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장군과 사육신이 함께 잠든 곳, 논산 충곡서원 배롱나무 방문기
1. 계백에서 사육신까지, 시대를 뛰어넘은 충절의 서원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수락산(또는 충혼산이라고도 불린다) 아래 자리한 충곡서원은 1680년, 숙종 6년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처음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 곧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 여섯 분만을 모셔 ‘육신서원(六臣書院)’이라 불렸다.
이후 백제의 마지막 명장 계백과 병자호란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익겸이 함께 모셔지면서 ‘팔현서원(八賢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후대로 갈수록 배향 인물이 계속 늘어 지금은 무려 18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 서원의 가장 독특한 점은 계백을 주벽(主壁, 중심에 모시는 위패)으로 삼아 660년 황산벌에서 신라·당 연합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한 백제 장군과, 800여 년 뒤 단종을 향한 절의를 지키다 죽음을 맞은 조선의 사육신을 한자리에 모신다는 사실이다. 시대도 나라도 다른 두 충절의 계보가 ‘충(忠)’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나란히 놓인 셈이다. 이후로도 이현동, 박증, 김정망, 김홍익, 이민진, 김만중, 박종, 조병시, 김자빈, 이학순 등 11인이 추가로 배향되며 지금의 규모를 갖췄다.
이렇게 오랜 세월 지역민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던 충곡서원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1868년(혹은 1871년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훼철되어 사우만 겨우 남았고, 이후 1933~1935년 사이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사우만 먼저 중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퇴락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정연한 모습은 1977년, 국가와 지방비를 들여 원래 규모대로 대대적으로 복원한 결과다. 이때 사우는 물론 동재와 서재, 외삼문과 내삼문, 담장까지 옛 주춧돌 자리를 따라 새로 지었다. 현재는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로 관리되고 있다.
2. SNS 속는 셈치고 찾아간 길, 홍살문 아래 그늘
SNS에서 충곡서원 배롱나무가 활짝 피었다는 사진을 보고, 속는 셈 치고 다녀왔다.
서원이 있는 동네에 들어서니 서원까지 곧게 뻗은 일직선 길이 나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다 중간쯤 이르면 홍살문이 서 있는데, 그 아래로 좁은 1차선 도로가 그대로 이어진다. 홍살문을 지나면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로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보내주신 사진으로 확인해보니, 둥글고 넓게 퍼진 수관에 자잘한 이파리가 촘촘히 달린 모습이 마을 입구나 서원, 정자 같은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자목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이런 자리에 심어 오래도록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는 대개 느티나무인 경우가 많다. 사진 속 나무의 둥근 수형과 짙고 풍성한 잎의 질감도 느티나무의 특징과 잘 맞아떨어져, 이 나무 역시 느티나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잎이나 나무껍질을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서 100%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은 참고해두면 좋겠다.
아쉽게도 그 그늘은 서울에서 왔을 법한 택시 한 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무리해서 그 그늘 아래 주차를 시도하다 결국 포기하고, 서원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넓디넓은 주차장에 내 차만 덩그러니 서 있으니 어쩐지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3. 충곡서원지비, 거북과 용이 지키는 충절의 기록
서원 앞에는 ‘충곡서원지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 거북 형상의 귀부(龜趺, 비석 받침돌)와 생동감 있는 용이 조각된 이수(螭首, 비석 머릿돌)를 얹은 이 비석은, 계백 장군과 사육신의 충절을 기록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이런 형식의 비석은 전통적으로 국가나 유림이 공인한 인물의 공덕을 기리는 격식 높은 비에 주로 쓰이는데, 거북은 장수와 안정을, 용은 신성함과 권위를 상징한다. 백제의 무장과 조선의 문신들이 한 서원에 함께 모셔진 이 독특한 사연을, 비석의 격식 있는 조형 자체가 조용히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4. 외삼문 틈으로 본 배롱나무, 그리고 그 안쪽 풍경
서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외삼문’이라 불린다. 밖에서 보면 맨 오른쪽의 열린 문틈으로 배롱나무꽃이 살짝 비쳐 보이는데, 이 풍경을 다소 감성적으로 담아보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서원의 본당인 사우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보이고, 그 양옆으로는 오래된 배롱나무 두 그루가 마치 서원을 지키듯 서서 붉은 꽃을 뽐내고 있었다. 다만 이번 방문에서는 배롱나무꽃이 이미 절정을 지난 뒤라 다소 아쉬운 모습이었다.
5. 동재와 서재, 서원 교육의 두 축
내삼문 앞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건물이 한 채씩 보이는데, 오른쪽 건물이 ‘동재’, 왼쪽 건물이 ‘서재’다. 얼마 전 방문했던 안동 병산서원에서도 입교당을 바라보고 오른편에 동재, 왼편에 서재가 자리했던 것과 같은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에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숙식하며 공부하던 기숙사 겸 강학 공간이었다.
조선의 서원은 앞쪽에 교육 공간(강당)을, 뒤쪽에 제향 공간(사당)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강당 좌우에 자리한 동재와 서재는 그 강학 기능을 뒷받침하는 핵심 시설이었다. 대체로 나이나 학문 서열이 높은 유생이 동재에, 그보다 아래인 유생이 서재에 머무는 방식으로 위계를 나누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성리학적 예법에서 동쪽을 서쪽보다 높은 자리로 여겼던 관념과 맞닿아 있다.
단순한 숙소를 넘어, 유생들이 함께 기거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던 생활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지금 충곡서원의 동재와 서재는 각 8평 규모의 소박한 목조 기와 건물로, 1977년 복원 당시 옛 주초석 자리를 그대로 살려 다시 지어졌다.
6. 창녕성씨 유허비, 매죽헌 성삼문을 기리다
서재 쪽에는 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얹은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신에는 ‘창녕성선생유허비(昌寧成先生遺墟碑)’라 적혀 있는데, 짐작하신 대로 매죽헌 성삼문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 맞다. ‘창녕’은 성삼문의 본관으로, 그가 창녕 성씨 가문 출신임을 밝히는 표현이다.
이 비석에는 흥미로운 이력이 있다. 원래 1673년, 현종 14년에 지금의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자리에 세워졌던 비석인데, 이후 성삼문의 관작이 회복되자 1692년 사당을 동쪽으로 옮기고 성삼문과 절의를 지킨 다섯 신하를 함께 모셨으며, 1702년에는 계백을 주벽으로 삼아 향현 여덟 분을 모시는 지금의 체제로 자리 잡으면서 이 유허비 역시 충곡서원 경내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성삼문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했던 인물로,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목숨을 걸고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당했다. 그의 절의는 노량진 사육신묘, 영월 창절사, 홍주 노은서원 등 전국 여러 곳에서 기려지고 있는데, 논산의 이 유허비 역시 그 전국적인 추모의 한 자락이 이 땅에 남긴 흔적인 셈이다.
7. 내삼문 너머, 충곡서원 현판이 걸린 사우
내삼문을 지나면 계단 위로 ‘충곡서원’ 현판이 걸린 건물, 곧 18위의 위패를 모신 사우가 나온다. 내삼문 근처 좌우로도 배롱나무가 심겨 있어, 붉은 꽃이 제향 공간의 엄숙함에 은은한 화사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8. 담장 너머로 바라본 풍경이 오히려 좋았다
돌아 나오는 길, 오래된 서원과 배롱나무의 조화는 뜻밖에도 주차장 쪽에서 바라본 풍경이 가장 볼만했다. 기와 얹은 담장과 그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배롱나무꽃, 그리고 오래된 한옥 지붕이 한데 어우러지는 그 구도가 이번 방문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피어난 꽃이 만들어내는 소박한 조화가 있었다.
절정은 이미 지났고, 서울 택시에 그늘도 빼앗기고, 넓은 주차장엔 내 차만 덩그러니 남았던 다소 머쓱한 방문이었다. 그래도 백제의 장군과 조선의 충신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 작은 서원을, 담장 너머 배롱나무꽃과 함께 눈에 담고 온 하루였다. SNS 속는 셈 치고 나선 길이었지만, 속아서 손해 볼 것 없는 발걸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