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덕수궁에 대해서 포스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 사무실 옆에 덕수궁에 있어서 점심시간이면 덕수궁에 다녀오곤 했었는데(그 당시는 점심시간에는 무료 입장이었습니다.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궁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뜻, 그렇지만 지금은 일괄 1000원씩 입장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덕수궁을 주제로 포스팅을 하게되니 여러 추억들이 떠오르네요.
덕수궁은 규모도 그리크지않고(일제시대에 그 규모를 확 줄였다고 합니다.) 주변의 고층 건물들에 쌓여있다보니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지는 못하는 곳인 듯 합니다. 경복궁 등 다른 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시청이 바로 앞에 있는 등 어느 궁보다 훨씬 접근 입지 조건을 뛰어나므로 가볍게 둘러볼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첫째, 덕수궁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점부터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에 있는 곳입니다. 고종이 아관파천 후 이 덕수궁으로 돌아왔고 이 과정에서 서양의 건축 양식을 빌어 건축하다보니 건물들도 현대적 요소를 많이 반영되어 있어 건축이 흘러온 방향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으며
둘째, 각 건물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있는지 역사와 더불어 살펴보면 좋고
셋째, 비록 작지만 풍광은 어느 궁 못지 않아 소소하게 즐길 수 있으며
넷째, 수문장교체식, 대한제국역사관등 볼거리 및 전시 거리가 풍부합니다.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덕수궁 야경입니다.
덕수궁과 주변의 빌딩이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고전과 현대가 잘 어울린 풍경이라고나 할까요.
덕수궁의 위치
아래는 중구청에서 가져온 지도입니다. 덕수궁주변이 잘 표현되어있어 이를 보면 덕수궁의 위치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수궁의 대한문을 나서 기을 건너면 서울시청광장이 있으며,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이 나옵니다. 여기 돌담길을 지나면 정동이 나오고 정동극장등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래는 덕수궁내 안내지도입니다. 덕수궁에 대해서 전체적인 윤곽을 알고 싶을 시 유용할 것 같습니다.
덕수궁의 역사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다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같은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
1907년 7월 일제의 강압에의해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전위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되어 덕수궁이라 명하게 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다.
덕수궁 수문장 교체식
덕수궁 대한문앞에서 이루어지는 수문장 교대식은 1996년 서울시가 서울의 볼거리를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어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에 궁문 앞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전문가의 고증과 과거 궁의 수의를 했던분의 고증을 토대로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날씨가 아주 좋지않은날을 제외하고 매일 3회씩 수문장 교체식이 약 30분간 진행됩니다.
이 수문장교체식을 연간 100만명이 관람을 하고있으며 외국인도 거의 5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덕수궁 중화전, 약소국의 설움을 간직한 곳
중화전은 1902년 건립된 덕수궁의 법전(法殿)이다
그러나 1904년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현재의 덕수궁 영역이 잿더미가 되면서 중화전은 옛모습을 잃고, 지금처럼 단층 팔작지붕으로 1906년 재건된다. 원래는 2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단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다른 궁보다 웅장함에 떨어진데에는 그런 역사적 아픔(?)이 서려있다.이곳 중화전은 일반적인 궁궐의 법전 용도답게 왕의 즉위식 및 가례식,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의식, 조하례(朝賀禮)의식 등 공식행사가 거행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로 고종에게서 순종에게로 황위를 계승하는 행사가 열린 곳입니다. 이 행사에 고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씁쓸한 이야기지요
중화문에서 바라본 중화전입니다. 마침 지나가던 새가 카메라에 같이 잡혔네요
덕수궁 석어당, 인조반정의 현장
왕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던 석어당입니다.
역사를 보니 파란만장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 곳이네요
광해군은 자신이 왕이 된 후 인목왕후를 비롯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들을 덕수궁(당시에는 경운궁)으로 유폐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석어당에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감금생활을 했었지요.
하지만 이는 곳 인조반정의 구실이 되어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여기서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죄를 물었다고 합니다.
덕수궁 함명전, 고종이 승하하신 곳
함명전은 아관파천 후 1897년 고종이 환궁할 시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된 전각입니다.
1904년 화재로 중건되었으며 1918년 이곳에서 고종이 승하하였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가 있어 보물820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함명전을 담아놓은 사진이 없어서 여러번 갔으니 어디 있을텐데 막상 찾으려니 없네요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함명전 사진입니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지금은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조전입니다.
석조전은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1900년 공사를 시작해 1910년 완공되었습니다.
석조전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의 전통 건축이 나무로 집을 짓는 데 비해, 근대화의 상징으로 지은 이 집은 돌을 사용해 서양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근대화만이 살 길이라고 믿었던 고종의 의지에 따라 외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한제국 주도로 건립되었습니다.이 석조전은 황제의 침전 및 외국 사신 접견장소로 사용되다가 고종이 승하한 후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됐었다가 2009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5년간의 공사끝에 대한제국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덕수궁 구석구석 소소한 풍광 – 덕수궁의 담들
덕수궁 구석구석 소소한 풍광 – 덕수궁의 문들
덕수궁 구석구석 소소한 풍광 – 덕수궁의 문양들
덕수궁 구석구석 소소한 풍광 – 덕수궁의 사람들
▲ 덕수궁 마루에 잠시 쉬면서 덕수궁 안내책자를 보는 모습을 담아보았습니다.
▲ 덕수궁 마루에 잠시 쉬면서 이런저런이야기를 하는 연인들
▲ 덕수궁 계단에 낮아 책을 보시는 할아버지
아래사진들은 여름 비오는 어느날 덕수궁에서 담은 사진들입니다.
배롱나무꽃과 덕수궁의 고색찬란한 건물들과 우산과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잘 어울렸던 시간이었습니다.
참고 – 궁과 궁궐의 차이
우리가 흔히 섞어서 쓰는 ‘궁(宮)’ 과 ‘궁궐(宮闕)’ 은 그 규모나 용도가 엄연히 구별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과 같은 곳은 궁궐에 속하며 이들을 5대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동별궁, 창의궁, 어의궁, 용흥궁, 선희궁 등은 ‘궁’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궁궐’은 아니다. 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이거나 또는 왕족들이 살던 집이다.
궁과 궁궐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궁’ 은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주거(住居)를 담당하는 곳이고 ‘궐’ 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사무를 보고 일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곳이다. 그래서 ‘궁궐’ 하면 ‘궁’ 과 ‘궐’이 합쳐져 일상적인 생활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도 볼 수 있게 복합적으로 구성된 곳을 말한다.
궁궐에는 또 잠자고 생활을 하는 주거 공간과 업무를 처리하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사무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
왕은 낮에는 ‘궐’ 쪽에서 정사를 보고 밤에는 주무시는 ‘궁’ 쪽으로 옮겨 간다. 왕비가 계신 침전이 있는 곳이든 사랑하는 후궁이나 궁녀의 숙소가 있는 곳이든 모두 궁쪽에 모여 있기 때문에 그속으로 간다. 궁궐 내이지만 왕도 출퇴근을 하는 것이다. [다음 Tips에서 인용]
참고 – 서울 나들이 관련 글들
[서울나들이]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역사와 현대와의 공존하는 덕수궁 이야기
그 외 아직 준비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