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 난 해바라기밭에서 만난 고구려성, 연천 호로고루성 방문기를 정리해 본다.
9월 9일, 흐린 하늘 아래 연천 호로고루성을 다녀왔다. 남한에 남아 있는 세 곳의 고구려성(당포성, 호로고루성, 은대리성)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개방적인 곳으로 꼽히는 곳이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국경의 성
호로고루성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임진강변 현무암 절벽 위에 자리한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사적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벽 전체 둘레는 약 401m(남벽 161.9m, 북벽 146m, 동벽 93.1m)에 달한다. ‘호로고루’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임진강의 옛 이름인 ‘호로하(瓠瀘河)’에서 따왔다는 것으로 강물이 표주박처럼 구불구불 흘러 붙은 이름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고을을 뜻하는 고구려어 ‘홀(忽)’과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이다.
이 성이 가진 특별함은 성벽 단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발굴 결과 성벽 중심부는 백제식 판축(版築)으로 다져지고, 그 바깥쪽과 안쪽은 고구려식 석축(石築)으로 마감되었으며, 축성에 쓰인 확돌과 기둥홈까지 발견되어 고구려의 도성인 국내성과 같은 축성기법이 쓰였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백제가 먼저 쌓은 성을 고구려가 빼앗아 다시 쌓았다는 뜻으로, 삼국시대 이 땅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관미성을 함락하기 위해 이 성에서 약 두 달간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만큼, 호로고루는 당시 손꼽히는 군사 요충지였다.
지고 난 해바라기, 그래도 남아 있던 풍경
호로고루성을 찾은 이유는 해바라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9월 9일 도착해보니 해바라기는 이미 모두 꽃이 지고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이곳은 매년 여름 ‘연천 장남 통일바라기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성 내부 드넓은 부지에 조성된 해바라기밭이 축제의 주인공인데, 절정 시기를 놓치고 방문한 셈이다. 날씨까지 흐려서 성벽을 아름답게 담기에는 다소 아쉬운 조건이었다.
그래도 호로고루성 특유의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언덕처럼 솟은 성터가 보이는 넓은 잔디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허물어진 성터와 탁 트인 초원이 어우러져 마치 광활한 벌판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고들 한다.
잔디밭에는 색깔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어, 이 의자를 배경으로 호로고루성을 담아보았다.

잔디밭을 한 바퀴 돌아보니 호로고루성을 상징하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어 이를 함께 카메라에 담았다.


해바라기밭 주변으로는 백일홍을 비롯한 가을꽃들이 한창 만발해 있어서, 이 가을꽃과 호로고루성을 배경으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꽃이 다 진 해바라기밭을 걷다가는 뜻밖의 재미도 발견했는데, 누군가 시들어버린 해바라기 얼굴에 사람 얼굴을 그려 넣어 놓은 것이었다. 이 익살스러운 해바라기 몇 송이도 놓치지 않고 담았다.


주차장의 통일바라기 비석
호로고루성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성 곳곳에 통일을 주제로 한 조형물과 시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주차장에 세워진 ‘통일바라기’ 비석이다. 이곳 부지가 워낙 넓어 주차장 구역을 전부 걸어서 돌아보기에는 힘이 들어, 멀리서 꽃밭을 배경으로 망원으로 이 비석을 당겨 찍어보았다. 해바라기를 ‘통일바라기’라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이곳의 해바라기밭 자체가 분단의 현장에서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조성된 것이다.

임진강을 향한 망향단과 시비
성에서 임진강 방향을 바라보면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망향단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호로고루성 절벽가에는 임진강을 굽어보는 전망대와 함께 망향단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이 통일 안보 유적지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 이곳은 추석이나 설 명절이면 실향민들이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제를 지내는 자리인 듯하다.

이 망향단 왼쪽에는 ‘호로고루’라는 제목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정윤호 시인이 쓴 것으로, 시집 『봄날의 서재』에 실린 작품이라고 한다. 다만 시의 원문은 저작권이 있는 창작물이라 그대로 옮기거나 다듬어 싣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분단의 현장에 세워진 시비인 만큼, 강 건너 북쪽을 향한 그리움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내용으로 짐작된다. 정확한 원문이 궁금하다면 현장의 시비를 직접 사진으로 담아두거나, 연천군 문화관광 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절벽에 성을 쌓고
천리 강물을 내려다보면
네가 보일까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황포 배들이 머문 포구
당에서 말갈에서
기병들이 몰려오는데
깃발을 올리고 북을치면
네가 들을까
머물곳이 없는 슬품이 현무암을 쌓고
스스로 문을 닫으니 백만대군이 와도 열수 없으리
임진강이 마르고
좌상 바위가 평지가 된다 해도
내 마음은 무너지지 않으니
그대여 어서 돌아와
회군의 나팔을 불어주게
호로고루 호로고루
연천벌을 지나서 고구려까지
푸른 바람이 부는구나

해바라기를 보려면 언제 가는 게 좋을까
이번처럼 절정을 놓치고 시든 줄기만 보고 오지 않으려면, 방문 시기를 정할 때 몇 가지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우선 호로고루 해바라기는 매년 정확히 같은 날짜에 피지 않는다. 파종 시기와 폭염, 장마·강우량에 따라 개화 시점이 해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이곳에서 열리는 ‘연천 장남 통일바라기 축제’ 일정도 매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폭우로 축제가 취소됐던 해에는 이듬해 축제를 7월 중순으로 앞당겨 열기도 했고, 올해(2026년)는 8월 말~9월 초 개화에 맞춰 9월 3일부터 6일까지 축제가 열렸다. 대체로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 사이 어딘가에서 절정을 맞는다고 보면 되지만, 그 폭이 한 달 가까이 벌어질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내가 방문한 9월 9일에는 이미 해바라기가 다 지고 줄기만 남아 있었으니, 올해는 절정이 축제 기간인 9월 초순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방문 1~2주 전에 연천군 공식 채널이나 최근 방문객들의 블로그·SNS 후기를 통해 실시간 개화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기준을 잡아야 한다면, 8월 말부터 9월 첫째 주 사이가 절정에 가장 가까울 확률이 높은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시간대도 중요하다.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 얼굴을 돌리는 특성이 있어 오전에 방문해야 정면으로 핀 모습을 담기 좋고, 한낮에는 그늘이 거의 없어 오래 걷기가 힘들다. 노을 무렵도 성곽과 어우러진 사진을 담기에 좋은 시간대로 꼽힌다. 다만 해바라기가 절정을 지났더라도, 성벽과 임진강이 만들어내는 전망은 계절과 관계없이 즐길 수 있으니 해바라기 시기를 놓쳤다 해도 호로고루성 자체를 보러 가는 걸음은 크게 아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며
절정을 놓친 해바라기밭이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백일홍과 색깔 의자, 얼굴 그려진 해바라기의 익살스러움, 그리고 통일바라기 비석과 망향단이 전하는 묵직한 이야기까지 — 호로고루성은 짧은 방문 시간 동안에도 여러 겹의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에는 해바라기가 절정인 시기에 맞춰, 통일바라기 축제와 함께 다시 찾아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