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유배 2개월의 흔적이 너무 진한 영월 청령포 출사기

Updated on 2024-07-01 by

영월하면 동강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인데, 우연히 단종 유배지가 영월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버 가보고 싶었다, 전날 육백마지기에서 차박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영월 블르핸즈에서 충전을 하게되어 영월 시내를 지나게 된 김에 단종 유배지라는 영월 청령포에 다녀왔다.

개인적인 느낌은 아래와 같다.

  • 단종은 영월에 4개월, 청령포에는 단 2개월을 머물렀다. 하지만 영월 청령포는 단종 유배지의 전부 그리고 굉장히 오랬동안 머물럿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 그래서 제목을 단종 유배 2개월의 흔적이 너무 진하다고 적었다.
  • 생각지도 못핟게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와 단종의 사랑에 대해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비운의 실패자를 남편으로 둔 여인의 선택은 노비로 강등된 가운데서도 자존심을 지키고 남편을 향한 사랑을 유지하는 아주 어려운 과업을 잘 수행했기에 후세에서 그들을 이어주려는 노력들이 이어진듯하다.
  • 청령초 소나무숯은 아름다웠고 출사지로서 훌륭했으니, 사진 실력으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단종 유배지라는 영월 청령포엘 다녀왔다. 이곳 영월 청령포는 지나번 영월 용나무 출사기에서 잠깐 언급한 곳으로 영월 용마루 느티나무가 있는 곳과 아주 가까이 있다.

위키백과에서 설명하는 영월 청려포에 대한 설명이다.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는 조선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은 세조 찬위 후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2008년 12월 26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

평소에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이곳 단종 유배지에 들러본 기념으로 단종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았다.

권력이란 비정한 것이어서 권력을 지키지 못한자의말로는 항상 비참한것이라이곳 영월 청령포는 곳곳레 슬픔과 비통함이 녹아져 있는 듯 싶었다. 둘러보는 내내 권력의 무상함과 권력에서 밀려난 자의 슬픔에 대해 생가해 보았다.

당종 유배지라는 점이 좋은 이야기꺼리가 되면서 이곳 청령포를 들르는 사람들의 수는 결코 적지는 않았다. 아들의 손을 잡고 가면서 단종 역사에 대해서 설명하는 어느 젊은 아빠를 보니 우리 아들 은결이다 생각났다. 이제 막 유치원에 다니는 듯한 아이와 아빠의 대화를 들으며 은결이와 대화법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아빠: 여기는 예전 단종이라는 왕이 살았던 곳이래
아들 : 단종이 누구야?
아빠 : 아 조선시대 왕으로…

간단한 단종 이력

역사가 기록하는 단종은 그 어느 왕보다 정통성이 강한 왕이었으나 그러한 강한 정통성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막아주지는 못햇다. 새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아들로서 막강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단종은 단 3년 왕위를 유지했을 뿐이며, 단종 즉위를 꾀한 충신들의 연거픈 시도는 결국 단종을 오지로 유배보대고 사약을 내려 사사케하는 원인이 되었다.

단종이 이 청령포에서 유배당한 기간은 6워에 유배와서 10월에 사사받아 4개월이 안되는 짧은 기간애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영월에 길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도 있다. 단도 ㅇ스토리를 최대한 활요하여는 지자체의 노력이 가미되었겠지만 말이다.

  • 1441년 태어남
  • 1448년 왕세손에 책봉
  • 1450년 2월, 왕세자에 책봉
  • 1452년 12세로 단종에 즉위
  • 1455년 계유정란으로 세조에게 왕위 찬탈(단종은 3년남짓 왕위에 있었음)
    • 15세에 상왕이 됨
  • 1457년, 사육신사건(성삼문 박팬년등이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
  • 1457년 6월, 영월 창령포로 유배
    1457년 2개우러정도 무문 후 여름 장마로 서강이 범람해 영월 관부 관풍헌으로 옮김
  • 1457년 9월,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시도 실패로 서인으로 강등,
  • 1457년 10월,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진어해 사사됨
    • 왕방연을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해 사사케한 후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노래한 시조를 남김
    • 이 왕방연의 시조는 개인적으로 가증스럽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칼로 찔러 죽이고 아 미안해 하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다.

천만리 머나먼길에 고은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단종 유배지, 청령포

단종 유배지 청령포는 동,남,북 3면이 깊은 강으로 둘러쌓여 있고 서쪽 뒷편은 육육봉이라고 불리우는 험준한 암벽이 솟은 깍아지른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고립된 섬처럼 천혜의 유배지라고 할만하다. 도망가려면 강을 건너거나 뒤산 절벽을 타고 올라야 하는데 어느 하나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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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단종 유배지로 여기를 추천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나름 지리에 밝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조선 왕조에는 유배지로 적정한 곳이 어디인지 유배지 목록이 정리되어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지금도 단종 유배비 청령포에 가려면 3,000원을 내고 배르 타고 가야한다. 배타는 시간은 3분정도. 아주 짧은 거리지만 당종 유배지라는 특성을 살리기위해 다리를 놓지않고 여전히 배를 타고 건널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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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소나무숲

배에서 내려 자갈밭을 걸어가면 물창한 소나무숲을 만날수 있다 수려한 수백년되는 소나무가 즐비한 이곳은 2004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우수상)을 수상하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소나무가 정말 아름다운데, 소나무를 잘 담아보여고 노력했는데 정말 잘 안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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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어소

단종은 1457년 6월부터 약 2개월간 여기 청령포에 머물렀는데, 이곳을 승정원 기록에 의거해 그 당시의 모습을 기와집으로 재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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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묘재본부시유지비

1763년에 세워진 162cm크기의 오석으로
앞면에서는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라ㅡㄴ 글이 영조대왕의 친필로 음가되어 있다.
뒷면에는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의하여 원주감영에서 세웟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옆에는 궁녀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다.

청령포 관음송

단종 어소를 지나 소나무 길을 지나면 굉장히 큰 소나무가 나온다. 주변으로 경계가 쳐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나 기념촬영하는 인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권좌에서 쫒겨나 외진 곳에서 외로움과 한을 배출할 길없는 어린 왕은 주변의 쉴 수 있는 나무에 올라 멍하니 몇시간이고는 보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그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해서 관음송이라고 했다한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지금 관음송은 6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당에는 60살쯤 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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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탑

영월 청령포에서 유일한 단종의 유적이라고 하는 곳이다.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선대 사이 층암절벽위에 있는 돌로 쌓은 탑

단종이 청령포에 머무는 동안 단종이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막돌을 주워 쌓았다는 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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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대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어 온 후 해질무렵 한양을 바라보념 시름에 잠겼던 곳으로 노산대라고 불리운다.

노산대라는 이름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때 이름을 딴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노산대라는 표지석과 자그마한 바위 언덕인데 그나마 철책으로 가려져 막혀있다. 해질무렵 석양을 보기에는 적절한 장소는 아니지만 막힌곳이 없이 탁트인 풍광으로 멋진 석양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좁은 노산대위에 올라서면 깍아지른듯한 절벽과 그아래 강물이 자살 충동을 강하게 일으킬 것 같다. 마음 고생하는 가운데 굳건히 버틴 단종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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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령포 주변 풍경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령포 주변 풍경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령포 주변 풍경

정순왕후(조선 단종)

나는 단종의 어려움은 알겠는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생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무릇 전쟁이나 사화나 큰 사건이 발생하면 당사자들도 곤혹을 치루지만 덩달아 관련된 여인들도 엄청난 고생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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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부인 정순왕후도 단종이 유배되고 사사되면서 덩달아 서인으로 강등되고 노비로 전락하게 된다. 노비지만 노역은 시키지말라는 세조의 지시로 노역은 면했지만 매우매우 어려운 생황을 이어가게 된다.

영월 청령포 매표소근처에는 단종광 정수노항후의 사랑을 기린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단종 부인인 정순황후의 삶에 대해 생각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순왕후에 대해서, 나무위키 글 일부를 인용해봄

조선 6대 국왕 단종의 왕비. 여산 송씨, 단종보다 1살 많았으며, 본관은 여산.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계유정난 이후 문종의 국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양대군의 강권으로 단종과 혼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 자신의 지지세력들이 숙청당하자 남편이 숙부에게 양위하면서 정순왕후도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존봉되었다. 하지만 단종복위운동이 계속되자 남편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되고 그녀 또한 서인으로 전락했다.

민담에 따르면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유배된 후에 결국 출가했으며, 단종이 죽은 후엔 무척이나 슬퍼해 매양 앞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무척 장수해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중종 16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조선 역대 임금 중 2번째로 단명한 국왕인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역대 왕비 중 2번째로 장수한 왕비다

정순왕후 송씨는 여막에서 동냥을 하고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낙산에 정순왕후가 천을 염색할 때 사용했다는 자주동천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정순왕후가 물에 천을 넣자 천이 저절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조의 도움은 끝까지 거절했다. 세조는 그녀를 노비로 전락시켜 버렸지만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김민정이 연기한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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