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천 물소리를 따라, 고창 선운사 배롱나무 출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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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 물소리를 따라, 고창 선운사 배롱나무 출사기도솔천 물소리를 따라, 고창 선운사 배롱나무 출사기

1. 검단선사의 도량, 선운사의 유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 자락에 자리한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인 577년,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지만, 당시 이 땅이 백제의 영토였던 사정을 감안하면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더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선운(禪雲)’이라는 이름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을 담고 있고, 산 이름이기도 한 ‘도솔(兜率)’은 미륵부처가 머문다는 도솔천궁에서 따왔다. 조선 후기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의 요사채, 3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을 만큼 번창했던 대찰이었으니, 지금 걷는 이 길이 예사 길은 아닌 셈이다.

지금도 선운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만세루를 비롯해 금동지장보살좌상, 도솔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본사로서 여전히 호남을 대표하는 사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2. 매미 소리 요란한 여름, 그늘을 찾아 걷는 2km

요즘 매미 소리가 유난하다. 선운사 주차장에서 경내까지는 거의 2km에 가까운 거리라 초입부터 걸음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벚나무가 우거져 그늘이 넉넉했다. 여름볕 아래에서도 걸을 만했던 건 순전히 그 나무들 덕분이었다. 봄이면 벚꽃길이었을 이 구간이 여름엔 초록 그늘 터널이 되어주는 셈이다.

3. 도솔천, 싱그럽고 시원한 첫인상

일주문을 지나 도솔천을 따라 걷는 길가에 접어드니 계곡물이 정말 싱그럽고 시원해 보였다. 더위에 지쳐가던 참이었는데, 눈으로라도 그 서늘함을 나눠 받는 기분이었다.

물소리를 벗 삼아 걷다 보니 어느새 선운사 경내에 다다랐고, 저 멀리 꽃이 만발한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4. 만세루 창 너머로 담은 배롱나무

경내 한가운데로 들어서니 마루가 넓게 펼쳐진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알고 보니 보물로 지정된 만세루였다. 백제 때 선운사를 짓고 남은 목재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유서 깊은 강당 건물로, 다듬지 않은 부재를 그대로 써서 기둥과 서까래가 저마다 자연스럽게 휘어 있는 게 특징이다.

그 만세루의 창문 너머로 화사하게 핀 배롱나무꽃이 살짝 걸쳐 보이는데, 그 풍경이 정말 근사했다. 나는 원래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하는 편이라, 창틀이 꽃을 액자처럼 감싸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담았다.

만세루 마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시원한 차 한 잔을 곁들여 담소를 나누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만 이번엔 혼자 온 길이라 여유롭게 차를 즐기는 대신, 만세루에 직접 올라 내부의 결 고운 나무 구조와 창문 너머로 비치는 바깥 풍경을 번갈아 담는 데 집중했다.

5. 공사 중인 대웅전, 그래도 눈길을 끈 목조 장식

만세루 앞으로는 선운사의 중심 전각인 대웅전이 자리한다. 아쉽게도 이번엔 공사 중이라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목조 장식만으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처마 밑으로는 기둥과 기둥 사이사이까지 촘촘히 짜 올린 다포(多包) 양식의 공포가 겹겹이 쌓여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오랜 세월에 빛이 바랜 단청이 은은하게 남아 고졸한 멋을 더하고 있었다. 짙은 청록과 붉은빛이 섞인 단청 문양 사이로 작은 조각 장식들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되 과하지 않은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의 품격이 그대로 느껴졌다.

대웅전 앞에는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서 있었는데, 그 옆으로 장엄하게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오래된 석탑과 붉은 배롱나무의 조합이라니,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그림이 있을까 싶었다.

6. 기념품점이 되어버린 찻집의 꿈

날이 워낙 더워 시원한 차라도 한잔 마실까 싶어 사천왕문 옆에 있는 상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찻집이 아니라 기념품점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그 앞의 배롱나무와 멀리 보이는 만세루가 어우러진 풍경이 또 눈에 밟혔다. 못 마신 차 대신 몇 장의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7. 범종각, 소원을 매단 종들의 풍경

사천왕문 근처를 서성이다 범종각 주변으로 눈길이 갔다. 붉은 기둥 사이로 형형색색의 작은 종과 물고기 모양의 목패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알록달록한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붉은 기둥, 짙은 단청, 그리고 그 사이로 언뜻 비치는 배롱나무꽃까지 한데 어우러진 이 장면 역시 카메라에 정성껏 담아두었다.


땀에 젖은 여름날이었지만, 도솔천의 서늘한 물소리와 만세루 창틀 속 배롱나무, 그리고 소원을 매단 종들의 풍경이 더위를 잊게 해주었다. 다음엔 만세루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번엔 정말로 시원한 차 한 잔과 함께 그 풍경을 느긋하게 즐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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