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 소득감소 고령화… 트렌드 바뀌는 주택시장
#1 공인회계사인 이모 씨(35)는 지난해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아파트 전용면적 82m²(약 25평)에 청약해 당첨됐다. 이 씨는 부인도 회계사여서 더 큰 집을 장만할 여력은 되지만 굳이 집을 사는 데 돈을 많이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부모님은 무리해서라도 큰 아파트를 사야 한다고 했지만 당분간 출산 계획이 없는 데다 장기간 돈이 묶이는 부동산에 큰돈을 투자하기보다는 다른 쪽으로 굴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198m²(약 60평) 아파트에 사는 최모 씨(59)는 인근 소형아파트로 이사할지 고민하고 있다. 두 딸이 모두 결혼해 부부만 살기에는 집이 너무 크고 관리비도 많이 나오는 데다 은퇴 이후 고정적인 수입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 씨는 “집 크기를 줄여 남은 돈으로 상가나 오피스텔을 사서 세를 놓으면 매달 임대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핵가족화로 1인가구 증가… 체면보다 실속 중시 경향
“무리해서라도 큰 집”은 옛말… 집값 급락 작년에도 소형은 강세
소형 아파트가 뜨고 있다.
최근 아파트 분양시장에서 전용면적 85m² 미만의 소형 아파트는 수요가 몰려 높은 청약경쟁률을 보이는 반면 중대형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시들해지고 있다. 중대형 아파트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2, 3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실질소득 감소, 1, 2인 가구의 증가와 고령화 등 다양한 경제·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축소 지향의 주거문화’가 형성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 경쟁률-가격 모두 소형이 강세
대우건설이 올 3월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분양한 ‘효창파크푸르지오’는 면적이 작을수록 1순위 청약경쟁률이 높았다. 전용면적 59m²(약 18평)B타입은 19.6 대 1로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 반면 84m²(약 25평)와 114m²(약 34평)는 한 자릿수 경쟁률에 그쳤다.
지난달 경기 의왕시 내손동에서 분양된 ‘래미안에버하임’도 가장 작은 59m²B타입의 경쟁률(3.4 대 1)이 최고였다. 대림산업과 코오롱건설이 지난달 인천 서구 신현동에서 분양한 아파트도 ‘소형 인기, 중대형 미달’의 결과가 나왔다. 3년 전만 해도 이런 현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2006년 11월 평균 경쟁률 75 대 1을 기록한 ‘서울숲 힐스테이트’(성동구 성수동)는 117m²(약 35평)의 경쟁률(36.1 대 1∼50.8 대 1)이 42m²(약 12평·18.5 대 1)의 2배 이상이었다. 2006년 3월 성남시 판교신도시 중소형 동시분양에서도 중형 아파트의 청약경쟁률이 소형을 앞질렀다.
요즘은 집값도 소형이 강세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지역 85m² 초과 아파트는 2006년 평균 32% 급등한 뒤 2007년 ―0.5%, 2008년 ―6.6% 떨어졌다. 반면 60m²(약 18평) 이하는 2007년 평균 7.1% 오른 뒤 집값이 급락한 지난해에도 오히려 4.4% 상승했다.
소형 주택이 주택 공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늘고 있다. 전국적으로 중대형 공급량은 2005년 8만875채에서 2007년 11만6222채로 늘었지만 2008년엔 6만6040채로 감소했다. 반면 60m² 이하는 2005년 5만6668채에서 2007년 7만3944채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에도 8만2084채로 ‘나홀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 대출규제로 중대형 신화 ‘흔들’
2000∼2006년 이어진 부동산 호황기는 ‘중대형의 시대’라고 불릴 만했다. 너도나도 빚을 내서 실제 필요한 주거면적보다 더 큰 아파트를 사는 열풍에 휩싸였다. 자고나면 수천만 원씩 오르는 아파트 값 상승을 중대형이 주도했기 때문에 대출을 받아서라도 큰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을 당연한 선택처럼 받아들였다. 이런 흐름에 편승해 건설사들도 중소형을 제쳐놓고 중대형 공급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이라는 칼을 빼들면서 2007년부터 집값이 꺾이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던 자금이 끊기면서 주택 수요 자체가 감소해 집값도 약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는 대출 규제로 비틀거리던 중대형 아파트 선호 현상에 결정타를 날렸다.
부동산114 김규정 부장은 “2006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 등의 중대형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2007년 이후 보유세가 강화되고 대출 규제가 심해지면서 중대형은 수요가 줄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1인 가구 늘어 소형 인기 이어질듯
경기침체와 자금난이 소형 주택 인기의 단기 요인이라면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는 장기적 요인으로 꼽힌다. 핵가족화가 정착돼 예전보다 방이 적어도 되고, 독신 가구가 크게 늘어 대형 아파트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은 2000년 16%에서 지난해 20%로 늘었다. 부부만 있는 가구도 같은 기간 12%에서 15%로 증가했다. 1인 가구와 부부 가구의 비율은 2030년 각각 24%, 21%로 높아져 전체 가구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외형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는 성향이 확산된 것도 주택 과소비 현상을 약화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분석한 책 ‘아파트에 미치다’를 출간한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도쿄(東京)에 사는 일본인 부장급은 보통 30평형대에 살지만 서울의 한국인 부장급은 대부분 최소 40평형대에 살 정도로 주거 생활에 거품이 있다”며 “소형 주택의 인기는 주택 과소비의 거품이 빠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은퇴를 앞둔 직장인들이 집 크기를 줄여 노후수입을 확보하려는 것도 중요한 변수다. 국민은행 PB센터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최근 들어 ‘집은 사람의 얼굴’이라는 개념이 약해지고 관리비 절약 등 실리를 중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전 교수는 “새로 주택소비 시장에 진입하는 20, 30대가 큰 집보다는 적절한 공간을 자기 취향에 맞게 꾸미는 것을 선호하는 점을 고려하면 소형 주택이 각광받는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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