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무에서 한낮 꽃무릇까지, 고창 선운사 꽃무릇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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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운무에서 한낮 꽃무릇까지, 고창 선운사 꽃무릇 방문기

옥천 용암사에서 새벽 운무와 일출을 보고 나니 아직 오전 7시 남짓이었다. 문득 선운사 꽃무릇이 활짝 피었다는 SNS 글이 떠올라, 그 길로 차를 돌려 고창으로 향했다.

졸음과의 사투, 예상보다 다섯 시간 늦은 도착

처음 내비게이션에 선운사를 찍었을 때는 오전 8시 7분 도착 예정이었다. 이 정도면 이른 아침의 고즈넉한 선운사 풍경까지 볼 수 있겠다 싶어 기대가 컸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감당하기 힘든 졸음이 몰려왔다. 이러다 사고가 나겠다 싶어 휴게소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 보니 예상 도착 시간은 오전 11시를 훌쩍 넘겨 있었다.

결국 여유롭게 고속도로를 달려 거의 정오 무렵에야 선운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주차장에 시원한 그늘 자리가 남아 있어 그곳에 차를 세우고 선운사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선운사로, 개울 따라 핀 꽃무릇

주차장에서 선운사로 이어지는 길 옆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울 양편으로 붉은 꽃무릇이 활짝 피어 있었다. 선운사에 닿기도 전에 이미 붉은 물결을 만난 셈이다. 조금 더 걷자 넓은 들판과 언덕이 나타났는데, 언덕 전체를 뒤덮은 꽃무릇이 멋진 풍광을 보여주었다.

조금 더 올라가 일주문을 지나면 카페 앞으로 넓은 광장이 나온다.

이곳은 해마다 붉은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꽃무릇 군락으로 유명한 자리인데, 이번에는 꽃이 다소 듬성듬성 피어 있어 다소 아쉬웠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꽃무릇밭을 담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인 만큼, 촘촘히 만개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도솔천을 따라, 붉게 물든 언덕

선운사 도솔천을 따라 걷는데, 물이 줄어든 탓인지 도솔천 물이 다소 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도솔천 건너편 언덕에는 붉은 꽃무릇이 만개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도솔천에 비친 꽃무릇의 반영을 담기도 하고, 물가에 피어오른 꽃무릇을 도솔천과 함께 프레임에 담기도 했다.

도솔천을 따라 걷다가 중간쯤 징검다리를 건너, 도솔천 언덕의 꽃무릇 군락길을 따라 내려왔다. 이 구간에는 근사한 목재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데크길 한쪽에 앉아 서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주는 노부부의 모습이 무척 정겨웠다.

데크길을 벗어나서는 꽃무릇 군락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도솔천 가에는 하나둘 피어오른 꽃무릇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낙엽 더미 속에서 피어난 꽃도 있었다. 마치 강인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솔천변 고목 아래 피어오른 꽃무릇도 눈길을 끌었는데, 세월을 머금은 고목과 붉은 꽃무릇이 묘하게 어우러져 색다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꽃무릇, 그리고 절 부근에 많은 이유

선운사의 꽃무릇은 도솔천 주변과 도솔암 가는 산길을 따라 지천으로 피어난다. 이 꽃이 유독 절 주변에 많이 심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꽃무릇 뿌리에 방부 성분이 있어 탱화를 그리거나 불경을 엮을 때 좀이 슬지 않도록 방부제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 ‘상사화’라 불리며 잎과 꽃이 서로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나지 못해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는 연분홍빛으로 여름에 피는 상사화와 붉은빛으로 초가을에 피는 꽃무릇(석산)은 서로 다른 꽃이라고 한다.

한여름 강릉 선교장에서 만난 배롱나무와 상사화

카페 앞, 우연히 담긴 뒷모습

도솔천을 따라 내려온 뒤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넘어왔다.

문득 커피 한 잔이 생각나 카페로 향했는데,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베란다에서 꽃무릇밭을 조망하고 싶어졌다. 꽃무릇밭 가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고, 그 뒷모습과 꽃무릇밭을 함께 담았다. 마치 본능처럼 셔터가 눌린 순간이었다.

꽃무릇밭과 푸른 하늘, 싱그러운 나무가 어우러진 이 풍경은 오늘 하루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장면이었다.

총평, 절정 직전의 좋은 컨디션

이번 선운사 꽃무릇은 절정이 막 지나기 전이라 꽃 상태가 아주 좋았다. 몇몇 구간에서는 듬성듬성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도솔천을 따라 3km 가까이 이어지는 붉은 물결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밤새 운무를 좇느라 지친 몸이었지만, 붉게 물든 도솔천 풍경 앞에서는 그 피로마저 잊을 만했다.

마치며

새벽에는 옥천 용암사에서 운해와 일출을, 한낮에는 고창 선운사에서 붉은 꽃무릇을 — 하루 안에 전혀 다른 두 가지 절경을 욕심껏 담은 날이었다. 졸음과 씨름하느라 예정보다 다섯 시간이나 늦어졌지만, 그 덕분에 한낮의 볕 아래 더 선명하게 빛나는 꽃무릇을 만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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