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 작업은 군사작전… 최고경영자가 진두지휘해야 성공”
“저는 아시아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아쉬움을 느끼곤 합니다. 왠지 그들이 주눅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들지요.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유럽이나 미주에 비해 뒤떨어진 것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아시아 고유의 가치야말로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시아적 가치의 회복’ 싱가포르의 이광요 전 수상,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전 수상이 아시아 국가들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주창할 때 늘 전면에 내세우던 발언이다. 민주주의·인권을 비롯한 서구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패권 국가들의 오만한 태도를 질타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21일 오전 남산자락에 위치한 그랜드 하야트 호텔 접견실. 기자는 유럽 출신의 한 브랜드 전문가로부터 이 말을 들으리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마틴 롤(Martin Roll)’ 벤처 리퍼블릭(Venture Republic) 대표는 한 시간 남짓한 인터뷰 내내 아시아적 가치 회복을 강조했다. 자국의 정취를 살린 브랜드를 선보여야만이 글로벌 무대에서도 먹힐 수 있다고 이 거구의 컨설턴트는 주장했다. 요즘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브랜드 전문가로 통하는 그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즈가 지난 2003년 아시아 지역 최고의 경영대학원으로 꼽은 중국 유럽 국제공상학원(CEIBS)에서 ‘브랜드 전략경영론’을 강의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브랜딩 컨설팅도 담당하고 있다. <편집자 주>
요즘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는 컨설턴트들의 방한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한국 시장이 매력적이라는 방증인가요.
제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이 5년 전이었습니다. 실무 부서에 있는 한국 기업 직원들은 당시에도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최고경영자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했지요. 수년만에 이러한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최고 정책 결정자를 더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강의를 하면 ‘마틴, 우리 보스에게도 브랜딩의 중요성을 좀 설명해주세요’라며 다가오는 젊은 마케팅 담당자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경영진들이 무엇보다 강한 의욕을 보이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웃나라인 중국이 글로벌 브랜드 구축에 상당한 공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굳이 한국시장에 관심을 둘 이유가 있나요
상하이와 북경을 올 들어서만 5∼6차례 방문했습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방문한 셈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요구하는 변화의 이행을 아직은 꺼립니다. 물론 그들도 브랜드가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루이 뷔통이나 나이키, 코카콜라 브랜드에 관심은 많습니다. 제 책을 사서 읽기도 합니다.(웃음) 하지만 브랜드를 바라보는 태도만 봐도, 아직까지 한국 기업인들 만큼 절박하지는 않습니다.
이번 방한 길에 혹시 삼성이나 현대를 비롯한 한국 재벌기업 경영자들을 만났습니까.
확인해 줄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고객사를 공개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브랜드 컨설팅은 미인대회(Beauty Contest)가 아닙니다. 브랜드 구축은 신뢰 확보가 첫걸음입니다. 경영진에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략의 차원에서 구축해 나갈 때 브랜드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았듯이, 브랜드도 하루아침에 구축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용의주도한 접근이 필요하며, 신뢰가 그 생명입니다. 브랜딩은 전략입니다. 회사의 기밀에 속하는 전략을 떠벌리고 다니는 컨설턴트를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는 않을 겁니다.(웃음)
당신은 브랜딩 분야의 ‘램 차란(Ram Charan)’같은 인물이군요. 쉬운 말로 정곡을 짚는 편인가요.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은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있습니다. 캠페인, 광고, 이벤트를 어떤 식으로 진행해야 할지, 또 광고모델은 누구를 써야할지 조언하는 데 그친다고 할까요. 저는 최고경영자들을 상대로 전략 포지션을 설파합니다.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이 제 몸값의 원천인 셈이죠. 아시아 경영자들은 대부분 브랜딩을 광고나 로고 디자인 정도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경영자들은 주로 어떤 고민을 토로하던가요. 아무래도 중국 기업들의 거센 추격이 불안감의 원천이 되고 있지는 않나요.
새로운 정보에 상당히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포지셔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소비자를 어떤 식으로 파악할 지 등이 고민거리입니다. 하나같이 간단한 문제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 관한한 한국 기업이 중국보다 한 걸음 앞서가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브랜드 정체성이 글로벌 기업에 비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브랜드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입니까. 볼보차에서 안전을, 재규어에서 영국 신사를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까.
자동차를 구입할 때 어떤 점들을 고려할까요. 차체가 튼튼해야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부상을 줄일 수 있겠죠. 또 첨단 에어백부터 항법 장치까지, 얼마나 혁신적 기술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감안하겠죠. 하지만 이러한 요소 들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핵심가치가 바로 브랜드 정체성입니다.
소비자들이 렉서스나 벤츠, 혹은 아우디를 구매하는 이유가 뭘까요. 내구성이 뛰어나고, 코너링이 안정돼 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결국‘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점을 과시하고 싶은 거 아니겠어요. 현대차는 아직까지 브랜드가 명확하게 정의돼 있지 않습니다.
브랜드를 바라보는 소비자 시선이 뒤죽박죽 섞여 있습니다. 중국의 체리(Cherry)처럼 엔트리 레벨의 차도 아니고, 렉서스나 BMW와 어깨를 견줄만한 프리미엄급은 더욱 아닙니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차량인 프리우스(Prius)처럼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 친환경 차량의 이미지를 주지도 못합니다.
당신이 현대차 최고경영자라면 당장 무엇을 하시겠어요. 프리미엄모델 제너시스를 출시할 예정인데요.
브랜드가 품질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습니다. 품질이 뒷받침을 해줘야 브랜드도 먹혀들 수 있습니다. 첨단 에어백, 에어컨디션, 브레이크, 첨단 길 안내 시스템…프리미엄 시장을 파고들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과감히 승부수를 걸 수 있겠죠. 기본에 충실했길 바랄밖에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해요. 저라면 브랜딩 작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겠습니다. 브랜딩 작업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군사 작전에 비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의 ‘팔랑크스’ 부대처럼 물샐 틈 없는 팀웍이 필요하다는 뜻인가요.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죠. 당신이 어렵사리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벤츠나, 렉서스 구입을 결정했다고 가정해보죠. 딜러의 판매장을 방문했을 때 이 회사 직원들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영 미적지근하다면 어떤 인상을 받겠어요. 깔끔한 옷차림, 프로페셔널한 말투는 기본입니다.
제품에 대한 전문 식견도 중요하겠죠. 고가 제품에 고장이 생겼을 때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비를 해주는지도 관건입니다. 하지만 당연하게 보이는 이 모든 일들이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제조업체의 마케팅 부서, 연구개발 부서, 생산관련 부서가 제각각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초점을 맞추는 분야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강력한 브랜드 리더십이 필요한 배경입니다.
휴대폰 업체인 팬택은 글로벌 브랜드 구축에 돈을 너무 많이 썼다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 브랜딩이 다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 회사의 실패는 글로벌 브랜드 구축에 지름길이란 없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There is no shortcut to global market). 생각해 보세요. 글로벌 무대는 로컬 시장과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콜럼비아, 베트남, 브라질, 그리고 인도의 소비자는 서로 다른 문화권이며, 기후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을 파고들 처방전도 달리 해야 합니다. IBM이나 시스코(CISCO)가 왜 글로벌 브랜드인줄 아십니까. 글로벌 무대 공략을 위한 정교한 시스템을 탄탄히 구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팬택은 이걸 제대로 하지 못한 겁니다.
IBM이나 시스코는 미국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업입니다. 하지만 아시아 기업들은 사정이 다르지 않나요.
규모가 모든 것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싱가포르 에어라인을 보세요. 이 회사는 공룡 항공사에 비교할 때 덩치가 무척 왜소합니다. 하지만 글로벌 무대에서 브랜드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미국이나 유럽 항공사들과 훌륭히 경쟁하고 있지 않습니다. 삼성이나, 구글도 한 때는 작은 기업에 불과했습니다.
뛰어난 브랜딩 전략으로 회사 규모나 자금력의 열세 등을 일거에 뒤집은 사례가 있나요.
태국의 실크 브랜드인 ‘짐 톰슨(Jim Thompson)’이 있습니다. 이 회사의 창업자는 미국의 퇴역군인 출신입니다. 그는 원래 아시아에서 노년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국에서 현지 비단 제품의 잠재력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습니다. 당시 이 나라의 실크업자들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값싼 인조 섬유가 유럽에서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반 크루아’ 공동체(Ban Krua community)의 실크 제품을 모국인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널리 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의 유명 패션지인 보그에 이 제품에 대한 소개가 실렸습니다.
지금은 미국의 에드 터틀(Ed Tuttle),태국의 바호로딘(Baholyodhin)을 비롯한 세계의 유명 디자이너들과 손을 잡고 세계 각지의 실크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카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아시아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 가지 아쉬움을 느끼곤 합니다. 왠지 그들이 주눅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들지요.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유럽이나 미주에 비해 뒤떨어진 것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아시아 고유의 가치야말로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시아적 가치에 눈을 돌릴 때라고 봅니다.
삼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는 한국기업들이 있을까요.
호텔 신라입니다. 세계 시장에서도 충분히 먹힐만한 서비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 시장에서 글로벌 호텔 체인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그 잠재력을 이미 충분히 입증해 왔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잠재력을 아직까지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호텔 신라 브랜드를 앞세워 해외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역량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한국시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글로벌 인재들을 상대로 문호를 활짝 개방해야 합니다. 성공의 열쇠는 문호개방, 그리고 한국적인 색채의 강화입니다.
두산이 최근 잉거솔랜드의 건설장비부문을 인수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 도약을 노리는 한국기업들은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할까요.
성공한 글로벌 브랜드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대부분 해외의 인재들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적인 것에만 얽매여서는 결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없다고 봅니다. 브랜딩의 경우 아시아 혹은 한국 고유의 색깔을 입히는 것이 때로는 유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무대의 변화를 재빨리 포착,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영시스템이 더 유연해져야 합니다.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줄 아는 해외 인재들의 영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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