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옥헌 원림 출사 유감 — 병든 배롱나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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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원림 출사 유감 — 병든 배롱나무 앞에서

새벽 세 시, 다시 담양으로

8월 12일 새벽 세 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지난 7월 30일, 아직 채 여물지 않은 꽃송이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아쉬움 때문이었다. 예전의 경험으로는 명옥헌 원림의 배롱나무는 8월 중순은 되어야 비로소 만개한다. 그 절정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두 번째 출사에 나선 것이다.

쉬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다섯 시 반이 넘어가자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백미러 속으로 스며드는 새벽빛과 가로등 불빛이 묘하게 감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몇 번이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그 장면을 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그대로 내달렸다. 여섯 시 무렵, 마침내 명옥헌 원림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원림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도 없었다. 지난 7월 30일 방문 때만 해도 이른 시간부터 열 팀은 족히 몰려들어 삼각대 세울 자리조차 옹색했던 그곳이, 오늘은 적막하기만 했다.

사람만 없는 게 아니었다. 꽃도 없었다.

원림 옆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한숨을 내쉬며 건넨 말씀은 짧고도 무거웠다. “올해는 다 죽었어.” 꽃가지를 가까이 들여다보니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화사해야 할 꽃송이 옆으로 하얀 병반이 번져 있었다.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듯, 혹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었다.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배롱나무 주머니깍지벌레와 흰가루병이 겹쳐 나타난 피해였다. 결국 올여름 명옥헌의 배롱나무는 병해를 이기지 못하고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다.

정보에 밝은 이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그 바글바글하던 인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이유였다. 나처럼 소식에 늦은 사람만이 새벽을 뚫고 달려와 헛걸음을 한 셈이다.

그래도 카메라를 거두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리기엔 너무 아쉬웠다. 연못 위에 떨어져 고인 배롱나무 꽃잎 무리로 눈을 돌렸다. 색이 너무 담백하게 나와 후보정으로 채도를 조금 끌어올렸다. 만개한 나무를 담지는 못했지만, 수면 위로 흩뿌려진 붉은 꽃잎들만으로도 이 원림이 품어온 여름의 잔영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떠올렸다. 2010년 8월 21일, 광주 출장길에 일정을 마치고 늦은 오후 서둘러 달려와 담았던 명옥헌의 절정. 연못 가득 붉게 물든 배롱나무와 그 그림자를 고스란히 되비추던 잔잔한 수면. 그날의 기억이 오늘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명옥헌 원림 배롱나무

명옥헌, 그 자리에 대하여

명옥헌은 오희도(1583~1624)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터에, 아들 오이정이 1652년 무렵 정자를 짓고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판 뒤 둘레에 꽃나무를 심어 가꾼 원림이다. 정자 앞뒤로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치는 소리와 같다 하여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엽 정원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귀한 자리로 꼽힌다.

그리고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여름날의 배롱나무다. 백일 동안 붉게 핀다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해마다 8월이면 연못을 붉은 융단처럼 물들이며 전국의 사진가들을 불러 모은다. 시인 이성복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붉은 꽃을 매달아 올리는 배롱나무의 강인함을 노래한 바 있다. 그 시구를 떠올리면, 올해의 병든 나무 역시 언젠가는 다시 그 억센 생명력을 회복하리라는 믿음을 가져보게 된다.

남는 아쉬움, 그리고 기다림

이번 출사는 결과적으로 ‘헛탕’이었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화려한 만개 사진 대신, 병들어 스러져가는 꽃과 연못에 떨어진 꽃잎, 그리고 십수 년 전의 절정을 나란히 마주하며 한 원림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절정만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쇠락의 순간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셔터를 누르는 것이 사진가의 일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겼다.

내년 여름, 명옥헌의 배롱나무가 병을 훌훌 털어내고 다시금 연못 가득 붉은 융단을 펼쳐놓기를 바란다. 그날엔 새벽 세 시의 고단함도, 텅 빈 원림 앞에서의 한숨도 없이 오롯이 절정만을 담아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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