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그 많던 보졸레 누보는 어디로 갔을까

Updated on 2008-12-05 by

출처 : 조선일보
 
그 많던 보졸레 누보는 어디로 갔을까
와인 본격 도입되기 시작한 2000년 초에는 대단한 인기
와인 열풍 불자 오히려 인기 시들해져
와인 취향이 사람의 수준 나타내는 지표가 된 때문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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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은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가 출시되는 날이다.


보졸레 누보는 그해 9월에 수확한 햇포도로 만들어 연말까지만 판매하는 프랑스 보졸레 지방의 와인이다. 우리나라에 와인이 본격 도입되기 시작했던 2000년 즈음부터 2~3년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지금 한창 불고 있는 와인 열풍을 생각한다면 매우 역설적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와인 문화를 선도했던 보졸레 누보가 정작 와인 열풍이 불자 갑자기 시들해져 버렸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시 우리 소비자들은 왜 보졸레 누보를 마셨는가?” 혹은 더 나아가서 “왜 와인을 마시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보졸레 누보와 와인이 주는 ‘소비 가치(consumer value)’를 분석해야 한다.


2000년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는 독주(毒酒)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을 취하게 만들 수 있다는 폭탄주가 회식 자리마다 순배로 돌았다. 국민주라고 할 수 있는 소주도 25도가 대세였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한 술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 민속주가 살아나고 소주가 순해졌으며, 언젠가부터 그나마 순해진 소주에 백세주를 섞어 더 순하게 만든 속칭’50세주’가 나타났다.


순한 술이 주는 소비 가치는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웰빙(well-being) 열풍의 영향이다. 와인을 상음(常飮)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심혈관계 질환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가 알려지면서, 와인은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여성의 음주가 늘어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됐다. 동료 여성들이 술자리에 합석하기 시작하면서 남자들끼리 모여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자’던 폭음 문화가 분위기를 중시하는 대화의 문화로 바뀌기 시작했다. 와인 바에서 여성과 함께 기울이는 와인 잔에는 맥주나 다른 술이 주지 못하는 세련된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또한 음식과 어울리는 술을 찾는 반주(飯酒) 문화가 보급되면서 급히 먹고 취하는 독주보다는 음식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술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와인은 ‘마리아주(Mariage·결혼)’라고 하여 음식과의 궁합을 중시하는 술이다.


이처럼 당시 음주 문화의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술이 와인인 탓에, 2000년대 들어 와인이 트렌드로 자리잡을 전제 조건은 모두 갖추어졌다.


그런데 보졸레 누보가 프랑스 와인의 본산으로 통하는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보다 먼저 선풍을 일으킨 데에는 마케팅의 역할이 컸다. 일단 브랜드가 쉬웠다. 대다수 소비자가 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보졸레 누보’로 단일화된 브랜드는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와인의 경우 병에 붙은 상표(라벨)도 읽기 버거운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 정부까지 나서서 출시일을 통일해 하나의 축제일로 만들고, 특급 호텔 및 고급 레스토랑과 다양한 공동 마케팅을 통해 관심을 자극했다. 고급 와인 축에는 들지 못하는 ‘못난이 와인’ 보졸레 누보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큼은 단연 ‘와인의 왕’으로 등극하는 듯 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와인의 소비 가치가 바뀌면서부터다. 우리나라에 와인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어느덧 와인을 선택하는 취향이 그 사람의 수준을 나타내는 대리 지표(proxy)가 됐다. 보통 부유층은 자신이 상류 집단에 속해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 방법의 하나가 ‘보이지 않는 잉크(invisible ink·키워드 참조)’를 사용하는 것이다. 단기간에 연마하기 어려운 와인 지식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전통 문화가 단절되고 계층 이동이 급격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 할 ‘보이지 않는 잉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이는 잉크’인 ‘명품(名品)’으로 자신의 지위를 과시해왔다. 최근 불기 시작한 재즈와 미술품, 클래식에 대한 관심은 ‘보이는 잉크’에 식상한 상류층이 차츰 ‘보이지 않는 잉크’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계층 이동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도 된다.


와인에 대한 지식과 매너가 소비자의 문화·계층적 취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부터 보졸레 누보의 인기는 수그러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보졸레 누보는 당해 연도에 소비되고 말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잉크’의 핵심인 ‘고색창연함’이 없다. 빈티지(vintage·생산연도)가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고가(高價)의 유명 와인과 비교되는 점이다. “엉뚱한 와인을 고르면 교양 없는 졸부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스트레스가 작용하기 시작하면서 소비자들은 와인 만화책 ‘신의 물방울’에서 본 유명 와인을 주문해 유리잔을 흔들게 됐다.


하지만 보졸레 누보는 나름대로 재미있고 괜찮은 술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우리나라도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와인을 ‘있는 그대로’ 가볍게 즐기는 문화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때는 보졸레 누보가 예전처럼 더도 아니고, 요새처럼 덜도 아닌, 그 가치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잉크(Invisible Ink)
와인 매너·고전음악·발레·오페라와 같은 고전에 대한 이해나, 골동품처럼 고색창연한 수집물에 대한 안목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상한 지위를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을 일컫는다. 상류층은 일반인이 쉽게 연마하기 어려운, 이런 지식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지위를 과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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