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만 배웠던 르네상스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인간 중심 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곳, 르네상스 예술의 도시라 불리우는 피렌체, 이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라면 피렌체 대성당이라 할 수 있다.
‘꽃의 성모 마리아’란 뜻을 가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Santa Maria del Fiore)’가 진짜 이름인 피렌체 대성당은 그 건축 과정에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피렌체 대성당의 건립에 관련된 몇가지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1. 자존심, 도시국가들의 자존심 경쟁
아직 중세 기독교가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 각 지역에서는 하느님에게 가까이 갈수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신의 집’을 짓겠다는 열망들이 대단했고 , 이는 각 지역 도시 국가의 자존심이 되기도 했다.
피렌체가 이 대성당을 건립하기로 한 계기도 세상에서 가장 큰 ‘신의 집’을 짓겠다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1~13세기경 이탈리아 반도 서쪽으로는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치 그리고 피사가 지중해를 무대로 번성했던 4대 해양 공화국이었고 이들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 근방의 피사나 시에나 등의 다른 도시 국가들은 이미 대성당을 완성하거나 완성 단계에 이르러 그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아래는 인근 시에나에 세워진 시에나 대성당(Siena Cathedral)의 모습이다.
아래는 마찬가지로 인근 피사의 대성당 모습이다. 우리에게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그 피사(Pisa) 말이다.
피렌체의 자존심을 걸고 대성당 건축을 추진하다.
피레체는 당시 대성당으로 산타 레파라타 성당(Santa Reparata, Florence)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 성당은 경쟁 도시들이 새롭게 지은 대성당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고, 이미 지은지 900년이나 지나서 점점 붕괴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피렌체가 점점 번성하면서 점점 인구가 많아져 작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대다수 피렌체 시민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피렌체는 인근 경쟁 도시 국가들이 거대한 대성당으로 세를 과시하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번성하는 도시국가답게 많은 시민을 수용할 필요도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큰 대성당을 짓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1296년 9월 9일 당시 대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을 포함한 자리에 새롭게 대성당 축조를 시작했다. (산타 레파라타 성당는 바로 허물지 않고 성당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있는1375년에야 헐린다.)
피렌체 대성당은 아르놀프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설계를 맡았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키오 궁전의 건축가였는데 당시 건축 조류였던 고딕 양식에 따라 설계했다.
이 성당은 세개의 넓은 중랑(中廊)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도록 디자인되었으며, 가운데 중랑은 이전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영역을 감싸도록 설계했다.
아르놀프 디 캄비오가 1302년 사망하자 약 30년간 성당 축조 공사는 중단되었다.
1331년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 양모 상인 길드)가 대성당 축조의 독점적 후원자가 되었고, 1334년 조토디 본도네가 공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는 1359년 조토의 종탑(Companile di Giotto)이라 불리는 종탑 건물을 완성했다.
1348년 당시를 휩쓴 흑사병으로 공사 중단되었다가 1349년 다시 시작되어 이 반복되다가 1367년 성당 자체는 완성되었고, 1375년엔 기존 산타 레파라타 성당을 헐었다. 1418년 라포 기니(Lapo Ghini)에 의해서 돔을 제외한 성당 전체가 완성된다.
미 완성 상태로 운영되다 돔 건축 공모전에 합격한 필립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년)가 1420년에 공사를 시작해 1436년에 돔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돔위에 랜턴(돔 위의 위에서 빛을 받아드리는 작은 첨탑)은 1446년 공사가 시작되어 여러 번의 설계 변경을 거쳐 1461년 완성되었다.
그 후 월뿔 형태의 천장에는 도금된 구리 공과 십자가가 씌우는 공사는 1471년에야 끝났다.
2. 기다림, 완벽한 돔을 만들기 위해 70년을 기다린 피렌체 사람들
1296년 처음으로 대성당 공사가 시작된 후 우여 곡절을 거쳐 1367년에는 미사를 볼 수 있는 성당 자체는 완성된다.
그러나 이 성당의 돔은 직경 42m, 높이 106m나 되기 때문에 그 당시 기술로는 완성할 수 없었다.
즉 돔을 지으려면 밑에서부터 나무로 비계를 차근 차근 쌓아 올려야 하는데 최고 높이가 146m에 달하기 때문에 이 높이까지 비계를 쌓아 올리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건축 전문가들의 판단이었다.
피렌체 대성당은 돔을 완성하지 못한 채 오랬동안 돔을 완성할 천재 건축가를 기다려 왔다. 피렌체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면 돔 디자인을 포기하고 건축 가능한 범위내에서 성당을 완료할 것 같은데 피렌체 사람들은 해결책이 나올때까지 무려 70년동안이나 미 완성 상태로 이 대성당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한 기다림의 결과로 브루넬레스키라는 천재가 나타나 불후의 역작을 완성하게 되었으니 피렌체 사람들의 기다림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 1296년 대성당 공사 시작
- 1359년 조토의 종탑(Companile di Giotto) 완성
- 1367년 대성당 완성
- 1375년 기존 산타 레파라타 성당을 헐음
- 1380년 네이브(nave) 완성
- 1420년 두오모 돔 공사 시작
- 1436년 두오모 돔 공사 완료
- 1461년 돔위 랜턴 공사 완료
- 1471년 돔위 십자가 공사 완료
피렌체 대성당 공사는 돔 공사 완료를 기준으로 산정 시 약 140년이 걸렸으며, 십자가 공사까지 포함 시 공사기간이 175년이 걸렸다.
3. 혁신,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혁신
피렌체 대성당 건립을 책임지고 있었던 ‘두오모 길드 위원회’는 1418년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 돔 건설을 위한 현상 설계를 공모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 뿐만이 아니라 인근 프랑스 등 각국의 내노라하는 건축가들이 이 공모전에 참여했다.
이 공모전에 금 공예가 출신인 브루넬레스키도 참여했는데 무려 2년간에 걸친 심사끝에 브루넬레스키의 건축안을 승인하고 건축에 돌입하게 된다.
건축안 심사 과정에서 브루넬레스키가 제안한 건축안은 너무도 혁신적이라 심사위원을 비롯한 다른 건축가들에게 받아드려지기 어려웠다.
당시 피렌체에서 일어나는 공모전은 건축에 돈을 대는 왕이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심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공모전이 일어나는 업계의 동료들이 심사해 최종 결정하는 상당히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대성당 돔 공모전에서 최종 승인을 받으려면 대성당 건축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메디치가가 아니라 동료 건축가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브루넬레스키에게 건축 모형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는데 그는 이는 불필요한 논쟁만 만들뿐이라고 거절하고, 대신 네명의 벽돌공이 직경 4m 원형 돔을 팔각형 돔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시범을 보인 끝에 공모가 시작된지 2년만에 최종 우승자로 인정 받았다.
아래는 피렌체에 세워져 있는 필립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년)의 동상이다.
그러면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는 어떻게 이 거대한 돔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피렌체 두오모 돔은 직경 42m에 달하기 때문에 지붕의 무게만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런 하중을 견디는 설계가 필요하다. 당시 예상한 무게인지 현재 두오모 둠의 무게인지 모르나 3만톤의 하중을 견뎌야 한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먼저 지붕이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지붕을 겉지붕과 안지붕으로 분리시키는 혁신적인 시도를 한다. 두 지붕 사이에는 건축 작업 및 향후 수리등의 작업을 할 수 있는 463개 계단을 만들었는데, 이 계단이 지금은 관관객들이 두오모를 올라갈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8각형 꼭지마다 리브(갈비뼈)로 틀을 만들고 그 안으로 16개의 수평으로 리브(갈비뼈)를 만들어 구조를 잡아주고 여기에 벽돌을 쌓아 올렸다.
벽돌을 쌓아 올릴 때 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헤링본 스타일로 벽돌을 쌓았다고 한다. 헤링본(Herringbone)은 ‘청어 뼈’라는 의미로 이를 닮은 무늬나 패턴을 말한다.
아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이 피렌체 두오모의 건축 과정을 간단히 설명한 동영상을 참조하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미록 영어로 이야기하지만 이미지와 그래픽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해하는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오모 돔을 만들기 위해 무려 16년동안 400만장 이상의 벽돌이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정성과 노력은 도저히 가름할 수조차 없다.
4. 고전의 재해석을 통한 르네상스, 과거 유산에서 혁신의 실마리를 찾다.
사실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피렌체 두오모를 건축한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조각가였다. 정확히는 금을 소재로 세공사였다.
그는 조각가였기 때문에 1401년에 있었던 ‘산 조반니 세례당’ 제2문에 새길 청동문 부조 공모에 응모에 경쟁자인 기베르티에게 패했다고 한다.
이에 낙심해 피렌체를 떠났다는 기록도 있고(이는 기베르티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모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고 기베르티와 같이 작업하기로 되었지만 혼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 브루넬레스키 성격 상 이를 거절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로마로 떠났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에서 ‘판테온’을 비롯한 고대 로마 건축물들과 유적들을 낱낱히 연구해 그것들의 구조와 공간적인 특징 그리고 그들의 철학을 철저히 연구하고 피렌체로 돌아 온 것이다.
이러한 로마 시대 건축의 사상과 구조를 재해석하고 브루넬레스키만의 독창적인 건축 기법을 가미해 1418년 시작된 피렌체 두오모 돔 건축 공모에 참여해 역사에 기리남을 건축물을 만들게 된다.
이로써 브루넬레스키는 중세시대 신을 위한 건축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의 인간 중심의 핼레니즘을 복원하는 르네상스 건축의 시초가 되었다.
옛것을 해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혁신을 만들었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여기서 잘 들어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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