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연한 브랜딩(flexible branding) 전략’(DBR 196호, 2016년 3월 발행)란 글을 읽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서 유연한 브랜딩(flexible branding) 전략으로 아래 세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는 브랜드 확장으로 통한 브랜드 의미의 외연 확대로 이애 대한 사례로 캐논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즉 캐논 브랜드의 의미를 단순한 ‘카메라 기술(Camera technology)’에 국한하지 않고 ‘이미징 테크날러지(Imaging Technology)’로 확대함으로써 프린터, 팩스 등 다른 카테고리로 효과적으로 다각화해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브랜드 핵심가치와 유연한 요소의 균형으로 BMW 사례를 들고 잇습니다. BMW는 시장 상황에 맞추어 SUV 시장에도 진출하지만 ‘ultimate driving machine’이라는 핵심 가치와 키드니 그릴(kidney grille)은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브랜드의 일관성과 유연성 간 균형 유지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외부 수혈을 통한 변신으로 팝가수 마돈나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마돈나는 적절한 시기마다 새로운 음악 파트너와 협업을 통해 변신을 거듭함으로써 지속적인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세번째 언급되어진 마돈나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돈나가 어떻게 변신을 통해서 부침이 심한 그 세계에서 35년동안이나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아래는 위키디피아의 내용을 보면 마돈나 자체의 역량을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지만 수많은 변신과 다른 사람의 재능에의 의존을 통해서 성장해 왔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엠 그랜트가 2005년 쓴 Contemporary Strategy Analysis에서 마돈나는 확실히 타고난 뛰어난 재능은 없다며 “뛰어난 보컬리스트, 음악가, 댄서, 싱어송라이터, 배우로서 마돈나의 재능은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논평했다.
로머트 엠은 마돈나의 성공은 경력동안 수 많은 다양한 변신과 다른 사람들의 재능에 의존했기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마돈나의 접근 방식은 지금까지의 음악 산업의 성공 방식과는 달랐는데, 마돈나는 경력동안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와 새로운 이미지, 더 높은 명성과 주목을 받기위해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적인 음악을 해왔다.
그랜트는 “마돈나는 자신을 대중 음악의 여왕으로 확립시키기위해 멈춰있지 않고, 계속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돈나에 대해서 간략히 정리해 봅니다. 이는 위키디피아 및 나무 위키를 참조했습니다.
1958년 8월 미시간주 베이시티에서 태어남
1977년 가수가 되고자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향함(이때 단돈 35$를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1982년 데뷰 싱글인 “Everybody” 발매하고 노래 및 안무가 히트하게 됨
1983년 데뷰 앨벌 “Madonna” 발매, ‘Holiday’와 ‘Borderline’을 빌보드 핫 100 10위권에 진입시킴
1984년 2집 앨범 “Like a Virgin” 발매, 처음으로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르고 2,000만장이상 판매 됨
1984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수상, 여기서 한 Like a Virgin 공연은 Boy Toy라고 새겨진 벨트와 웨딩 드레스, 그리고 머리를 헝클며 바닥에 몸을 문대는 엄청난 파격을 선보여 마돈나의 베스트 퍼포먼스 중 하나가 되었음
1986년 3집 “True Blue”를 발매, ‘Live to Tell’, ‘Papa Don’t Preach’, ‘Open Your Heart’는 빌보드 1위, ‘True Blue’, ‘La Isla Bonita’는 각각 3위와 4위를 기록하면서 앨범의 모든 싱글을 5위권에 진입하며 2100만장의 앨범을 판매 함
외쪽 사진은 전설적인 사진가 허브 리츠가 작업한 마돈나의 앨범 ‘트루 블루’(True Blue)의 표지
1989년 4집 “Like a Prayer” 발매, 신성 모독등 다양한 논란이 일었고 1300만장의 저조한 앨범 판매고를 올림
1990년 베스트 앨범 The Immaculate Collection을 발매, 3,000만 장의 판매량 기록해 마돈나 커리어 최다 판매량이며 역대 솔로 아티스트 베스트 앨범 판매량 최다를 기록 함
1990년 5집 “Erotica” 발매, 빌보드 3위에 그침
1994년 6집 “Bedtime Stories” 발매, 마돈나의 음반중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가장 부드러운 음반으로 빌보드 200 3위에 오름
1996년 뮤지컬영화 《에비타》에서 열연해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함
1998년 7집 “Ray of Light” 발매,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수용해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고 그래미상을 수상 함, 2000만장이상 판매됨
2000년 8집 “Music” 발매, Music은 Ray of Light 시절의 일렉트로니카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동성애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음 1500만장이 팔림
2003년 9집 “American Life” 발매, 뮤직비디오에서 대통령 부시를 묘사한 사람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등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미국인들을 비판 함으로써 라디오 에어플레이에서 보이코트 당하고 400백장이 팔리는 저조한 성과를 거둠
2005년 10집 “Confessions on a Dance Floor” 발매, Hung Up은 가장 많은 국가에서 1위를 한 싱글로 기네스북에 기재 됨
2008년 11집 “Hard Candy” 발매, R&B와 어반 팝에서 영감을 얻었고 저스틴 팀버레이크, 팀발랜드, 퍼렐 윌리엄스 그리고 다니아와 함께 작업을 함
2012년 12집 “MDNA” 발매, 빌보드 200 1위로 데뷔해 마돈나의 여덟 번째 빌보드 200 1위 앨범이 됨
2015년 13집 “Rebel Heart” 발매
마돈나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갖춘 최고의 가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자 가수로써 각종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웠으며
- 2008년 Billbiard Magazine은 마돈나를 100인의 Top Artists중 2위에 올림
- 2003년 VH1과 《피플》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 아이콘 200”에서 7위를 차지했고
- 2008년 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등재 되고
- 2010년 타임은 “지난 수 세기동안 가장 강력한 여성 25”에서 현대 음악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상위권에 선정했고
- 2012년 VH1는 마돈나를 “비디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여성 50명” 음악에서 가장 위대한 여인으로 칭송했음
1981년 데뷰 시 평범한 댄스 가수로 시작한 마돈나가 35년에 걸쳐서 사라지지않고 지금까지 정상의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마돈나 그녀 자신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Reinvention이 아닐까 합니다. 이는 누가 비판하듯 다른 사람이 재능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두번째는 끊임없는 논란의 양산을 통해서 뉴스의 중심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라고 보여집니다.
세번째는 그녀 자신의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 덕붑니 아닐까 합니다. 물론 마돈나 자체의 재능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혹평은 있습니다만 35년을 걸쳐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는 그녀만의 비범한 재능이 필요한 법입니다.
아래는 3가지 성공요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돈나의 이미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지속적인 변화를 계속합니다. 시대에 맞추어 끊임없는 이밎의 변신을 통한 재창조야말로 마돈나가 35년에 걸쳐 사라지지 않고 정ㅅ강의 자릴르 지킬 수 있는 비결중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것입니다.
1980년대 색조 화장을 한 팜프파탈같은 이미지, naughty girl next door
마돈나(Madonna)는 1981년대 댄스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그녀의 데뷰 앨벌 “Madonna(1983)”와 두 번째 앨범인 ‘Like a Virgin(1984)’은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 사운드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댄스음악이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이미지는 짙은 색조 화장을 한 팜프파탈같은 이미지였습니다. 적극적인 노출과 과격한 율동으로 성을 제대로 상품화했다고 평가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 1980년 마돈나의 이미지를 naughty girl next door로 표현하고 있더군요
이 당시는 음악이 라디오와 같은 듣는 시대에서 MTV와 같은 보는 시대로 전환되면서 마돈나의 이런 이미지 전략은 제대로 시장에 먹히게 됩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현된것이 1984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수상식 공연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Like a Virgin 공연은 Boy Toy라고 새겨진 벨트와 웨딩 드레스, 그리고 머리를 헝클며 바닥에 몸을 문대는 엄청난 파격을 선보여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지금가지도 마돈나의 베스트 퍼포먼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한 마돈나의 인기는 수십 개의 고무 팔찌와 머리띠, 짧은 치마와 레깅스를 겹쳐 입은 마돈나의 패션의 인기 연결되어 1980년대 젊은 여성의 패션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 1984년 MTV 시상식 공연 모습 – 결혼식용 대형 케이크에서 나타나 웨딩드레스와 “Boy Toy”라는 문구가 적힌 벨트를 착용하고 머리를 헝클며 바닥에 몸을 문대는 공연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마돈나의 대표적인 공연으로 일컬어지게 됩니다.
1990년대 성적 판타지(erotic fantasy) 이미지의 강화
1990년대 마돈나는 성적 판타지 이미지를 더 강화 유지합니다.
1990년 4월부터 Blond Ambition World Tour를 시작했는데 이 공연에서 ‘정교하고, 성적인 자극적인 안무들’들로 마돈나 성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고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Like a Virgin” 공연 중 두 남자 댄서와 함께하는 자위와 애무를 연상케하는 퍼포먼스때로 종교 단체들로부터 극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1992년 타임워너와 공동으로 레코드 회사(매버릭 레코드), 영화 제작 회사(매버릭 필름) 및 음악, 텔레비전 방송, 도서 출판 및 상품화 등의 부문으로 구성된 자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매버릭)을 설립합니다. 이 회사에서 최초로 발간한 도서는 sex였습니다. 여기에는 스티븐 마이젤이 촬영한 마돈나의 노골적이고 도발적인 성적 세미 누드집으로 대중과 언론에게서 비판을 받았지만 많은 판매고를 올립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성을 원초적으로 다른 5집 “Erotica”를 발매합니다. 이 애럼은 빌보드 200 2위에 그치고 상당히 저조한 실적으루 거두게 됩니다.
▽ 1990년 마돈나의 Blond Ambition World Tour 이미지 그리 아래 왼쪽은 세마누드집 SEX의 이미중 하나 오른쪽은 5집 Erotica 표지 이미지
1990년대 후반 보다 조신하게 , 보다 대중적 이미지의 강화
1990년대 중 후반기 마돈나는 그동안 성적 판타지 추구에서 벗어나 좀 더 진지한 방향으로 변신을 시도합니다.
1994년 6집 “Bedtime Stories” 발매하면서 그 동안의 격렬하고 강렬한 성적이미지에서 벗어나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가장 부드러운 음악을 선택합니다.
1996년 영화 《에비타》의 에바 페론 역할로 출연하며서 마돈나의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뒤로하고 에바 페론역을 소화한 마돈나는 54회 골든 글로브상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에비타 룩이라는 새로운 유행을 주도하게 됩니다.
또한 딸 출산이후 신비주의 카발라에 심취하면서 음악적 변신을 시도합니다.
1998년 7집 “Ray of Light”는 유명도는 떨어지지만 음악의 톤과 분위기를 중시하는 앰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장르의 작곡가인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과 손을 잡고 만든 앨범으로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습니다. 이 앨범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앨범은 2000만장이상 판매됩니다.
이 7집 앨범은 마돈나의 음악중 가장 큰 변화를 한 앨범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마돈나는 시대에 따라 끈임없이 새로운 시도를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왔습니다.
그러한 지속적인 변신은 그 자신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프로듀서와의 작업을 통해서 또는 다른 브랜드와의 콜라보를 통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마돈나는 데뷰 초기에 가져가난 조발적인 성적 소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끊임없는 외부 수혈을 통해서 그녀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왔고 그 전략이 아주 잘 맞아 떨어진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마돈나만큼 많은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드물것입니다. 의도적인 논란이든 의도하지 않던 많은 논란을 불려 일으켰는데 그것은 마돈나가 세상에 대화하는 하나의 방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마돈나는 기존의 룰과 생각을 깨뜨리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기존의 질서와 부딕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논란과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격렬한 논쟁은 마돈나를 항상 뉴스의 중심에 있게 했고 그 이미지가 긍정정이든 부정적이든 ..
오히려 마돈나 자체는 일부러 그러한 논쟁들을 교묘히 부추겼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마돈나 논란’이란 키워드를 치면 최근 마돈나가 감행한 엄청난 논란들이 쉴사리없이 나옵니다. 일반인엡 ㅗ기에는 정말 마음에 안드는 것들인데도 그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을 보면 놀랄 지경입니다.
아래 마돈나가 한 몇가지 이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말만으로 모든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마 대단한 여장부임에는 틀임이 없어 보이네요
(착한)양으로 백년을 사는 것보다는 (제대로 으르렁거리며) 호랑이로 1년을 사는게 낫다
Better to live one year as a tiger than a hundred as a sheep. – Madonna
이 모든 낡은 가치를 전복시키지 않는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I wouldn’t have turned out the way I was if I didn’t have all those old-fashioned values to rebel against. – Madonna
인터넷을 보면
“Top Ten Controversies of Madonna”라는 포스팅이 존재할 정도로 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 그 것을 아래에 잠깐 공유해 보겠습니다.
- The ‘Like A Prayer’ Music Video
- The ‘Sex’ Book
- The ‘Justify My Love’ Music Video
- The Performance Of ‘Live To Tell’ On The Confessions Tour
- The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 March 31, 1994
- The ‘Erotica’ Album And Music Video
- The Blond Ambition Tour
- The ‘American Life’ Music Video
- Truth or Dare
- The Performance of ‘Like a Virgin’ On MTV
위에서 1위를 차지한 The ‘Like A Prayer’ Music Video는 원래 펩시 광고의 일환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에서 십자가를 불태우고 성직자들을 성적 매력으로 유혹하는 등 내용을 담아 매우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일부 종교단체들이 펩시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렸고 펩시는 마돈나와 광고 계약을 해지합니다.
위에서 7위를 차지한 논란은 1990년 4월부터는 시작한 Blond Ambition World Tour에서 일어납니다. 마돈나는 “나는 내가 최고의 댄서, 가수가 아니란걸 알아요. 하지만, 내가 최고가 아니여야만 원하는대로 도발할 수 있죠. 이번 투어의 목표는 쓸떼없는 금기를 깨는것이에요”라고 말하며 과감한 퍼포먼스를 감행해 많은 논란을 만들었습니다. “Like a Virgin” 공연 중 두 남자 댄서와 함께하는 자위와 애무를 연상케하는 퍼포먼스때문에 종교 단체들로부터 극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위키디피아 마돈나편 인용]
또 마돈나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Like a Virgin”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곡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성관계가 묘사되는 내용과 선정적인 가사 또한 가족관의 파괴등등으로 인해 당시 큰 논란을 야기햇습니다. 따라서 이 노래를 금지시켜야한다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앞에서 로버트 엠 그랜트는 마돈나가 확실히 타고난 뛰어난 재능은 없다며 “뛰어난 보컬리스트, 음악가, 댄서, 싱어송라이터, 배우로서 마돈나의 재능은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논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돈나의 다재다능함을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자체의 재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재능을 끌어와 성공했다고 인정하드리도…
그녀는 그녀의 재능은 매우 다양한 범위에서 발휘함으로써 그 재능을 증명해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모든 면에서 가장 최고는 아니었을지라도 아트를 하는 사람으로 마돈나를 자리매김하게 했으니까.
마돈나는 가수로서뿐만이 아니라 영화배우로서도 적지 않은 자취를 남겼습니다. 영화 Evita로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재능은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마돈나는 동화책 작가로도 성공적인 데뷰를 합니다. 2003년 9월 칼라웨이 아트& 엔터테인먼트에서 출판한 “The English Roses” 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목록 중 1위로 데뷔했고, 역사상 가장 빠르게 팔린 동화책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동화책의 내용은 네 명의 여학생들이 서로를 질투한다는 내용이었지요.
마돈나는 또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의 길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말라위 사람들이 직면하고있는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 《I’m becase we are 아임 비코즈 위 아》가 그것입니다.
이 다큐 영화의 감독은 나단 리스만이 맡았고, 마돈나는 각본을 맡았습니다. 아쉽게도 이 다큐 영화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마돈나는 《타락과 지혜》라는 또다른 영화에서 처음으로 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평은 긍정과 혹평이 공존했습니다. 《타임스》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만큼 했다”고 말했고,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영화에 대해 “마돈나는 전혀 가망없지 않은 첫 노력을 했지만, 그냥 보관해 놓는게 좋을 것이다”며 혹평을 했다고 합니다. [위키디피아 마돈나편 인용]
마돈나는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사업가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마돈나 자신의 딸 루데스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마테리얼 걸을 런칭했는데, 이 마테리얼 걸은 1980년대 마돈나가 한창 전성기였을 시절 펑키걸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고, 메이시스 산하로 런칭되었습니다. 2011년 11월 마돈나와 MG 아이콘은 Truth or Dare by Madonna라는 명으로 신발, 속옷류, 악세사리를 생산하는 두 번째 의류 브랜드를 런칭했습니다.
또한 하드캔디 피트니스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규모의 피트니스 센터 사업을 시작해, 2010년 11월 멕시코시티에서 첫 센터를 개장햇습니다.
마돈나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필요시마다 다양한 선택을 하고 그녀늬 커리어를 변화시켜왔고 그것이 그녀를 “Queen of POP”으로 군림하게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