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으로 성장하는 올드기업 현장 르포
'오래 붙들면 썩는다, 빨리 점프하면 추락한다'
'올드기업' 듀폰을 확 바꾼 채드 홀리데이 회장
"성공 신화에 안주하던 직원, 市場에 가보라고 했죠"
약 70년 전 세계 최초로 나일론 스타킹과 칫솔을 만들어 팔았던 회사는?
1802년 미국의 프랑스 자본 유치 1호로 설립됐으며, 초기엔 화약(火藥) 생산에 특화해 한 때 미군(美軍)에 가장 많은 화약을 공급했던 회사는?
정답은 듀폰(DuPont)이다. 세계 4위(작년 매출액 기준)의 종합화학회사로 지금은 인조 대리석에서 방탄조끼 소재, 건축 단열재, 수영장 살균제, 제초제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0여개의 제품을 생산한다.
이 회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기록을 갖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이 1955년 '500대 기업'을 선정하기 시작한 이래 듀폰은 한 번도 이름을 거르지 않았다. 고유가와 미국 경제 침체로 세계 기업들이 잔뜩 움츠린 올해 들어서도 1분기 9%, 2분기엔 12% 성장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체 매출 294억 달러(약 32조원)의 36%를 출시된 지 5년 이하의 신제품에서 벌어들였다는 사실. 값으로 따져보면 팔리는 제품 셋 중 하나는 연구소에서 갓 구워 낸 제품이라는 얘기다. 신제품이 도입되는 한편 오래된 제품은 생산을 중단한다. 그래서 지금의 듀폰은 더 이상 화약도 나일론과 같은 의류용 섬유도 생산하지 않는다. 듀폰은 200년이 넘은 회사다.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대로 그대로 가고 싶은 관성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늘 새로워질 수 있을까?
지난 달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시 본사에서 만난 채드 홀리데이(Holliday·60) 듀폰 회장의 대답은 마치 선문답 같았다.
"경영자로서 가장 힘든 일은 새로운 상품과 기술, 시장을 위해 언제 변화를 일으켜야 할 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있으면 썩고, 너무 빨리 점프하면 떨어지죠.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조금 먼저 내려놓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빨리 점프해야 합니다. 위기 때까지 기다리면 늦습니다."
늘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은 듀폰의 기업 다큐멘터리를 7년 전으로 돌려보면 전혀 다른 화면이 나온다. 나일론 등 기존 제품의 매출이 정체하면서, 2001년 이 회사의 매출은 전년 대비 35억 달러나 감소했다. 무려 13%나 매출이 줄어든 것이다. 오래된 기업 특유의 굼뜬 속성은 변화에 저항했다.
홀리데이 회장의 개혁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1998년 CEO에 오른 데 이어 이듬해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게 된 그가 2001년 개혁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슬로건은 '시장 주도의 과학(ma rket-driven science)'이었다. "R&D(연구개발)는 항상 시장의 필요에 입각해야 하며, 연구소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연구실에 앉아있던 과학자와 엔지니어에게 여권과 가방을 안긴 뒤 등을 떠밀어 고객과 시장을 만나도록 했다. 14만 명에 이르는 종업원은 6만 명으로 감축했다. 거꾸러지던 듀폰의 성장 곡선은 이 때부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회장에 취임한 후 병충해와 가뭄에 견디는 종자(種子)나 바이오 연료가 듀폰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고, 듀폰은 화학기업에서 종합과학 기업으로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고유가 충격에 휘청거리고 있지만, 홀리데이 회장의 말은 의표를 찔렀다."고유가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위기만 보지만, 우리는 위기와 기회를 같이 봅니다. 그리고 기회를 이용합니다."
"위기보다 기회를 더 많이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로서는 기회가 더 많다"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탄조끼에 쓰는 물질로 개발한 케블라(Kevlar)는 기존 소재보다 훨씬 가벼운데, 강합니다. 이것을 타이어와 자동차 등에 사용하면 에너지 절약 시대에 유용하겠죠."
듀폰이 생산하는 제품은 시대에 따라 변했지만, 과학은 늘 성장의 밑천이었다. 듀폰에는 이공계 박사만 5000여명이 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 동부의 명문대 출신이다. 고위 경영진의 90%가 이공계 출신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출원한 특허건수가 2000여 개이고, 획득한 특허건수가 597개에 이른다. 지난 2월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과학적 능력, 연구 집중도, 혁신 주기 등에 있어서 듀폰은 화학업계의 최선두 주자로 조사됐다.
이번에 만난 듀폰 임직원들은 누구나 시장과 속도를 얘기했다. 브랜드와인 강변의 연구소에서 만난 우마 차우리(Chowdhry) 연구개발 담당 수석부사장은 "우리는 강박적일 만큼 차별화에 집중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경쟁자들이 금방 베껴서 따라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이건희 회장의 한 마디가 삼성이 크게 바뀌는 전기가 됐다면, 세계적인 화학기업 듀폰(DuPont)에게는 "연구개발(R&D)이 연구소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고 시장(市場)으로 가야 한다"는 7년 전 채드 홀리데이(Holliday) 회장의 선언이 바로 그랬다.
1998년 CEO 자리에 오른 그는 200년 성공 신화(神話)에 안주하고 있었던 듀폰 경영에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연구소는 개혁의 1순위였다. 그는 듀폰의 상징과도 같았던 의류용 섬유 부문을 매각했고, 농업과 안전보호용 소재, 바이오연료 등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했다. 또 탄소가스 배출을 줄이는 친환경 경영을 펴면서 공해 기업의 오명을 벗고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미국 테네시대학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22살 때인 1970년 여름 듀폰에 인턴으로 입사해 지금까지 38년간 근무하고 있다. 온갖 세월의 풍파를 이겨온 듀폰의 산 증인이지만, 그는 2001년 9·11 테러 직후 가장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우리 직원들의 안전마저 염려됐습니다. 매우 어려운 순간이었죠." 그 해 미국은 IT 버블이 꺼지면서 경기침체에 들어가고 있었고, 듀폰은 마이너스 성장의 수렁에 빠졌다.
그의 위기 탈출 노하우는 무엇일까? "'패닉에 빠지지 마라.' 혼란의 순간이 닥칠 때 제가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리더는 현장으로 직접 가서 현실을 파악해야 합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바로 미시시피로 내려가 회의실에서 실종된 직원의 이름을 불러가며 피해상황을 직접 확인했죠. 당시 65명이 행방불명이 됐는데, 다행히 나중에 모두 무사히 돌아왔어요."
매출이 13% 급감한 2001년 위기상황에서도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바로 현장, 즉 시장(市場)이었다. 시장에 나간 그는 바뀌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꼈고, "시장으로 가자"는 말을 개혁의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변화의 신호는 밖에 있다'
시장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듀폰의 제품들은 그럭저럭 팔리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 듀폰만의 독특한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또 듀폰이 지나치게 과학과 기술에만 집중하다 보니 시장을 소홀히 했다는 것도 새삼 느꼈어요."
당시 듀폰은 200번째 생일을 맞을 즈음이었다. 그러나 듀폰의 경영진은 100년 후에 올 300번째 생일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바로 변화를 일으켜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변화해야 할 순간을 알아내는 팁을 줄 수 있나요?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한 박사가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도요타가 너무 오랫동안 자동차를 만든 반면,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저는 '외부의 시각에서 많이 바라봐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해답은 내부보다는 외부에 있어요. 고객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경쟁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부의 시각보다 외부의 시각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기업 내부는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부에서는 보통 우리는 이 제품을 더 길게 끌고 갈 수 있고, 시장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변화를 주도할 때, 가장 힘든 일은?
"직원들이 받는 충격입니다. 세 가지 종류의 충격이 있어요. 하나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인데, 직원들이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재배치되어야 합니다. 여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그들의 일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떠나야 합니다. 그들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모두 다 힘들지만, 마지막이 가장 힘들죠."
그는 듀폰에서 38년간 일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로 의류용 섬유 부문을 2004년에 매각했던 일을 꼽았다.
―한국의 CEO들은 회장님이 결정을 내린 그 순간에 관심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당시 판단의 근거가 된 것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여러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회사의 주요 사업 부문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게 했고, 6개월 뒤 회사가 어떤 일을 시작하고, 어떤 일을 그만둬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하도록 했습니다. 섬유 부문을 매각한 것도 이 팀들이 제안했던 것입니다."
홀리데이 회장이 보는 '다른 세계'
홀리데이 회장은 푸근한 인상이었지만, 말수는 많지 않았다. 기자가 질문을 하면 한참을 생각한 뒤 한 단어 한 단어 정확히 대답했고, 꼭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한다는 느낌이었다.
―듀폰은 1800개가 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의 관점에서 볼 때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우리는 늘 새로운 제품과 퇴장하는 제품이 있습니다. 현재 듀폰 매출의 36%는 개발한 지 5년 이하의 신제품입니다. 하지만 오래된 제품, 시장에서 외면받는 제품은 생산을 중단합니다. 계속 새로운 것을 더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선택해서 덜어내는 것이죠."
―기업이 효율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성장을 위한 창의성이 희생당하곤 하는데, 어떻게 이 두 가지 목표를 조화시키고 있는지요?
(이 대목에서 홀리데이 회장은 앞에 놓인 노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삼각축의 정점엔 계획(plan), 왼쪽 밑변엔 선도(lead), 오른쪽 밑변엔 관리(manage)라고 적어 넣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생산성을 높이도록 관리해야 하고, 직원들을 이끌고 희망을 불어넣어 늘 성장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한 탄탄한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생산성 향상만 추구하거나, 성장만 쫓는 식으로 이 가운데 한두 가지만 하면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서브프라임과 고유가 등으로 전세계 CEO들은 힘든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앞날이 잘 안 보인다고들 합니다.
"저는 매우 다른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에너지 효율을 추구하고, 매우 다른 방식으로 환경을 생각하는 세계 말입니다. 우리 제품 중 어떤 것이 성공하고, 더 잘 팔릴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저는 그 방향만은 알고 있습니다. 더 지속 가능한 환경을 생각하는 세계(green world)로 나아갈 것입니다."
듀폰은 주요 창립기념일 때 타임캡슐(후세에 남길 자료를 넣어 지하 등에 묻어 두기 위한 용기)을 묻는 것이 전통이다. 회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과 주요 제품을 담는다. 6년 전 창립 200주년 기념일 때도 그랬다. 당시 그는 150주년 기념일 때 묻었던 타임캡슐을 파보았다.
―50년 전 타임캡슐을 열었을 때 놀랄만한 게 있었나요?
"한 가지 있습니다. 나무로 된 상자를 열었을 때 손으로 쓴 메모가 나왔어요. 어떤 직원이 '50년 뒤에 누가 이걸 열어보겠는가'라고 쓴 메모였어요. 그런데 그 직원이 아직도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그러니 타임캡슐에 메모를 남길 때는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웃음)"
그는 "타임캡슐을 묻는 것은 그 때까지 회사가 존재해야 한다는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서 "듀폰이 300회 기념일까지 계속 남아있어서 누군가가 타임캡슐을 파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듀폰의 R&D 세계 최고… 작년 신제품만 1201개
듀폰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신제품을 많이 개발하는 회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연구 개발도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듀폰에서 성장전략을 물으면 누구나 '듀폰 연구개발(R&D) 파이프라인'이란 제목의 차트를 꺼내 든다. 연구 개발 단계를 4단계로 체계화한 것이다. 즉 ①아이디어 생성 단계(6~10년) ②실현 가능성 시험 단계(4~6년) ③제품 개발 단계(2~4년) ④초기 상업화 단계(0~2년)이다. 이 타임 스케줄에 따라 신제품이 착착 연구소에서 빠져 나와 시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예컨대 옥수수에서 추출한 신소재 소로나는 초기 상업화 단계에 있다. 부드럽고 때가 잘 안타 카펫과 양복 등에 이용되는 소재이다.
또 친(親)환경 연료 '바이오 부탄올'은 제품 개발 단계로 분류된다. 고농축해서 휘발유와 혼합해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탕수수, 옥수수, 밀 등을 원료로 이용하는 일부 제품이 출시됐다. 본격적인 상업화를 위해 연료효율을 더 높이고 목초·짚단 같은 농업 부산물까지 활용하는 연구 개발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연구 개발의 마지막 단계인 '초기 상업화'에 성공한 신제품의 수는 2004년 774개에서 작년엔 1201개로 늘었다.
[윌밍턴(미국 델라웨어)=박종세 특파원 jspark@chosun.com]
조선일보 2008-08-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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