어려운 가을의 그림이었습니다.

갈대꽃은 화려하지 않아서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붉은 꽃의 강렬함이 심장을 두드린다면, 하얀 갈대꽃의 소박함은 마음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지요. 본격적인 주인공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가슴이 가득 찬 것 같아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각사각, 갈대가 스치는 소리가 가을의 노래처럼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붉게 익은 댑싸리 정원 · 땅 위에 내려앉은 노을

마침내 공원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을 잃었어요.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불그스름하게 타오르는 둥근 물결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댑싸리가 저마다 동그란 몸을 부풀린 채, 와인빛과 주홍빛,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어요. 마치 하늘의 노을이 오늘만 땅으로 내려와 쉬고 있는 것 같았지요. 눈대중으로 보아 7할 이상은 이미 붉게 익어 있었습니다. 푸르던 초록이 어느 틈에 이토록 뜨거운 색으로 바뀌었는지, 계절의 연금술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물론 아직 푸른 기운이 남은 댑싸리도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특히 붉게 물든 덩어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운데 안쪽으로 연둣빛과 푸른빛이 은근히 비쳤어요. 겉은 이미 불타오르는데 속은 아직 여름의 기억을 놓지 못한 것처럼요. 그러니 완벽한 절정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점이 조금 아쉬웠어요. 하지만 그 아쉬움이 풍경을 덜 아름답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붉음과 푸름이 서로 스며드는 경계에서 생겨나는 오묘한 색의 층이 이 정원만의 독특한 표정이 되어 주었으니까요.

나는 붉은 물결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 앞에서 댑싸리들이 동그란 얼굴을 내밀었어요. 가까이서 보면 가느다란 잎이 촘촘하게 모여 마치 곱게 빗은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웠고, 멀리서 보면 큰 구슬을 흩뿌려 놓은 듯 아기자기했습니다. 햇살이 비껴들 때면 붉은빛이 한층 깊어져서, 어떤 순간에는 정원 전체가 은은히 발광하는 듯했지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덕분에 빛이 거침없이 쏟아졌고, 그 빛을 가득 받은 댑싸리는 말 그대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붉은 정원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연인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며 웃고, 친구들은 나란히 서서 붉은 배경을 등지고 포즈를 취하며 까르르 웃었어요. 그 웃음소리가 가을 공기 속으로 번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곳이 단지 식물이 모인 공원이 아니라 행복이 모이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순해지니까요.

그리고 나는 속으로 계산해 보았습니다. 이대로 일주일쯤 더 지나면, 안쪽의 푸른빛마저 말끔히 걷히고 정원이 온통 붉게 물들겠구나. 그때가 되면 얼마나 눈부실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다음 주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아름다움은 기다리는 즐거움까지 선물합니다. 나는 지금의 붉음을 눈에 가득 담으면서, 일주일 뒤의 더 붉은 정원을 마음속에 미리 그려 보았습니다.

정원의 주인공은 단연 붉은 댑싸리였지만, 이 무대에는 훌륭한 조연들도 있었습니다.

한쪽 자락에는 보랏빛 국화가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붉은 물결 옆에서 은은히 번지는 보라색은 마치 노을 끝자락에 걸린 저녁 어스름 같았습니다.

그리고 공원의 바깥 둘레에는 백일홍이 둥글게 늘어서서 임진강댑싸리공원 전체를 따뜻하게 에워싸고 있었지요. 빨강, 주황, 분홍, 노랑. 백일홍이 두른 알록달록한 울타리는 마치 꽃으로 지은 담장 같아서, 이 정원이 한 송이의 커다란 꽃다발처럼 느껴지게 했습니다.

하늘계단 · 하늘 가까이 오르는 길

정원 한가운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역시 하늘계단 포토존입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이 계단이 텅 비어 있었어요. 푸른 댑싸리 사이에서 홀로 하늘을 향해 서 있는 계단은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계단 앞에는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어요. 차례를 기다리며 서로 사진을 봐 주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어떤 표정이 좋을지 속닥거리는 모습이 풍경의 또 다른 한 조각이 되어 있었습니다.

빈 계단이 사람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감회에 젖었습니다. 한 번 찾아와 보고 아쉬워했던 마음, 그 마음이 다시 이곳으로 데려온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이 계단 앞에 서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조차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붉은 정원을 눈앞에 두고 맑은 하늘 아래 서 있으니, 기다림이 오히려 여행의 한 장면이 되어 주었으니까요.

차례가 되어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습니다. 한 칸 한 칸 오를 때마다 시야가 조금씩 높아졌지요. 그리고 마지막 칸에 서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숨을 멈추었습니다. 발아래로는 붉게 불타오르는 댑싸리가 끝없이 일렁이고, 머리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어요. 붉음과 푸름이 서로를 마주 보며 온 세상을 둘로 나누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사이에 선 나는 마치 하늘과 땅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 같았지요.

위에서 내려다본 댑싸리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모습이 아니라 거대한 붉은 융단이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융단이 천천히 출렁였고, 그 위로 햇살이 금빛 가루처럼 쏟아졌어요. 멀리 임진강 쪽으로 이어지는 시야 끝에서는 하늘과 땅이 아스라이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 풍경을 눈에 담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했지만, 마음에 새기는 데는 아마 평생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가벼웠습니다. 하늘에 가까이 다녀온 사람의 걸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지요. 사진 속에는 담기지 않을 그 순간의 공기, 그 순간의 빛, 그 순간의 두근거림을 나는 가슴 한구석에 곱게 접어 넣었습니다.

메밀밭 자리와 버베나 · 지나간 꽃, 돌아온 꽃

하늘계단 위에서 둘러보니, 지난번에 이곳을 하얗게 덮었던 메밀꽃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눈에 들어왔다기보다는 그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고 해야 맞겠지요. 그때의 메밀밭은 눈이 내린 듯 새하얗고 아름다웠습니다. 바람이 불면 흰 꽃들이 파도처럼 일렁였고,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요. 하지만 오늘 그 자리에는 꽃이 모두 진 뒤였습니다. 꽃이 떠난 자리에는 줄기만 휑하니 남아 있었어요. 빈 들판의 쓸쓸함이 가을바람에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쓸쓸함이 싫지 않았습니다. 꽃은 피었다 지는 것이고, 진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한 철의 주인공이 무대를 내려가면 다음 철의 주인공이 올라오는 것, 그것이 계절의 이치입니다. 비어 있는 메밀밭은 ‘그때 참 예뻤지.’ 하는 회상의 자리가 되어 주었고, 나는 마음속에서 하얀 메밀꽃을 한 번 더 피워 올려 보았습니다.

게다가 메밀밭 둘레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떠난 들판 가장자리에서 코스모스는 산책길을 풍성하고 따뜻하게 채워 주고 있었어요. 분홍빛, 하얀빛 꽃잎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빈 밭의 쓸쓸함을 다정하게 달래 주는 듯했습니다. 꽃이 진 자리를 또 다른 꽃이 지켜 주는 풍경. 이것이야말로 가을 들판이 가진 너그러움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반가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아쉬움으로 남았던 버베나가 이제는 활짝 만개해 있었던 거예요. 예전에는 피다 만 듯 수줍게 숨어 있던 그 꽃이, 오늘은 자줏빛과 보랏빛 작은 꽃송이들을 빼곡히 피워 올려 한 폭의 수채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 만들어 낸 보랏빛 카펫은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볼수록 더 섬세했어요. 한 송이 한 송이가 별처럼 반짝였고, 그 위로 나비 한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았다가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아쉬움은 이렇게 해소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만나지 못한 꽃을 오늘 만나고, 그때 있었던 꽃은 오늘 보지 못하고. 한 번의 방문으로는 정원의 모든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시 찾아오는 이유가 되어 줍니다. 만개한 버베나 앞에서 나는 오래전 약속 하나를 또 지켰다는 뿌듯함에 빙긋 웃었습니다.

백일홍과 코스모스의 산책길 · 연못가에 머문 오후

정원 구경을 마치고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아쉬워서 일부러 천천히 걸었지요. 그런데 그 길 위에서 또 한 번 가슴이 환해졌습니다. 백일홍과 코스모스가 한데 어우러진 길이 나타났거든요. 키 큰 코스모스가 가느다란 몸을 흔들면 그 아래에서 백일홍이 도톰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하늘하늘한 것과 단단한 것, 연한 색과 진한 색이 서로의 옆자리에서 서로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길이었어요. 둘이 이토록 잘 어울린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 길을 지나자 연못이 나타났습니다. 잔잔한 수면은 푸른 하늘을 그대로 품고 있었고, 연못 둘레의 언덕에는 백일홍이 만개한 산책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지요. 언덕을 따라 걷는 동안 양쪽으로 백일홍이 꽃 터널을 이루었습니다. 빨강, 주황, 분홍, 노랑, 자주. 마치 누군가 팔레트를 엎질러 놓은 듯 색색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 있었어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새로운 색이 눈앞에 나타나는 그 길은 걷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했습니다.

연못가에 잠시 멈춰 서서 물 위에 비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수면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고, 바람이 불면 그 하늘이 잔물결에 잘게 부서졌다가 다시 모였어요. 언덕 위의 백일홍이 물 위에도 희미하게 번져 비치니, 꽃 두 겹, 하늘 두 겹의 풍경이었습니다. 이런 순간에는 시계를 보지 않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는지 멈춰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가슴에 차올랐어요.

댑싸리가 주인공이라면, 이 산책길의 꽃들은 음악으로 치면 아름다운 후주 같았습니다. 클라이맥스를 지나고 나서도 여운이 오래 이어지도록 해 주는 선율이지요. 댑싸리 정원에서 한껏 달아올랐던 마음이 백일홍과 코스모스 사이를 걷는 동안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그 가라앉음이 오히려 더 깊은 행복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오늘 본 것은 붉은 댑싸리만이 아니었습니다. 주차장 길의 코스모스, 갈대꽃, 보랏빛 국화, 정원을 에워싼 백일홍, 되살아난 버베나, 그리고 연못 언덕의 꽃길까지. 댑싸리를 제외한 다른 꽃들은 모두 활짝 만개한 상태였어요. 그러니 이 가을 정원은 단 하나의 꽃이 아니라 여러 꽃들이 함께 부르는 합창이었던 셈입니다.

에필로그 · 다음 주의 붉음을 기약하며

공원을 나서려니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입구 곁에 자리한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어요. 마치 이 하루의 마침표를 찍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요.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서늘한 가을 공기에 식은 손끝으로 받아 든 종이컵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가슴까지 천천히 번져 갔습니다. 쌉쌀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오늘 본 붉음이 마음속에서 다시 한 번 피어올랐지요.

커피를 홀짝이며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습니다. 오는 길에는 포천-세종고속도로를 탔는데, 평일 오후의 도로는 갈 때처럼 거의 막힘이 없었어요.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 창밖으로는 흘러가는 가을 풍경. 이보다 더 좋은 귀갓길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고속도로 위, 차창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습니다. 아침의 서늘함은 어느새 포근한 온기로 바뀌었고,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어요. 조수석에 놓아둔 가방 속에는 작은 기념품 하나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붉은 물결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의 풍경은 사진으로 다 옮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빛의 온도와 바람의 결, 꽃잎에 닿던 햇살의 감촉은 오직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댑싸리가 완전한 절정은 아니었습니다. 7할 넘게 붉어졌어도 안쪽에는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온 정원이 한 덩어리의 붉음으로 타오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요. 다른 꽃들은 모두 만개해 있었는데, 정작 주인공만 마지막 단장을 마치지 못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미완이 나는 싫지 않았어요. 완성되지 않은 풍경은 다시 올 이유가 되어 주니까요.

아마 일주일쯤 뒤면 댑싸리가 완전히 붉게 익어 진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줄 것입니다. 푸른 기운이 모두 걷히고 정원 전체가 붉은 불길처럼 번질 때, 하늘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지금과는 또 다른 감동일 테지요. 그래서 나는 다음 주에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푸르렀던 첫 번째 방문과 붉어 가는 두 번째 방문을 지나, 만개한 붉음을 만날 세 번째 방문. 한 정원을 세 번의 계절로 읽어 가는 일은 생각보다 근사한 사치입니다.

그때도 날씨가 오늘처럼 맑기를, 주차장의 황금 자리가 또 한 번 나를 기다려 주기를,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며 나를 맞아 주기를 바라 봅니다. 가을은 짧고, 붉음은 더 짧습니다. 그래서 더 아끼고 싶고, 더 기다려지는 것이겠지요.

임진강댑싸리공원, 그 붉은 물결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를 가을처럼 보냈습니다. 서늘한 아침 공기로 시작해 붉은 노을 같은 정원을 지나,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하루.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번 가을, 꼭 한 번 그 붉은 길 위에 서 보시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와 같은 날, 한 주쯤 뒤에 다시 만나 오래도록 붉게 타오르는 그 풍경 앞에서 함께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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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절벽 허공에 매달린 잔도(잔잔한 허공 다리)를 걸으며 웅장한 화산 주상절리와 옥빛 한탄강 협곡을 발밑으로 내려다보는 스릴은 그야말로 장관인데요!
다만 연천·철원 일대는 대중교통 배차간격이 길어 자가용 없이 방문하기가 쉽지 않고, 주말에는 셔틀버스와 주차장 대기 줄이 길어 운전 피로도가 상당합니다.
운전 스트레스 없이 서울 주요 거점에서 출발해 편안하게 다녀오고 싶다면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 트레킹 전용 버스투어’**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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