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강한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지리산 등반을 한적이 있다.
이때지리산 정상을 밟았는지 기억이 가물한데… 이대 지시산 정상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지금은 지리산 정상석이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로 되어 잇지만 처음에는 한국인이 아닌 경맘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되어 잇어서 지리산을 방문하는 호남인들 너나없이 분개하던 시기라 이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요즘 지리산에 관심이 생기면서 지리산 정상석에 대한 이력을 간략히 정리해본다.
지리산 정상석 사진은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가져왓다,
침구들에게 고등학교 지리산 등반 당시 지리산 정상 사진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명회, 윤회, 채창 다들 잘살고 있지?
아래 내용은 월간 산 2023년 5월호 기사를 을 참조해 재정리했다.
1964년 `11월~12월 ‘천왕봉 1,915m’ 표시된 비목 설치
지리산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천왕봉 표지석의 시초는 지리산 동부 루트 개척 학술조사 등반대의 활동의 결과라고 한다.
이들은 1964년 11월 27일부터 12월 5일까지 8일간 칠선계곡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등반로에 이정표와 안내판을 설치하고, 정상에 곡괭이로 땅을 파고 ‘천왕봉 1,915m’라 표시된 비목을 설치했다.
이 비목은 1971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1974년 남명조식 시구가 적힌 40cm 정상석 설치
1974년에는 ‘만고천왕봉萬古天王峯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이라는 남명 조식의 시구가 적힌 자그마한 40cm 높이의 정상석이 들어섰다.
진주 산악인들이 세웠다고 하며, 정상석 옆면에는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과 방장산이 새겨져 있었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 천왕봉에 대한 애정이 깊은 조선 중기 학자라고 한다.
그는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났지만 지리산 천완보이 보인다는 이유로 지리산 덕천동(현 산청군 덕산면)로 올겨와 산천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11년간 이곳에 살면서, 평생 지리산 천왕봉을 12번이나 올랐을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
그는 ‘만고천왕봉萬古天王峯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은 남명 조식이 지은 시 천완봉의 한 구절이다.
天王峰(천왕봉)
曺植(조식, 1501~1572)
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
보시오 천 석들이 커다란 저 종을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세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나
萬古天王峰(만고천왕봉)
예로부터 지리산엔 천왕봉이라네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은 울릴지언정 산은 울리지 않아
1982년 진주산악인들. ‘진리산 천왕봉’을 새긴 정상석을 세우다.
1982년 진주 산악인들은 검정색 오석에 ‘지리산 천왕봉’을 새긴 정상석을 제작해 세웠다.
그동안 있던 정상석이 산에 비해 작기도 했고, 주변에 낙서도 많은 탓에 힘을 모았다.
그러나 이 정상석은 그리 오래 서 있지 못했다 1982년 경남도 주재로 정상석에 세워진 것이가..
1982년, 경남도 주재로 현재의 정상석을 세우다.
1982년 해 6월 2일 경남도에서 현재의 정상석을 세웠다
이를 주도한 건 당시 이규효 경남지사와 5공화국 실세였던 권익현 국회의원. 이들은 헬기를 동원해 진주 남강의 강돌을 운반했다고 한다.
정상석에 “‘경남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표기하면서 징겨감정등이 촉바로디고 논라닝 일엇다. 지리산의 많은 부분이 경상도에 속해있만 전라도 지분도 상당하기에 지리산을 견남의 것으로 단정하기엔 문제가 잇었다.
얼마후 이에 불만을 푼은 누군가 정상석의 경남인 부분 한자를 도려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낫다
그러면 지리산은 경남인의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 모두의 산이라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1980년 중반에 경남 자리를 한국으로 대체해 정상서을 유지했다고 한다.
2000년 정상석을 수정
아무튼 ‘경남’글자대신 한국으로 대체해 정상석 글씨가 다소 어색하다는 지적에 지리산국립고원 사무소에서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이도록 새기는 작업을 진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